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96)

55 화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묘하게 끈적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이엘리는 어깨를 굳혔다.

“마치 아샤꽃의 현신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 순간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명백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 되어 자카리가 입을 연다.

“어쨌거나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벌써 말입니까?”

“예.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저희 말고도 많아 보여서요.”

두 눈을 가늘게 뜬 자카리가 이엘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남편 곁으로 움직였다. 그 태도에 황제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지만, 딱히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럼 페하,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마지못해 한 마디 인사를 더 건넨 이엘리는 자카리와 함께 총총 물러 났다.

멀어지는 이엘리의 뒷모습을 아쉽 게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자카리와 이엘리는 한시바삐 렘푀르데 사원에서 벗어나려 움직였다.

“헤센바이츠 소공작님. 여기서 소공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가 자카리를 불렀다. 멈칫 몸을 굳혔던 자카리가 고개를 돌렸다.

“……론도 후작?”

“예. 소공작께서 어렸을 때 뵈었는 데, 기억하시는군요!”

중년 남자 한 명이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의 환한 얼굴과는 다르게, 아쉽게도 자카리는 번거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슬쩍 곁눈질로 이엘리를 바라보며 미심쩍게 입을 열었다.

“곁에 계신 분은……”

“이미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제 아내입니다.”

“아아, 예. 물론 소공께서 결혼을 하신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이엘리를 바라보던 론도 후작의 표 정이 부드러워졌다. 후작은 살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나 미인이실 줄은 몰랐군요.”

“이엘리 헤센바이츠입니다.”

“제이슨 론도입니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아무래도 론도 후작은 자카리와 약간의 친분을 다지고 싶은 것 같다. 그 기색을 기민하게 잡아낸 이엘리는 남편의 등을 톡톡 쳤다.

자카리가 슬쩍 그녀를 돌아본다. 그녀가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제도에 올라왔는데, 후작님과 대화는 좀 나누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힐끔 후작을 바라보던 자카리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다녀와.”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자카리는 북부 공작령에 머무르고 있으니 제도 내 다른 귀족들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다른 귀족들이 먼저 접근해 올 때 대화라도 몇 마디 하는 게 좋을 터였다.

‘어째 일찍 돌아가기로 한 계획이 계속해서 어그러지는 것 같지만……’

뭐 어쩌랴. 이엘리는 관대하게 자카리를 보내 주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금방 돌아을게.”

“그래, 알았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카리는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남성 귀족들 사이에 파묻혔다. 언제 우리 자카리가 저렇게 컸지? 그녀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때.

“혼자 계십니까, 레이디 헤센바이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가 다 시 다가왔다. 이엘리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써야했다.

“소공작께서 오실 때까지 제가 말 벗이라도 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자카리는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요.”

“이런, 그렇게 대번 거절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능글거리며 대답한 황제가 이엘리의 곁을 차지했다. 결국 이렇게 되 나. 그녀는 짜증을 삼켰다.

“그러고 보면, 마상 시합에서는 저도 황제를 대리하는 기사를 내보낼 생각입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이엘리는 영혼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대관식의 마상 시합에 황제가 대리 기사를 내보내는 것은 이미 황가의 전통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왜 굳이 내게 와서 저런 소리를 하나.

“마상 시합의 우승자는 레이디에게 아샤꽃가지를 바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황제가 느른한 시선으로 이엘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이 연회장의 모든 레이디들이, 폐하께 꽃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겠네요.”

”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황제는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녀에게서 황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엘리는 그런 황제의 표정을 모르는 척, 입꼬리를 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네, 그 운 좋은 레이디가 누구인 지는 모르겠지만…… 페하께 꽃가지를 받게 된다면 분명 기뻐할 거예요.”

”이런, 레이디께서는 제 뜻을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황제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뜯어본다.

“저는 제 기사에게 아샤꽃가지를 얻기 위하여 분발하라는 명을 내릴 테지만.”

왠지 불쾌한 말을 들을 것 같은 예감에 그녀는 어깨를 굳혔다. 황제는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그 명령의 이유는 안네로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로 레이디 헤센바이츠지요.”

아니, 여기서 내가 왜 나오는데? 이엘리는 어리둥절해 졌다. 황제는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상 시합에서는 승전을 기원하며 레이디가 기사에게 손수건을 건네곤 하지요.”

“아, 맞아요. 그런 전통이 있긴 하죠.”

귀부인들과 기사들 사이에 오랫동안 전해져 온 전통이었다. 그녀는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전 레이디 헤센바이츠의 손수건을 받고 싶습니다. 대신……”

뭐? 누구의 손수건을 받아? 이엘리는 순간 튀어나오려는 반박의 말을 간신히 꿀꺽 되삼켰다.

“……제 기사가 아샤꽃가지를 바칠 권리를 얻게 되면, 레이디께 그 꽃가지를 바치겠습니다.”

이엘리는 순간 기가 막혔다. 자신 이 직접 마상 대회에 나서는 것도 아니면서 손수건을 달라는 뻔뻔함은

도대체 뭔가. 황제는 빙글빙글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거절하는 것도 좀 곤란한데.’

황제가 그녀에게 직접 손수건을 요청했다.

마상 시합에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 헤센바이츠였기에, 그녀는 마땅히 손수건을 줄 상대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건 궁중의 사소한 여흥에 가까웠다.

‘이런 조그만 여흥에 정색하며 거 절한다면…… 분명 이쪽이 예민한 거라며 몰아가겠지.’

그렇다고 해서 황제에게 손수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마상 시합에 기사를 내보낼 수도 없지 않나.

‘굳이 황제와 이런 소모적인 부분에서 경쟁할 필요는 없으니까……’

황제는 여전히 여유로운 낯이었다. 그냥 적당히 대화를 넘기자. 이엘리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안네로제 황녀 전하가 계시잖아요. 폐하의 꽃을 받지 못 하시면 서운하실 텐데요.”

이엘리는 대충 안네로제의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전환 하려했다. 이미 남편이 있는 자신보다는, 아직 미혼의 황제가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꽃을 주는 편이 더 보기 좋을 테니까.

“오라비가 얻어 낸 꽃 따위가 여동생에게 반가울 리가 있겠습니까.”

“음, 그래도……”

“아마 안네로제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황녀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발언이었다. 황녀를 완벽히 무시하는 그 태도를 보며, 이엘리는 문득 황녀가 안쓰럽다고 느꼈다.

보이는 곳에서도 이 모양인데, 뒤에서는 어떨 것인가.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와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은 손길이 느껴졌다.

“그건 아마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카리였다. 황제는 불쾌감이 서린 얼굴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헤센바이츠 소공작?”

“그거야 이엔의 손수건은 이미 제 것이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한 번도 제가 마상 대회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한 적 없는 자카리였다.

“어차피 공은 마상 시합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군요.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도대체 대화 흐름에 적응할 수가 없어, 이엘리는 힐끔 자카리를 곁눈 질로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홀로 뻔 뻔한 낯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마상 시합에는 저도 참가할 생각입니다.”

뭐라고!? 이엘리는 기겁했다. 굳이 마상 대회에 참가해서 황제와 대립 해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당황한 그녀와 다르게 자카리는 태연하기만했다. 황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갑자기 말씀해 주시니 무척 당황스럽네요, 소공작.”

“이런, 폐하를 당황케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유들유들하게 대답한 자카리가, 부드립게 제 눈매를 휘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이만 이엔은 제가 데려가 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둔 것 같거든요.”

황제가 황망한 얼굴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지금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흐름이었다.

솔직히 기분대로 마상 시합에 참가 한다고 저지르는 건, 전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그런데도.

‘솔직히 기분이 좋은 걸 어떡해?’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지그시 삼켰다.

“뭐,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으란 듯이 ‘부부’를 강조하며 자카리는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은 얼이 빠진 황제를 내버려 둔 채, 곧 장 사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로 돌 아가는 길.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고, 물어볼 건 물어볼 거다. 마차 안에 앉자마자 이엘리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자카리, 정말로 마상 시합에 참가하려고?”

“응.”

“어째서?”

답답한 기분이 된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굳이 마상 시합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글쎄…… 네가 낭만적이라고 했으니까?”

“……으응?”

그러나 자카리는 아리송한 대답을 할 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꼭 참가해야 해? 그건 그냥 한 소리야,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엔.”

“왜?”

자카리가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는가 싶더니 싱긋 미소 짓는다.

“넌 그런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이엘리는 불퉁한 낯으로 되물었다. 자카리는 애정이 담긴 눈동자로 이엘리를 빤히 바라본다.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 다는 소리야."

“아니, 그게 무슨 사소한 문제야? 엄청 중요하지!”

이엘리는 뚱한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 보았다. 자카리는 그녀의 뺨을 톡 튕기며 말을 이었다.

“매번 넌 내게 걱정이 많다고 하지만, 너도 이럴 때는 마찬가지잖아.”

“내가?”

“그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난 북부에서 제일가는 기사라고.”

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워, 이엘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긴 그건 그렇다.

자카리 이상으로 강력한 기사는 북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제국에서 가장 강하지 않을까. 제국 내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은 북부의 기사였고, 자카리는 그들의 신뢰받는 주군이니 말이다.

“마상 시합 같은 행사로 내가 다칠 일은 절대 없으니까.”

”……”

“대신 내게 줄 손수건이나 미리 준비해 줘. 알았지?”

아 참, 손수건! 이엘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쩌지? 나 손수건을 만들 손 재주는 없단 말이야.”

“네가 만드는 건 뭐든지 괜찮으니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어.”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국 최고의 기사를 앞에 두고도 자카리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엘리의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솔직히 겨울의 마법을 제외하더라 도, 개인적인 무력으로 자카리를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제국 전체를 뒤 져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 내가 만든 손수건… 정말로 이상할 텐데……”

“안 이상하다니까?”

넌 괜찮겠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고! 분명 이상할 거야!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이엘리는 원망을 담아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쏙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자수 실이며 천 조각을 늘어놓은 이엘리는 막막 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 마상 시합이 개최되기 전까지 손수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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