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96)

57화 

그녀의 부름에 자카리가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침착한 낯을 한 제 남편. 자카리는 ‘괜찮다’고 했지, ‘화가 나지 않는다’ 고는 하지 않았다.

이엘리는 왜 자카리가 마음대로 화조차 못 내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조금만 생각해 봤다면 알았을 텐데, 바보같이.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연다.

“그렇구나. 자카리는 헤센바이츠의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이니까……”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자카리. 하지만 그 어깨에 얹힌 무게는 무척 무겁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 헤센바이츠의 후계자이자 은룡의 힘을 각성한 청 년. 황실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 중 하나.

‘자카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정치적 인 의미를 가지니…… 함부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어렵겠지.’

어째서 그걸 지금껏 떠올리지 못했 던 걸까.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자카리와 시선을 맞춘다.

“네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 네.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아냐, 이건 네가 사과할 필요 없는 일이니까……”

당황한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짓궂은 표정이 된 그녀가 생긋 웃었다.

“그런데 뭐, 이왕 생각이 짧은 사람이 된 김에.”

“……응?”

“내가 너 대신 화내 줄게.”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팔짱을 꼈다.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예쁘장한 입술을 열었다.

“망할 황족들. 바보, 멍청이, 머저리들. 무례하고 개념도 없고 짜증 나. 완전 재수 없어.”

이엘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황실에 대한 욕설을 쏟아 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이엔?”

“널 괴롭히려 드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이렇게 치졸한 방식이라니.”

미간을 좁힌 채 이엘리는 입술 끝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비웃음을 지은 채 실컷 빈정거린다.

“애도 이것보단 덜 유치하겠어. 저 런 작자들이 황족이라니 제국의 미래가 참 어둡네.”

눈을 깜빡이던 자카리가 솜털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뚱한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 보았다. 어쨌든 자카리의 기분은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이번엔 그녀 자신이 문제였다.

‘어떻게 감히 우리 자카리한테 그럴 수 있어? 아, 열 올라!’

이엘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고작 황족 따위가!

“이엔, 진정해. 난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아, 진짜 치사하게.”

자카리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이엘리는 홀로 씩씩거렸다. 자카리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이엔, 난 고작 황제 때문에 네 기분이 상하는 게 더 싫으니까.”

”……”

이엘리는 뚱한 얼굴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보살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평온한 얼굴을 할 리가 있나. 푹 한숨을 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자카리. 먼저 안에 들어가 있을래? 나 화장실 좀 들렀다 가려고.”

그래도 찬물에 손이라도 씻으면 조 금 진정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입을 열자, 자카리가 말했다.

“그럼 그 앞까지 함께 가자. 기다 릴 테니까.”

“으음…… 아니야,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

그녀가 빙긋 웃었다. 먼저 들어가라는 뜻에서 자카리의 등을 톡톡 쳐 주고 돌아서는데, 그때.

“이엔.”

“응?”

뭐야, 왜 저렇게 급하게 부르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환히 웃었다.

“고마워.”

“어, 왜?”

“나 대신 화를 내 줘서.”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희게 물들었다. 세상에, 심장아. 두근거릴 상황 아냐, 진정해!

“……뭐야, 별것도 아닌데 뭐.”

“아냐, 무척 기뻐.”

자카리는 기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엘리는 애써 태연한 척 뒤돌 아섰다. 뺨이 달아오른다.

‘도대체 뭐지? 요새 왜 자꾸 자카리의 말 한 마디, 표정 하나에 설레는 거야?’

자카리,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야. 분명 별다른 뜻이 없다는 건 알지만, 네 외모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마음이 자꾸 들뜨고, 나도 몰래 너만 보게 돼.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예전에는 우리 사이는 남매 같은 관계라고 생각 했었어.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마음이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그녀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찬물을 틀어 둔 이엘리는 손등이 발갛게 될 때까지 손을 담갔다. 손 수건을 꺼내 대충 물기를 닦아 내며,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도 멀쩡했다.

‘오페라 시간이 좀 남은 게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래도 슬슬 자리에 들어가야 할 때다.

“레이디, 손수건을 떨어뜨리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나, 손수건을 가방에 집어넣지 않았었나? 얼떨결에 손수건을 받아 들며 감사 인사를 하던 이엘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저 남자는?

“보내 드린 초대장은 잘 받으셨습니까?”

“……황제 폐하?”

아니,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이엘리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그녀의 앞에서 있는 남자는 바로 황제였던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십시오,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요? 이엘리는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반박을 간신히 되삼켰다.

상대는 새로 등극한 황제였다. 그런 황제를 ‘우연히’, 게다가 ‘개인적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정말로 이 만남, 우연인 걸까?’

이엘리는 순간 의문을 품었다. 물론 황제가 이번 오페라를 직접 관람 한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지존이 개인적으로 이런 곳을 돌아다니다가 나와 마주치게 된다고?

“그러고 보니, 오페라에 대해 꽤나 불만을 갖고 계신 것 같던데.”

그때 황제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설마 나와 자카리의 대화를 들었나? 하지만 이번 오페라의 내용은 엄연히 공작 가의 일원이라면 불쾌해 할 만한 내용이지 않나.

“죄송합니다, 페하.”

그럼에도 이엘리는 정중하게 사죄했다. 그렇지 않아도 황가와 공작가의 사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말 때문에 가문의 관계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까 전의 제 발언은 다소 무례했 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힐끔 황제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황제는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황가가 먼저 공작가에게 장갑을 던진 모양새이니, 아마 사과를 받아 들일 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황제는 씩 웃었다. 이엘리는 조금 안도했다. 황제는 관대한 척 말을 이었다.

“겨우 그 정도 말로 제가 레이디를 곤란하게 만들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다만 그 발언은, 레이디가 말씀하신 것이기에 용인한 겁니다.”

이건 무슨 의미지? 이엘리는 바짝 어깨를 긴장시켰다. 황제는 느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저는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황제의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안에는 이름 모를 감정이 진득하게 엉겨 있었다.

“전 레이디가 헤센바이츠가 아닌, 블랑쳇의 성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

이엘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황제가 툭 말을 뱉었다.

“물론 농담입니다.”

“이미 결혼한 레이디에게 건네는 농담으로는 다소 부적절한 것 같군요.”

이엘리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방금 황제가 했던 말, 정말로 농담일까. 차라리 농담이라면 좋을 텐데, 황제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쉽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황제는 비스듬히 웃었다.

“이것으로 레이디가 했던 개인적인 생각에 대한 앙금을 털어 버리도록 하죠.”

저 치졸한 작자 같으니라고. 그녀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써야했다. 황제가 다시 말했다.

“그보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엘리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대 답했다. 황제는 느긋한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아가씨. 황제를 향한 적대 감을 간신히 숨기고 있다.

‘그 모습까지 어여쁘다니…… 놀랄 일이지.’

그의 눈동자가 치솟는 소유욕으로 짙게 물들었다. 한 송이 아샤꽃처럼 화사한 여자.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음에도, 이엘리만큼 제 감정에 불을 붙이는 여자는 없었다. 그는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꽃을 꺾기 위해선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황제는 뒤로 물러났다.

“참, 레이디 헤센바이츠께 드린 손 수건은 레이디의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제 겁니다. 레이디가 저를 좀 피 하시는 것 같아, 그걸 핑계로 삼아 말을 건 거죠.”

이엘리는 기가 막힌 낯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을 맺었다.

“그 손수건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이따 오페라가 끝나면 다시 뵙죠.”

아뇨, 전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요. 이엘리는 간신히 그 대답을 말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황제는 미소 한 조각만을 남긴 채 그대로 사라졌다. 이엘리는 손에 들

린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아샤꽃과 검……”

고급스러운 손수건 구석에는 금실 로 정교한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황가를 상징하는 문장.

“……싫다, 정말.”

차마 손수건을 버리지는 못한 그녀는, 질색하는 얼굴로 그것을 대충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오페라하우스의 로얄석, 즉 개인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치게 된다. 3층 중앙에 로

얄석이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족들과 제국 유일의 차기 공작 부부는 로얄석을 사용하는 게 당연했다.

그 말은 곧, 황제와 그녀가 마주칠 확률도 낮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따 오페라가 끝나면 다시 뵙죠. ’

그 말을 떠올리던 이엘리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절대로 황제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엔?”

“……아, 자카리.”

“왜 그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네?”

이엘리는 비틀비틀 개인실 안으로 들어섰다. 자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래, 보긴 보았지. 유령은 아니고 황제.’

이엘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니, 하필이면 황제를 그런 식으로 마주 칠 건 뭐람? 게다가 사람을 떠보는 것도 아니고, 그딴 질문은 왜 하냐 고. 자리에  앉은 그녀가 막막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오는 길에 황제 폐하를 뵈었거든.”

“……황제 폐하를?”

되묻는 자카리의 얼굴은 이미 딱딱 하게 굳어 버린 채였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캐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네게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신 거야?”

자카리의 마치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양 사나웠다. 이엘리는 다급 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황제가 내가 욕하는 걸 들었으니, 내가 실수한 건가?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실수한 것에 가까운 것 같아.”

“네가?”

자카리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정말, 머리 아파. 이엘리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흘렸다.

“응. 아무래도 폐하께서 내가 했던 말을 들으신 것 같거든.”

설명하던 이엘리는 좀 억울해졌다. 솔직히 이건 황가가 먼저 잘못한 거였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를 노골적으로 폄하했을 뿐더러, 그 폄하한 내용을 오페라로 만들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비록 먼저 무례하게 군 건 황가였지만, 그래도 트집을 잡으려면 잡을 수는 있잖아.”

“이엔.”

“물론 폐하께서 묻어 주신다고는 하셨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떡해.”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의자의 등받이 위에 몸을 늘어뜨렸다.

“괜찮아.”

패닉에 빠진 그때, 자카리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자카리?”

“네가 어떤 일을 저질렀건 간에, 난 무조건 네 편이니까.”

매번 스스로가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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