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대관식과 이어지는 마상 시합은 제국의 전통 중 하나였다.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기사인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먼 과거에는 황제가 직접 출전했었다. 지금은 안전상 대리 기사를 내보낸다.
‘아마도 공작가에서는 출전하지 않겠지.’
황가와의 대립 구도를 피하기 위해 서라도, 공작가는 일부러 기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엘리는 조금 아쉬워졌다.
‘그래도, 공작가는 훌륭한 기사를 키워 내기로 유명한 가문인데.’
마상 시합은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공작가와 황가가 지금보다도 사이가 더 좋지 않았을 무렵에는, 공작가는 일부러 몇 번이나 황가의 마상 시합에 기사를 내보냈었다.
그때마다 공작가는 보란 듯이 황가를 꺾어 ‘아샤꽃가지의 주인’이 되었고, 공작가와 황가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당사자도 아니고 대리 기사를 내보내는 것 자체가 좀 초라해 보이 긴 하지만.’
그래도 기사 황제를 선조로 둔 가문의 핏줄 아닌가. 마상 시합의 승리자 타이틀은 갖고 싶지만, 귀한 몸이시니 다치긴 싫은 거겠지. 황제가 미우니 별 게 다 고깝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누구라도 좋으니 황제 폐하의 대리 기사, 확고꾸라뜨려 버렸으면 좋겠네.”
“그래? 그 외로 원하는 건 없어?”
순간 자카리의 시선이 반짝 빛났다. 그 외로 더 원하는 거? 고민하던 그녀가 무심코 답했다.
“그럼…… 이번 마상 시합에서 우 승한 기사의 꽃을 받아 보는 거?”
어차피 받을 일이 없기에 꿈이나 꿔 보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이엘리에게 되물었다.
“아, 이엔도 그런 거 받고 싶었 어?”
“그야 당연하지. 그건 나 말고도 대부분의 레이디들이 가진 환상 아닐까?”
마음을 바친 레이디한테 꽃을 바치고 첫 춤의 권리를 갖는다니. 낭만 적이잖아?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꽃은 자카리에게 받고 싶지만, 그런 말 하면 너무 속 보일 테니까.
“그래, 알았어. 너도 이만 들어가 쉬어, 여행길이 길었으니까.”
그때 속 모를 미소를 지은 자카리가 대답했다. 아, 벌써? 뭔가 아쉬 운데. 하지만 실제로 굉장히 피곤한 건 사실이기에, 자카리를 더 붙들 수도 없었다. 그녀는 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자고, 내일 보…… 앗!”
“이엔!"
다소 급하게 뒤돌아서던 그녀가 발을 헛디뎠다. 놀란 자카리가 허리를 휘감아 부축해 준다. 어떡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 그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심장이 쿵쿵 된다.
“괜찮아?”
“……어? 아, 으, 응.”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자카리는 평소 와 똑같은데, 그녀만 자꾸만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부축해 준 자카리가 걱정스레 말했다.
“다친 곳은 없어?”
“응, 없어. 그, 자카리. 나 이만 들어가 볼게.”
“그래, 이엔. 푹 쉬도록 해.”
자카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이엘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요새 나 정말 이상한 것 같아. 혹여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초조했다.
가녀린 뒷모습이 한들한들 멀어진 다. 자카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제가 열렬히 사랑하는 소녀의 모습을 눈 안에 가득 담았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흰 낯이 붉게 물든다.
“이엔…… 너는 정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돈했던 표정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다.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려 견딜 수 가 없다. 집착에 가까운 애정에 시 달려,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넌 아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 지.”
나의 이엘리. 네가 내 앞에서 미소 지을 때마다 난 미쳐 버릴 것만 같아. 네가 내 앞에서 황제를 거절하는 모습을 볼 때, 난 기뻐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어.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방금 전, 발을 헛디딘 네 허리를 끌어안던 때……”
……난 하마터면 그대로 네게 키스 할 뻔했지. 네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어. 그는 쓰게 미소했다.
“모르니까, 나를 향해 그렇게 웃어 줄 수 있는 거지……”
어떻게든 너를 갖고 싶어. 난 언제쯤 네게 있어, 가족’이 아닌 ‘사랑 하는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위험하 게 빛나는 푸른 시선이 깊숙이 가라 앉는다. 제 감정을 억누르려 그는 눈을 감았다.
이튿날. 두 사람은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해 야했다. 그나마 선황의 장례식은
이미 끝난 게 다행이었다. 대관식은 황실의 사원인 렘푀르데 사원에서 진행되었다.
“화려하네.”
“그러네.”
대관식에 참석한 두 사람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황가의 대관식과 장례식, 기타 대소사를 주관한 렘푀르데 사원.
웅장한 사원 내부는 금빛 휘장을 늘어뜨리고, 황가의 문장이 곳곳에 걸린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 화려함 이 보는 이를 짓누를 것만 같다.
“세상에, 헤센바이츠 소공작께서 부인과 함께 오셨네요.”
“공작 각하께서 본인이 참석하시는 대신, 소공작을 대리로 보내셨다지요?”
“이렇게 공작가의 후계 계승은 소공작님으로 확실시되는 거겠죠?”
자카리와 이엘리가 사원에 입장 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더니, 소곤소곤 대화가 오갔다.
“자카리, 인기 많네?”
“이런 인기는 사양이야.”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이엘리가 소곤거리자, 자카리는 불퉁한 얼굴이 된 채 그렇게 대답했다.
“공작 각하와 소공작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지 않나 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요. 아, 그런데……”
자카리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엘리에게로 옮겨 갔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이엘리는 움찔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가 들어오 면서 공작성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도 있긴 해요.”
“아, 이번에 소공작의 성인식을 맡아서 준비했다죠?”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도 방문하신 그 성인식 말인가요?”
아니, 그 성인식 얘기가 어느새 제도까지 돌았단 말이야? 이엘리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북부 귀족들은 그래도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하더라고요.”
“아, 저도 북부로 시집을 간 사촌 언니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느새 화제는 이엘리로 옮겨간 지 오래였다. 그녀가 어깨를 굳히자, 자카리는 고소한 낯을 했다.
“이엔, 너도 인기 많은데?”
“음…… 나도 이런 인기는 사양하도록 할게.”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질 색했다. 바로 그때 황가의 시종이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두 분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지요.”
황가의 시종이 정중하게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대사제가 차기 황제에게 보관을 씌워 주는 곳, 바로 그 옆이었다. 황제의 최측근, 그리고 제국 최고의 귀족들 만이 설 수 있다는 자리.
‘정말로 황위를 계승하는 건가.’
이엘리는 묘한 감상을 느꼈다.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는데,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자카리도 비슷한 기분인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좀 기분이 이상하다.”
“그렇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때마침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장엄한 음악이 흘렀다.
제국의 국가다. 사람들이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황태자가 들어섰다.
“요슈아 리펜베르크, 제국의 새로운 태양이 될 이여.”
대사제가 황태자를 힘 있게 불렀다. 곁엔 보관을 붉은 비단 쿠션에 받쳐 든 시종이 함께였다.
“만민의 가장 자애로운 아비이자, 단단한 방패가 되도록 축복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붉은 주단을 가로질러 대사제의 앞에 선 황태자는, 무릎을 꿇고 대사제의 말을 들었다.
만인의 아래에서 몸을 낮춰 백성을 섬기겠다는 의미였다. 대사제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아가, 백성과 제국의 부름을 받드십시오.”
대사제가 황제의 보관을 들어 올렸다. 주름진 손으로 황태자의 머리에 보관을 씌운다.
황태자의 머리에 씌워진 보관에 빛이 영글어 차게 빛났다. 대사제는 허리를 굽히며 축사를 맺었다.
“이로써 새로운 제국의 태양이 우리 앞에 떠올랐습니다. 홍복을 누리 소서, 폐하.”
사람들이 파도처럼 고개를 숙여 보였이다. 대사제의 선창에 뒤이어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린다.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이엘리와 자카리도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원의 중앙, 길게 깔려 있는 주단을 가로지르며 황제가 즐겁게 웃었다.
새로운 황제의 탄생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차후 공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이엘리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긍정적인 영향은 아닐 것 같았다.
대관식이 끝났다. 새로운 황제에게는 축복의 말이 쏟아졌다. 다들 눈 도장을 찍으려 아우성이었다.
황제는 자못 자애로운 얼굴로 축사를 받았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로렌 백작 일가가 보이지 않네.”
“그러게. 북부의 유일한 황가 측 귀족인데 말이지.”
주변을 둘러보던 자카리는 조소 어린 얼굴이 된 채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 백작 일가는 대관식 내내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의도적으로 서 로 마주치지 않게 자리를 피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인사나 일찍하고 돌아 갈까?”
“그래. 어차피 여기에 오래 있어 봤자, 말만 많아지지.”
자카리는 질색하는 낯을 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간 두 사람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폐하.”
“훌륭한 군주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황제는 밝은 얼굴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상대방에게 작게 눈짓했다. 기회를 보아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둘을 놓아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내 대관식을 기념하여 몇 가지 행사를 치를 생각 입니다.”
행사?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전 통적으로 대관식에는 마상 시합이 따라온다.
하지만 굳이 ‘몇 가지 행사’라고 언급하는 걸 보니, 그 외에도 다른 귀찮은 일들을 덕지덕지 덧붙일 것 같았다.
“그러니 부디, 헤센바이츠의 두 분께서도 제도에서 행사를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군요.”
“아니, 저희는……”
“두 분을 오래 뵙고 싶어서요. 두 분께선 선황 폐하의 장례식도 참석 하시지 못하셨으니까요.”
황제는 유들유들하게 입을 열었다. 선황의 장례식까지 끌고 오면 거절 하기 어려워진다.
소식이 늦었다 한들, 참석을 못 한 건 사실이니. 이마를 구긴 자카리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환하게 웃은 황태자, 아니 황제의 눈동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이엘리가 서 있었다. 유리 구슬처럼 투명한 회색 눈동자가 이엘리를 깊숙이 담은 채 부드립게 휘어졌다.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내 약속하지요.”
“아, 감사합니다.”
이엘리는 떨떠름한 음성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경계하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침 이번에 포르투나 오페라하우스에서 황실에 관련한 공연을 올리기로 했거든요.”
“포르투나 오페라하우스면……”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오페라하 우스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황제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건국 전설을 주제로 한 오페라이니, 헤센바이츠 공작가와도 일부 관련이 있지요.”
“……“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황제가 좋은 의도로 초대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건국 전설이라 하면, 은룡과 회색 기사의 이야기인가요?”
“거기에 아샤 요정도 있죠.”
아, 네. 떨떠름한 얼굴이 된 그녀를 향해 황제는 빙그레 눈웃음을 치며 나긋하게 입을 연다.
“그러고 보면 아샤 요정과 레이디 헤센바이츠는 꽤 닮은것 같습니다.”
“……저와 아샤 요정이요?”
“그럼요. 분홍색 머리카락과 연녹색 눈동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