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96)

56 화

마상 시합까지는 약 일주일이 남았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수를 놓을 수 있을지 이엘리는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스스로의 자수 실력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 지고 있었다.

‘……어쩌면 좋아.’

이엘리는 푹 고개를 숙였다. 자카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그녀의 자존심 문제였다.

‘도무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자수의 도안조차 감이 안 잡히는 데?’

마상 시합에서 건네는 귀부인의 손 수건은 승전을 기원하는 의미였다. 귀부인은 직접 손수건을 만들어 자신의 기사에게 건네며, 그 손수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묘한 자존심 싸움이 된다.

‘자존심 싸움에서는 한 번도 진 적 없는 나인데……”

또한 손수건을 받은 기사는 마상 시합이 진행되는 내내 그 손수건을 손목에 감아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이디의 기원을 짊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엘리는 잔뜩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는 건…… 내가 만든 손수 건을 자카리가 계속 감고 다닌다는 뜻이잖아.’

자카리의 성격상 그녀가 만든 손수 건을 감추기는커녕 자랑스럽게 내보이겠지.

그렇다는 건 그녀의 처참한 실력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건데……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흘렸다.

“아으, 내가 못 살아……”

“이엔?”

그때 자카리가 그녀를 불렀다. 깜 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 분명 혼자 있었는데?

“뭐야, 언제 왔어?”

“아까 전에 왔는데?”

그럼 내가 저를 알아챌 때까지 기다렸다는 소린가.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자카리에게 말했다.

“그럼 부르지 그랬어.”

“그게, 네가 하도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기에.”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이엘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냥.”

그 순진한 얼굴을 바라보자, 차마 네게 줄 손수건을 제대로 만들지 못 할까 봐 고민 중 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엘리는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이건 다 너 때문이잖아.

“혹시 손수건 때문에 그래?”

그때,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자수실이며 천 조각을 내려다보던 그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

“맞구나?”

”……”

이엘리는 장렬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자카리가 피식 웃었다. 다정하게 이엘리를 달래 준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너에게 줄 손수건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엘리가 톡 쏘아붙이고는 자카리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못을 박듯 말했다.

“그보다 오페라 날짜가 내일이야. 알고 있어?”

“응, 알고는 있는데.”

자카리는 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굳이 그 오페라에 참석해야 하나. 그런 뜻이 만만하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라도, 불참하고 싶어 하는 표정인데.”

“그 정도까진 아니야.”

“솔직히 아직도 고민은하고 있지?”

”……”

정곡을 찔렸다. 좀 많이 아프다. 자카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카리. 이미 네가 마상 시합에 출전하는 것 때문에 황제의 비위를 건드렸잖아.”

“하지만……”

발끈한 자카리가 무어라 반박하려 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 손수건을 황제에게 뺏기도록 그대로 보고 있어야 했다는 말이야?! 그런 의미를 가진 눈빛이다. 이엘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황제 폐하에게 손수건을 주지 않게 돼서 그건 기뻐.”

”……”

“하지만 이왕 제도까지 왔는데, 굳이 황가와 대립하여 불편할 필요는 없잖아.”

자카리를 살살 달래자, 그의 표정이 슬며시 풀어지는 게 보였다. 이엘리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참자, 알았 지?”

“……노력은 해 볼게.”

“그래, 우리 자카리. 착하지.”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자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엘리의 손길을 느끼던 자카리가 사르르 눈을 감는다. 아무리 봐도 말 잘 듣는 대형견 같단 말이야. 그녀는 흐뭇한 기분이 됐다.

 포르투나 오페라하우스는 제도에서 첫손에 꼽히는 명소다. 이곳은 유명 오페라 가수들을 보유했으며, 화려 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곳을 황제의 초대를 받아 방문해야 한다니, 정말 너무해.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즐거웠을 텐데.

“미안, 이엔. 널 이런 불편한 자리에 참석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네 아내라고.”

자카리의 죄스러운 목소리에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카리가 그녀를 빤히 응시한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당연하지. 네 잘못도 아닌데 네가 왜 사과해?”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불퉁한 얼굴을 했다. 턱을 된 채, 그녀가 자카리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아얏.”

“이건 네 잘못도 아닌데 내게 사과 한 벌이야.”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떼어 낸 그녀가 자카리를 바라보았고, 이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히려 사과는, 이런 불편한 자리를 만드신 황제 폐하께서 하셔야 하는 거 아냐?”

“이엔.”

“물론 폐하께서 사과할 눈치가 있으셨다면, 애초 이런 자리부터 만들 지 않으셨겠지만.”

이엘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가 직접 보내온 초대장을 들여다보는 연녹색 시선이 차갑다.

‘도대체 폐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가 없어.’

초대장을 팔랑대던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속 내가 수상하기만 하다.

'솔직히 빈말로라도 공작가와 황가의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 도대체 왜?’

게다가 대관식에서 마주쳤던 황제의 눈빛도 기분이 나빴다. 마치 자 신을 맛 좋은 먹잇감처럼 바라보던 그 시선.

불쾌감을 꾹꾹 누르며 그녀는 앞으로 참석해야 할 행사를 생각해 보았다.

‘게다가 초대장의 구성까지 쓸데없이 알차잖아. 오페라 관람에 마상 시합, 무도회까지……”

홈쇼핑이니? 39900원짜리 특가 3 종 세트야? 누가 보면 두 가문이 세상에서 제일 절친한 관계인 줄 알겠네! 어떻게든 그들을 오래 남겨 두려는 속내가 보여, 이엘리는 조금 울컥해 버렸다.

“……이엔?”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해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자카리가 이엘리를 불렀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카리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저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슬슬 도착한 것 같은데……”

그때 그녀가 창밖을 흘끗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한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오페라하우스의 위용은 상당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자카리가 손을 내민다.

“이엔, 내 손 잡아.”

“아, 고마워.”

자카리는 당연하게 이엘리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마차에서 내리던 이엘리는 새삼스레 자카리의 미모를 인지했다. 주변에서 있던 레이디들 이 힐끔거리며 자카리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뭐, 내가 결혼은 좀 잘하긴 했지.’

이엘리는 뿌듯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 자카리도 멋있지만, 오늘 자카리는 최고였다. 잘 빗어 넘긴

은발, 몸에 잘 맞도록 재단한 고급 정장. 탄탄한 몸은 은빛 표범처럼 우아해 보인다.

‘이렇게 눈이 가다니, 역시 꾸며 놓은 보람이 있어.’

흐뭇한 얼굴의 그녀가 오페라하우스의 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무심코 물었다.

“이엔, 혹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 었어?”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 왜?”

이엘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조금 머쓱해진 자카리가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그게, 계속 네가 쳐다보기에……”

“응? 그거야 당연히 네가 엄청 잘 생겼으니까 그렇지.”

”……”

태연한 대답에 자카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것보다 자카리 덕택에 이런 곳도 와 보게 되네.”

“아, 여기가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오페라하우스잖아, 한 번쯤 와 보고 싶었어.”

실은, 하급 귀족이었던 그녀는 이런 비싼 곳에 와 볼 기회가 없었다. 자카리는 빙그레 웃었다.

“이번 폐하의 초대의 유일한 장점이네.”

“그런 셈이긴 한데…… 너와 단둘 이 왔다면 더 좋았을 뻔했어.”

자카리와 시선을 맞춘 이엘리는 뚱하니 답했다. 자카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한참 고생 해야했다. 아마 그녀는 그가 오페라하우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모를 것이었다.

“그보다 자카리, 불편하진 않아? 오늘 황족들을 마주칠지도 모르는 데.”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자카리는 붉어진 뺨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아내가 남편 걱정하는게 뭐가 이상해?”

고개를 끄덕거리자, 자카리는 활짝 웃었다.

비록 그녀가 말하는 ‘부부’라는 말은 ‘연인’보다는 ‘가족’에 더 치중되어 있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고마워, 이엔.”

“황제 폐하에게 기죽으면 안 돼, 알았지?”

쿡쿡 웃음을 터뜨린 자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제 편이 되어 주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이엔.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일은 너를 만났다는 거야.”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자카리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묘한 감회가 뒤섞인 어조였다.

“그러니까 절대로…… 너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어.”

“응? 미안, 잘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그냥, 별거 아니야.”

목소리가 너무 작아 뒷말은 듣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손을 쥐면서 그가 말했다.

“얼른 들어가자.”

“아, 그래.”

도대체 무슨 말이었지?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대며 그의 뒤를 따라 오페라하우스로 들어갔다.

긴 계단을 올라 화려하게 꾸며진 오페라하우스 안에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별세계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화려 한 샹들리에.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도, 굽이굽이 펼쳐진 계단도 모두 아름 답다.

“와…… 세상에, 여기 정말 예쁘다.”

제국 최고의 오페라하우스라는 명 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그녀는 저도 몰래 작은 탄성을 올렸다.

“자카리, 아까 그 샹들리에 봤어? 엄청 반짝거려.”

“응, 봤어. 예쁘더라.”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이엘리는 문득 벽에 걸린 오페라의 대형 포스터를 발견했다.

포스터엔 잔혹해 보이는 은통과 용 감한 기사, 가녀린 요정이 그려져 있었다.

“……잠깐만. 이게 도대체 뭐야?”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포스터 앞에 선 그녀가 오페라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저주받은 은룡과 정의의 기사’라니?”

은통 헤센바이츠는 공작가의 시조다. 그렇다면 ‘정의의 기사’는 분명, 황가의 시조인 리펜베르크 경을 일 컫는 거지.

건국신화를 주제로 한 이번 오페라의 목적은 명확해 보였다.

황실을 높이고 공작가를 낮추는 것. 설마 이런 식으로 자카리를 모욕하기 위해서 초대장을 보낸 거야?

“뭐, 황가에서 직접 의뢰를 넣어 매년 공연하는 오페라니까.”

자카리의 담담한 대답을 듣자, 이엘리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명백히 공작가를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자카리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넘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아니, 자카리는 보살이야? 화도 안 나? 황족이라는 작자들이 이렇게나 치졸하다니!’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연녹색 눈동자가 포스터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제국 최고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최고의 가수들을 불러다 만든 게 고작 이딴 거였어?”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 오페라가 황실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게 목적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이라니. 이건 유치함을 넘어서서 무례한 행동이잖아!

“너무 화내지 마. 난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어떻게 이런 모욕을 받고도 괜찮을 수가....!”

화를 내려던 그녀는 자카리를 바라 보며 문득 멈칫했다. 그녀가 가라앉은 어조로 그를 불렀다.

“자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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