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96)

60 화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입술을 말아 올려 사납게 웃는 모습이 섬뜩했다.

“폐하. 폐하께서 망상벽이 있으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헤센바이츠 공.”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연하 다는 듯이 저와 황녀님을 엮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자카리의 나른한 눈동자가 황제를 향했다.

평소에 이엘리에게 보여 주던 다정한 모습은 간데없이, 지금의 자카리는 거친 북부를 한 손에 움켜쥔 차 기 군주였다. 자카리는 싸늘하게 말했다.

“영민한 황제라 소문이 자자하였는 데, 아무래도 그 소문은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소공작. 그저 농담이라 말했을 뿐 인데 이게 무슨 무례요?”

“정말로 저와 황녀 전하의 혼담을 농담거리로 삼으셨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발언이지요.”

황제는 자카리를 찢어 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일 뿐이었다.

“아예 작금의 현실조차 보지 못하는 행동 아닙니까?”

그 말에는 황태자도 기분이 상했나 보다. 목소리를 잔뜩 낮춘 황태자가 차갑게 으르렁거렸다.

“적당히 하십시오, 소공. 저도 더 이상 참을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폐하께서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자카리는 싸늘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맞받아쳤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지금 짐을 겁박하는 겁니까?”

“글쎄요, 겁박이라는 말은 옳지 않군요. 전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내내 비웃음을 짓고 있던 자카리였지만, 푸른 눈동자만큼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카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 다. 흠칫한 황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카리가 차갑게 되물었다.

“설마 북부가 다시 황위를 되찾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폐하?”

“공작, 그게 무슨……!?”

“북부는 황위를 되찾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말문이 턱 막혔다. 자카리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오만한 얼굴로 선언했다.

“찾지 않는 것이죠.”

”……”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제는 입술을 짓씹었다. 노골적인 발언에 사람들도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카리는 그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지금 저희가 황가의 무례를 얼마나 참아 드리고 있는지, 폐하께서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자카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공작위의 안정적인 승계를 위해 공작가가 황가의 무례함을 참아 주고 있다는 것. 자카리가 손을 뻗었다.

“아 참, 이 손수건은 돌려드리겠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팔랑팔랑 하얀 손수건이 떨어져 내렸다.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손수건으로, 아까 황제가 억 지로 이엘리에게 쥐여 준 물건이었다.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했다.

“헤센바이츠의 차기 안주인이 지니고 있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물건인 것 같아서 말이죠.”

바닥에 구르는 손수건을 보며 황제는 낯을 굳혔다. 하지만 자카리는 이엘리를 돌아볼 뿐이었다.

“가자, 이엔.”

”으,응.”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니,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한 황제와 시선이 마주 쳤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나빠.’

소름이 돋은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뱀 같은 회색 눈동자가 집요하게 제 뒷모습을 따라붙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대 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엘리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방금 전 황제와의 일을 되짚어 생각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상에, 자카리는 황제를 앞에 두 고 무슨 협박을 한 거람.’

이엘리는 자카리를 힐끔 곁눈질했다. 아마 북부의 힘으로 제국 전체를 뒤엎어 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이다. 하지만 헤센바이츠가 공작가의 이름을 포기하고 황위의 이름을 되찾는 건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그리고 북부가 독립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쪽은 아마 황가일 터.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라도,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말하는 건 다르잖아.’

게다가 상대는 황제. 너무 대놓고 싫은 기색을 표현한 건 아닌가 싶어,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자카리.”

”응, 이엔.”

힐끔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자카리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이엘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황제에게 그런 식으로 대해도 괜찮았던 걸까?”

“무슨 상관이야, 그딴 자식.”

그렇게 말하던 자카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엘리를 바라보더니 조그맣게 사과를 한다.

“……그보다 미안해, 이엔.”

“응? 어째서?”

“그 자식이 네게 무례하게 굴었잖아. 역시 내가 곁에 붙어있어야 했는데.”

자카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엘리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물었다.

“아냐, 자카리가 왜 나한테 사과해?”

“하지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네가 사과 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한 그녀가 살포시 눈을 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카리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게다가 네 잘못도 아닌 일이라면 더더욱.”

“……이엔.”

이엘리의 곁에 주저앉은 그가 툭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녀가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래도 신경 쓰게 해서.……”

“글쎄, 난 괜찮으니까.”

언제나 어른스러운 이엘리. 내가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그녀도 내게 조금만 기대 줬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괜찮다’라고 말하는 게 좀 서운했다. 그때 이엘리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너를 황녀님과 엮어 이야 기하는 건, 역시 좀 듣고 싶지 않더라.”

“그랬어?”

“그럼. 누가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엮이는 걸 좋아하겠어?”

그 말을 들은 자카리의 눈동자가 순간 물에 비친 달처럼 흔들렸다.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도 네 얘기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 입에서 직접 듣고 싶어.”

“그래, 이엔.”

이엘리의 말에 자카리는 씩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아까 전과는 다르게 확연히 밝았기에, 이엘리는 조 금 의아해졌다.

음, 갑자기 자카리가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 이유가 뭐지?

 한편 황제와 황녀가 타고 있는 마차 안은 싸늘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다. 실상은 아니라 해도, 외부에는 사이좋은 남매임을 연기하느라 남매 가 함께 마차를 탄 것이다. 황녀는 숨을 삼켰다.

“……이엘리.”

황제가 초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보는 이가 없으니 ‘레이디 헤센바이츠’라는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이엘리의 거절에도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 대한 소유욕만 강해질 뿐이었다.

”페하. 레이디 헤센바이츠에게는 더 접근하지 않으시는 편이……”

보다 못한 황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 순간. 철썩! 황제는 황녀의 뺨을 올려 붙였다.

“네가 뭐라고 감히 황제인 내 행동에 간섭하느냐?”

“페, 폐하. 하오나……”

“고작 너 같은 천출에게 간섭당 할 내가 아니다.”

싸늘하게 대답한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제 행동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멈출 수가 없다. 살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 가녀린 체구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떻게든 그녀를 손안에 넣겠어.’

경멸의 기색을 띤 연녹색 눈동자마 저도 사랑스러운 여인. 그녀를 갖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그녀가 제도에 올라 온 지금이 적기지.’

황제의 눈빛이 기이한 빛을 품은 채 깊게 가라앉았다. 황녀는 그런 황제를 숨을 죽인 채 바라보았다.

어째서 황제가 레이디 헤센바이츠에게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 집착이 과연 좋은 방향으로 끝날까?’

황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앞으로의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페라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이엘리는 다시 한 번 손수건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침모를 쫓아다니며 도안을 상의하고 만든 보람이 있었는지, 그럭저럭 손수건 같은 모양 은 나왔다.

“휴, 드디어 다 완성했다.”

이엘리는 완성한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았다. 스스로의 솜씨에 자신이 없었던 이엘리는 화려한 자 수는 애초 포기했다. 헤센바이츠의 문장을 귀퉁이에 수놓는 데만 해도 한세월이었다.

“……음, 너무 초라한가?”

이엘리는 미간을 좁힌 채 손수건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좀 모자랄 것 같다. 다른 귀부인들은 분명 호화로운 손수건을 가져올 텐데. 향수 몇 방울을 뿌린 그녀가 한 숨을 쉰다.

‘이걸 자카리의 손목에 묶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른 귀부인들이 엄청 비웃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건, 자카리는 아주 자랑스럽게 손수건을 손목에 감고 다닐 거라는 거였다. 이엘리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뭐, 그래도……”

자카리가 기뻐해 주면 좋을 텐데. 그의 즐거운 얼굴을 상상하던 그녀는 살짝 뺨을 붉혔다.

어쨌든 이 손수건은 무도회 당일까지는 보여 줄 생각이 없다. 그녀는 손수건을 서랍에 넣었다.

“흠, 그렇다면 오늘 공작저에 온 편지들이나 확인해 볼까.”

제도에 올라오는 일이 드문 공작가 였기에, 여기저기서 초대장이며 잡다한 편지들이 자주 날아왔다.

물론 두 사람은 최소한의 일정만 소화한 이후 다시 공작령으로 돌아 갈 생각이었지만.

“이건?”

편지를 살펴보던 이엘리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의 손에는 화 려한 꽃무늬가 들어간 고급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짙은 향수 냄새가 풍기는 편지 봉투에 쓰여 있는 발신인은…….

“……엘리제 로렌?”

이엘리는 좀 당황했다. 엘리제가 편지를 보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수신인 또한…….

“자카리잖아.”

비록 두 사람은 사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로 친분이 있진 않았던 것 같은 데.

결국 이엘리는 편지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카리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자카리?”

“이엔, 웬일이야?”

타운하우스 뒤편의 훈련장에서 한참 연습용 검을 휘두르던 자카리가 의아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너에게 편지가 왔거든.”

“나에게?”

“응.”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내려놓은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엘리에게 다가왔다.

“중요한 편지야?”

“중요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미간을 좁힌 그녀가 자카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 들던 자카리가 미간을 구겼다.

“으, 향수 냄새……”

향수도 적당히 뿌려야 향기롭지, 이건 마치 향수에 전 수준이다.

자카리는 대충 편지를 뒤집어 봤다. 발신인을 확인하던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떠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엘리제 로렌? 얘가 왜 나한테 편지를 보내?”

“그거야 나도 모르지.”

저도 모르게 새침한 대답이 나왔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쏙여 보이곤 편지 봉투를 대충 찢었다.

“별 내용도 없는데?”

편지를 대강 읽어 본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이엘리는 관심 없는 척 그를 힐끔거렸다.

“무슨 내용인데?”

“그냥, 이번에 만나서 반가웠다고?”

그렇게 말하던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편지를 내밀고는 이엘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했다.

“읽어 볼래?”

“응.”

이엘리는 냉큼 편지를 낚아채 펼쳤 다. 편지 봉투에서 나는 향수 냄새 보다도 더한 향수 냄새가 이엘리를 덮쳐 왔다.

‘친애하는 헤센바이츠 소공작님께.’

누가 누구를 친애해? 이엘리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다음 문장을 읽었다.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엘리제예요. 사촌인데도 거의 교류조차 없이 지냈던 것 같네요.’

그거야 너희가 자카리를 괴물 취급하며 멀리했으니 그렇지! 이엘리는 벌써 속이 답답해졌다.

‘이번에 오페라하우스에서 소공작님을 만나 뵙고 정말 기뻤답니다. 제가 제도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공작령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네요. 앞으로는 자주 얼굴도 뵙고, 돈독한 친교 또한 쌓으면서 지냈으면 좋겠 어요. 얼른 마상 시합의 전야제가 열렸으면 하고 바라고 있답니다.’

이엘리는 뚱한 얼굴을 했다. 얼굴을 자주 보고, 돈독한 친교를 쌓으려면 예전부터 그랬어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