61 화
‘소공작님을 될 수 있다는 기대 때 문인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네가 뭔데 자카리를 만난다는 기대 로 가슴을 두근거려?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발끈해 버렸다.
‘참, 이번에 마상 시합에 출전하신다고 들었어요. 소공작께서 몸이 상 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소공작께서는 분명 아샤꽃가지를 얻으 실 수 있을 거예요. 어느 분께 꽃가지를 바치실 생각이신지요? 만약 제가 소공작님의 꽃가지를 받을 수 있다면, 기뻐서 기절하고 말 거예요.’
……아니, 네가 왜 자카리의 꽃가 지를 받아? 이엘리는 기가 막힌 기분으로 편지를 쏘아보았다.
‘앞으로는 소공작님이 아닌, 오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희는 사촌 관계니까 오빠라는 호칭이 크게 어색한게 아니잖아요? 그럼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조만간 또 뵈어요.’
엘리제 로렌. 최대한 어여쁘게 꾸며 쓴 필체로 서명이 남아 있다.
오빠라니. 엄연히 소공작이라는 작위가 있는데 네가 왜 오빠라고 불러?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
이엘리는 자카리를 밉지 않게 흘겨 보았다. 너,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제국은 엄연히 사촌끼리 혼인이 가능했고, 엘리제는 이엘리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이엘리를 포함한 아가씨들은 보통…….
‘……관심 없는 사람에게 이런 귀찮은 짓 따위, 안 한단 말이야!’
딱 보아하니 엘리제는 자카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호감을 교묘하게 감춰 두긴 했지만, 그건 감춘다고 완벽히 감춰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자카리는…….
‘나에 대해서는 예민한 주제에, 자기에게 오는 호의에는 둔감하지.’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사람 속 도 모르고, 정말.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설마 이엔, 질투해?”
“그럴 리가..!”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이엘리는 순간 멈칫했다. 이엘리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런가? 나 지금 질투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숨을 삼켰다. 자카리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네가 질투해 준다면 난 무척 기쁘겠지만.”
“그,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내심 기대한 건지, 자카리는 대번 실망한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입 안, 보드라운 살을 깨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엘리는 흘끔 그를 보았다.
“어쨌든 자카리, 그 편지에 답신 쓸 거야?”
“아니 뭐,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마상 시합 전야제에서도 만날 거니까.”
”……”
어째 기분이 더 가라앉는 기분이다. 전야제에서 엘리제를 또 만나야 한다니.
이엘리는 엘리제와 자카리가 가까 이 있지 못하게 해야겠노라, 마음을 굳혔다. 이엘리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 편지, 줘.”
“응? 왜?”
“태워 버리게.”
“……태운다고?”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앙칼져 보였다.
“아, 정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카리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가 애정 가득 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다.
“이엔. 너무 귀엽잖아.”
질투 따위 안 한다 했지만, 편지를 갖고 올 때부터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나.
태워 버린다고 말하면서 새침하게 구는 것까지 너무 사랑스럽다. 자카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포르투나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일이 지나고 며칠 후.
오늘은 자카리가 멋대로 출전한다 고 선언한 마상 시합의 전날이었다.
이번 마상 시합 전날엔 전야제란 명 목으로 황제가 무도회를 열었다.
‘이 무도회를 위해 오늘 하루 종일 고생했지.’
전투적으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지켜보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다색으로 시작해서 남청색으로 물드는 오묘한 빛깔의 드레스는 저에게 꽤 잘 어울렸다. 보석은 사파이어를 선택했다.
‘일부러 자카리의 눈동자 색으로 맞췄는데, 나름대로 잘 어울려서 다행이야.’
자카리에게도 에메랄드로 만든 크라바트 장식을 골라 주었다.
연인, 혹은 부부가 이런 식으로 색을 맞춰 치장하는 건 사교계의 오래 된 관습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이 부부임을 부각시키고 싶어서 노골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귀찮게 굴지 말라는, 황제에게 보이는 일종의 표현이었다.
‘음…… 자카리가 조금이라도 예쁘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지만.’
자연스럽게 자카리에 관한 생각을 떠올리던 이엘리는 수줍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요새 자카리가 자꾸 남자로 보여서 큰일이었다. 남동생 같던 어린아이 가 이렇게 훌륭하게 자랄 줄이야.
‘참, 손수건 챙겨야지.’
거울 앞에서 꼼꼼히 자신의 모습을 살피던 이엘리는 마지막으로 손수건을 챙겼다.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문장이 삐뚤빼둘하게 수놓인 하얀 손수건. 정말 이걸 줘도 되나.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아.”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외쳤다.
“들어와!”
달칵. 문이 열렸다. 자카리가 한 걸음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순간 이엘리는 멍해졌다.
”……”
잘생겼어. 딱 자카리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새하얀 은발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몸에 착 달라붙는 남청색 정장을 차려입은 자카리.
남성 패션 잡지의 카탈로그에서 쏙 빠져나온 것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그가 대형견이라면, 지금 그는 우아한 표범 같다.
“이엔, 너 오늘 되게 예쁘다.”
자카리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말인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카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되어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그, 고마워.”
더듬더듬 그렇게 말하자, 자카리가 고개를 내려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씩 눈웃음을 친다.
“이상하네. 평소라면 ‘내가 예쁜 건 당연하지’라고 했을 거잖아.”
“그건……”
아니, 바보 같은 내 심장아. 왜 멋대로 뛰고 그래! 부부로 산 게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이러니!
‘진정하자, 심장아. 진정해!’
어쩔 줄 모르고 데굴데굴 구르던 이엘리의 눈동자가, 순간 자카리가 맨 크라바트로 이동했다.
‘음, 역시. 이럴 줄 알았지.’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크라바트의 모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양이 엉망이란 소리다.
헝클어진 크라바트 위, 이엘리와 눈동자 색을 맞춘 에메랄드 장식이 영롱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크라바트.”
“왜? 모양이 이상하게 잡혔어?”
“그래. 넌 언제쯤이면 크라바트를 제대로 매는 방법을 배울 거니?”
이엘리의 불평에 자카리는 샐샐 눈 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이엘리는 능숙한 동작으로 에메랄드 장식을 빼내고, 크라바트의 모양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쏙이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이제야 좀 봐 줄 만하네.”
“그냥 '봐 줄 만하다’ 수준이야?”
“응?”
자카리의 물음이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자카리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오늘 나, 너에게 최대한 잘생겨 보이려고 엄청 노력했다고.”
“어, 음……”
그, 그렇게 흑 치고 들어오는 건 반칙인데. 이엘리는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별로야?”
자카리가 고개를 숙이며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뭇대던 그녀가 입술을 작게 달싹인다.
“……아니.”
“으응?”
“자, 잘생겼다고.”
아, 말을 더듬어 버렸어. 창피 해…….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끈대는 감촉이 창피하다.
“이엔, 그거 알아?”
“뭘?”
“넌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야.”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지? 이엘리는 힐끔 그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는 따스한 애정과, 조금 더 진 득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네 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러면 안 된다. 애써 감춰 왔던 농밀한 집착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내가 최대한 노력해야겠지.”
“자카리?”
“그냥 그렇다고.”
금세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온 자카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렸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한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네, 그래요.”
새치름하게 대답한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팔에 건 작은 손가방 안에 넣어 둔 손수건을 생각했다. 마음이 금세 무거워진다.
‘과연 내가 자카리에게 이 손수건을 줄 수 있을까?’
완벽한 모습을 한 자카리의 모습을 보자 점점 더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녀의 손수건을 만인에게 공개하게 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이엘리는 반쯤 울상이 된 채로 마 차에 올라탔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황실의 화려함은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 한 곳은 더욱. 그녀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도도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나, 오늘 최선을 다해 꾸미기를 잘한 것 같아.’
다소 과할 정도로 치장한 게 여기서는 빛을 발했다.
특히 사교계의 구식 관습을 충실히 따라서, 두 부부가 서로의 눈동자 색깔을 맞춰 보석이며 드레스 색깔을 선택한 것만 해도 그렇다.
“어머나, 저렇게 색을 맞춰 치장하는 건 다소 예스러운 관습인데.”
“그런 관습까지 충실히 따를 정도라니……”
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 금은 놀란 듯한 반응은 금세 호의적인 반응으로 번져 나갔다.
“헤센바이츠 소공작 부부께서는 무척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그러게요. 금슬이 좋은 부부는 보는 사람까지 기쁘게 하는 법 아니겠 어요?”
“맞아요. 화목한 가정은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니까요.”
……왜냐하면 이런 반응을 원했으니까. 다소 유난을 떠는 부부로 보이는 게 황제의 쓸데없는 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 정도면 황제도 그들의 의도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겠지.
‘흠, 이 정도면 됐나.’
그럼 이제 각자 사교 활동을 할 시간이다. 이엘리는 마주 잡은 그의 손을 놓은 후 빙긋 웃었다.
“그럼, 자카리. 조금 이따 만나.”
하지만 자카리는 뚱한 얼굴이었다. 그가 멀어지는 이엘리의 손을 다시 잡아채며 간절하게 묻는다.
“……같이 있으면 안 돼?”
“안 돼,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도 회에서 파트너와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건 빈축을 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다른 귀부인들, 혹 은 귀족들과 각자 인사를 나누는 시간은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괜히 트집 잡힐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잖아.”
“그래도…… 황제가 네게 귀찮게 굴면 어떡해?”
목소리를 낮춘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 게 뜨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럴 거면 너부터 엘리제를 좀 조심해 줄래?’
하지만 질투 따위 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으니, 차마 그렇게 쏘아붙 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오시기 전에 네가 먼저 돌아오면 되지.”
”……”
자카리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한숨을 푹 쉰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당근을 건넸다.
“대신 인사가 다 끝나면 계속 같이 있자. 첫 춤도 함께 추고. 알았지?”
“……진짜지?”
“그럼.”
이엘리는 빙긋 눈웃음을 쳤다. 자카리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인사를 할 마음이 든 것 같았다.
“알았어, 그렇다면.”
“금방 다시 만나자, 알았지?”
이엘리는 자카리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곤 걸음을 옮겼다.
자카리는 그녀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저번 대관식 때와 마찬가지로, 호기심 섞인 시선들이 이쪽으로 수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음, 그렇다면 누구와 먼저 인사를 나누어야 하나……”
차라리 황녀가 있었다면 쉬웠을 텐데, 아직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은 무도회장에 오지 않았다.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니까, 좀 애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