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96)

58 화

“정 문제가 된다면 내가 알아서 처 리해 줄게.”

“뭐야, 그게 가능한 거야?”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응?”

“솔직히 작위 계승에 문제가 생길 까 봐, 지금껏 공작가가 양보하고 있을 뿐이야.”

자카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쨌거나 공작가는 명목상 황가의 아래에 있었다.

작위를 잇기 위해선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했다. 그를 위해 황가의 행동을 참아 주는 것뿐이다.

‘물론 황제의 허락 없이 작위를 잇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치 못할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 면 귀족가의 가주가 급사하고 후계 가 단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경우.

그럴 때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황제의 허락 없이 후계가 작위를 계승하는 게 가능하다.

“자카리?”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 어.”

제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떠올리며, 불길한 기분을 애써 털어 버린 자카리가 빙긋 웃어 보였다.

“황가에서는 내가 가진 겨울의 힘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혹여나 그 힘을 트집 잡아 작위 계승에 제동을 걸까 봐, 걱정하여 물러나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이엘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빙하 같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유사시에 공작가가 왕작을 가지고 독립할 수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 야.”

“으응……”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엘리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냉랭 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다만 황가와 대립하면 피차 귀찮아지니까 참고 있을 뿐이지.”

“자카리?”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자잘한 문제 정도는 내가 처리해 줄 수 있다는 뜻이야.”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스치듯 지나간 짧은 키스. 예전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 키스지만, 그녀는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너에게 의지하는 만큼, 너도 내게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 알았지?”

“그, 그럴게.”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내내 소년처럼 느껴졌던 자카리였다. 언제 저렇게 자라서 사람을 설레게 하는지. 그러던 중, 이엘리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내게 했던 말을 전해 줘야 하나?’

이엘리는 힐끔 자카리의 눈치를 살폈다. 진득한 감정이 가득한 목소리 로 속삭였던 그 음성들이 기억났다.

‘왜냐하면 저는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전 레이디가 헤센바이츠가 아닌, 블랑쳇의 성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

그 음성을 되새기던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말해 봤자 뭐 하나.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다.

‘……아냐, 별것도 아니고. 자카리의 마음만 불편해질 뿐이니까.’

자카리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엘리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 했는지, 자카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엘리를 달래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그의 미소를 보자 약간이나마 긴장 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엘리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페라를 관람하던 이엘리는 혼이 빠져나가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

이 재미없는 오페라는 여러모로 엄청났다. 지루함과 졸림을 선사함으로써, 황제가 준 스트레스까지 잊게 해 준 것이다.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 재미없잖아?’

지루함에 못 이겨 하품을 하던 그녀는 문득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졸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등을 꼬집었지만, 모조리 헛수고였다. 어느 순간 기억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엔.”

”……”

“이엔, 일어나.”

다정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사람이 자고 있는 거 안 보…… 아니, 잠깐만. 자고 있다고?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그녀는 파드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라……?”

이엘리는 졸음에 겨운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느새 오페라가 끝난 것이다. 그녀는 기겁했다. 설마 나, 공연 내내 자고 있었던 거야?

“버, 벌써 오페라가 끝났어?”

“벌써가 아니야. 무려 세 시간이 지나갔다고.”

”……”

얼굴을 붉힌 이엘리는 황급히 옷 매무새를 매만지는 척 시선을 돌렸다. 아, 창피해.

여기가 개인실 형식의 관람석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다 른 사람들에게 모조리 공개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때 자카리가 유들유들한 어조로 속삭였다.

“잘 자더라, 이엔.”

“그, 그건.”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한 번도 안 깨고 자다니. 역시 이엔은 대단해.”

이거, 나 놀리는 거 맞지? 그를 흘 겨보던 그녀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깨물어 삼켰다. 열정적인 반응을 보 이는 저 관객들은 분명, 상석에 앉아 있는 황족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 터.

“아니지. 이 무시무시한 오페라를 보고도 잠들지 않은 쪽이 훨씬 더 대단한 거 아냐?”

“뭐,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자카리는 그녀의 말에 선선히 긍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재미가 없었다.

기존에 알고 있는 건국신화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상당한 분량의 목적있는 각색을 가미 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각색의 방향은 물론, 헤센바이츠 공작가를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거지.’

내용은 대충 이랬다. 영원한 겨울이 머무른 북부엔, 잔혹한 은룡 헤 센바이츠가 살고 있었다.

용은 봄의 요정인 아샤를 사랑했지 만, 요정은 용이 아닌 기사를 사랑했다. 분노한 용은 요정을 독점하기 위해 비밀 정원에 가둬 두었고, 세계는 봄을 잃어버렸다.

결국 잔인한 용을 퇴치하고 요정을 구출하기 위해, 리펜베르크의 기사가 분연히 일어났다.

용과 기사는 일주일 밤낮을 사투를 벌였다. 승리자는 당연히 기사였지 만, 용의 마지막 발악 때문에 요정 은 큰 상처를 입는다.

결국 요정은 기사에게 축복을 내리며 숨을 거두었고, 기사는 위대한 성군으로 등극했다.

“음, 다시 내용을 떠올려 봐도 대단히 편파적인 내용이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빈정거렸다.

리펜베르크의 건국 전설은 어렸을 때부터 동화책이며 뭐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철저 하게 황가의 시각에서 서술된 내용 인 것이다.

“황가란 참 대단해, 이런 재미없는 오페라를 최고의 오페라하우스에 올 릴 수 있다니.”

멋진 노래와 훌륭한 오페라 가수들이 있어도, 내용이 별로면 극의 질이 떨어진다는 증거였다.

“우리 이엔, 칼 같은 비판이네."

쿡쿡 웃음을 터뜨린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후, 은밀한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사람들 몰리기 전에 지금 얼른 나가자.”

“어, 먼저 나가도 돼?”

“당연하지. 황족들은 내가 오페라를 봐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묻자, 그는 오만하게 답했다. 그녀는 새삼스레 공작가의 위상을 느꼈다.

‘하긴, 자카리는 원래 대단한 사람 이니까.’

그녀에게는 너무나 상냥해서 가끔 잊곤 하지만, 자카리는 황가와 유일 하게 견줄 수 있는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차기 주인이었다.

다정함보다는 오만함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 아닌가.

“그리고 이엔 너, 황제를 불편해 하잖아?”

그때 자카리가 씩 웃었다. 그의 손을 맞잡던 이엘리는 순간 자리에  멈칫했다. 그녀가 물었다.

“혹시 날 위해서 일찍 빠져나가려는 거야?”

“물론이지. 왜, 싫어?”

“그럴 리가.”

예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빙그레 웃은 그녀가 그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는 틈을 타 빠르게 공 연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 근데 뭔가 이상한데? 손이 묘하게 가벼운 느낌이야.’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된 채로 화려한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그녀의 비어있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아한 얼굴이 된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질 문을 던졌다.

“이엔, 너 가방 어디다 뒀어?”

“어? 내 가방?”

그러고 보니 손가방이 없다.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정신이 없으니 물건까지 놓고 다니는구나.

“아무래도 자리에  놓고 왔나 보네. 기다려, 내가 갖다 줄 테니까.”

“그럼 같이 가.”

“아니야, 금방 다녀올 수 있으니까.”

자카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곤 곧 몸을 돌렸다.

잠시 주변을 실꾀보던 이엘리는 그 나마 사람들 눈에 덜 될 것 같은 기둥 아래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황제를 다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한시바삐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 며, 사람들이 나오는 문을 살펴보던 때.

“설마, 레이디 헤센바이츠?”

뾰족한 가시가 박힌 새침한 목소리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어조다.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제 로렌이 예요.”

엘리제 로렌. 로렌 백작가의 단 하나뿐인 고명딸로, 그녀보다 한 살이 어리다. 저번 자카리의 성인식에도 제도에 있다며 내려오지 않았던 아가씨가 왜 여기에 있나. 그녀는 이 마를 구겼다.

‘딱 보기에도 저 아가씨,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네.’

솔직히 이엘리는 그에 큰 유감은 없었다. 자신도 엘리제를 싫어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아가씨가 아마, 로렌 백작 부 인이 자카리와 결혼 시켰으면 했다는 그 아가씨인가.’

참고로 제국은 사촌까지 결혼이 가 능해서, 자카리와 엘리제는 법적으로 혼인이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이엘리를 바라보는 엘리제의 눈빛은 상당히 사나웠다. 마치 연적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로렌 백작가는 원래 사람을 이렇게 불쾌하게 만드는 게 가풍인가?’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때 엘리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제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에서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국 최고의 오페라하우스’를 강 조하는 것을 보니 대충 각이 나온다. ‘결혼을 잘해서 신분 상승한 네가 웬일로 제도까지 올라왔니? 이 장소와 넌 어울리지 않아’ 정도로 해석하면 되려나?

“어머나, 로렌 백작 영애께서는 마치 제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것처럼 말씀 하시네요.”

그렇게 대답하며 이엘리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엘리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긴, 돌려 말하는 보통의 사교계 어법에 비하자면 그녀의 말투가 공격적 이긴했다.

“하지만 전 제국 유일의 공작가, 헤센바이츠의 차기 안주인이 될 사람이랍니다.”

그러나 이엘리는 저를 향한 무례함을 눈감아 줄 생각은 없었다. 이건 공작가의 위신 문제다.

“그런 제게 감히 북부의 가신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다니……”

이엘리의 차가운 연녹색 눈동자가 엘리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무례함을 벗어나, 이건 이제 모욕 적으로 느껴질 정도군요.”

“저, 저는 그러려던 게 아니라……”

“저를 모욕하는 것은, 나아가 제 남편과 헤센바이츠 공작가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결혼을 잘해서 신분 상승을 했을 뿐, 그 출신은 고작 자작 가문

의 영애잖아! 라고 생각하며 엘리제는 발끈했으나, 그 말을 입 밖에 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제, 제가 아직 어려서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엘리 개인이라면 모르되,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나온 이상 여기서는 한 걸음 물러나야했다.

“그렇다고 치죠.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면 제가 무조건 이해해 드려야 하나요?”

그러나 이엘리는 이대로 물러나 줄 생각은 없었다. 이엘리는 냉정하게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저와 로렌 백작 영애는 고작 한 살 차이일 텐 데요.”

“저, 레이디 헤센바이츠……”

“어린 나이를 핑계 삼아 스스로의 허물을 감싸기에는 조금 우습지 않나요?”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엘리제는 어깨를 굳혔다. 어쩐지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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