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96)

53 화

7. 아샤꽃가지의 주인 (1)

반갑지 못한 손님이 찾아든 건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이었다.

황가의 문장이 박힌 검은 조기를 치켜든 전령이 쏜살같이 공작성에 달려들어 온 것이다. 전령은 충격적

인 소식을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황제가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공작과 자카리, 그리고 이엘리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무리 황태자가 황제 대신 국정을 대리하고 있었다 한들, 허울뿐인 황제라도 버티고 있는 것과 황태자가 즉위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올 것이다.

‘게다가 황태자는 황제보다도 훨씬 더 공작가에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엘리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자카리와 공작은 심경이 어떨 것인가.

제도와 공작령 사이의 거리가 있으니 장례식은 이미 끝났다. 전령은 대관식이 치러진다는 소식을 남기고 다시 떠났다.

“어떻게 할 거야, 자카리?”

“우선 아버지와 상의해 봐야겠지.”

그렇게 말한 그가 그녀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새초롬한 낯의 그녀를 보며 씩 웃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

“……하지만.”

“네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이엘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카리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연다.

“그럼 난 아버지께 잠시 다녀올게.”

“알았어, 이야기 잘하고 와.”

이엘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공작은 집무실에 있었다. 심호흡을 한 자카리가 노크를 했다. 똑똑.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와라.”

자카리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공작이 자카리를 가만 올려다본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대관식에 참석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난 참석하지 않는다.”

공작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말없이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긴, 저런 몸 상태로 긴 여행을 견디는 건 역시 무리겠지. 기침은 좀 잦아들었다지만 여전히 혈색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관식에는 공작가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는 걸로 답신을 보 내겠습니다.”

“어째서?”

공작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되물었다. 담담한 그 목소리는 처음부터 답을 정해 둔 어조다.

“네가 내 대리로 참석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냐.”

자카리는 순간 멈칫했다. 공작이 그를 대리로 보낸다는 의미는 간단하다.

헤센바이츠 공작 대리로 자카리를 보냄으로써 그의 후계자 지위를 확고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아뇨, 그건 불가능합니다.”

“자카리?”

“아버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자카리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은 당장 대답하는 대신 아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를 두고, 제가 어떻게 공작성을 비우고 대관식에 참석합니까?”

“……“

자카리가 내뱉듯 대답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짙푸른 시선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걱정 말거라.”

잠시 침묵하던 공작이 입술을 열었다. 자카리는 공작을 빤히 마주 보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살가운 부자 사이였나?”

예전이라면 그 발언에 상처를 받았 겠지만, 지금은 자카리도 그 목소리에 섞인 희미한 온기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엘리와 함께한 시간은 두 부자 사이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됐다. 대관식에는 네가 참석하는 걸로 해.”

“아버지!”

자카리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공작은 여전히 완고한 태도로 자카리를 설득할 뿐이었다.

“나와 네가 둘 다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분명 황가는 공작가를 의심할 것이다.”

“그건……!”

“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는지 탐색 하려 하겠지. 그런 건 역시 사양이다.”

발끈한 자카리가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공작은 현실을 말함으로써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렇다고 몸이 좋지 않은 내가 제 도에 직접 올라가기는 어려워.”

“……“

“오히려 잘됐지.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내 후계자임을 밝히기엔 여러모로 적기라 생각한다.”

공작은 드물게 길게 설명하고 있었다. 고압적으로 제 의견을 관철하기 보다는 이해시키려 하는 태도. 그 태도 자체가 낯설었기에 자카리는 잠시 침묵했다. 말을 고르던 공작이 말을 이었다.

“네가 공작 대신 대관식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공작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온기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에게 네가 헤센바이츠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못 박는 것이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안 됩니다. 아버지의 몸 상태는 본인이 더 아시 지 않습니까. 어떻게 제가 이런 상 황에서 성을 비우겠습니까?”

자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묵하는 공작 앞에서 자카리는 열을 내 어 항변하기 시작했다.

“전 아버지를 혼자 둔 채, 제도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들이 저를 걱정하고 있다. 공작은 감회에 젖었다.

처음부터 증오로 쌓아 올린 관계였다.

또한 명백히 공작의 잘못으로 시작 된 관계이기도 했다. 관계가 개선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이건 아마도 그 아이 덕분이겠지.’

아샤꽃처럼 화사한 아가씨 하나가 공작성의 분위기를 바꿨다. 공작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내 몸은 걱정하지 말고 대관식에 참석하도록.”

“아버지!”

“그리고 이엘리도 데리고 가거라.”

“……“

자카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제도로 가게 되면 이엘리도 함께 갈 생각이다.

그럼에도 타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공작이, 그녀만큼은 직접 챙겨 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신기했다.

“그 아이는 마땅히…… 헤센바이츠의 차기 안주인이 받을 대우를 받아 야 하니까.”

“하지만 아버지!”

“너와 더 이상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구나.”

공작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마 공작은 제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카리는 제가 먼저 굽혀야 함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거라. 피곤하구나.”

공작은 손을 내저었다. 자카리는 한숨을 쉬었다. 모래를 입에 문 것처럼 입 안이 버석거렸다.

 대관식에 맞추기 위해선 당장 이튿날 제도로 출발해야 했다.

소공작 부부가 탈 마차가 급히 준비되었고, 두 사람은 새벽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 최대한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성 밖에 나온 사람이 있었다.

“공작님?”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린 이른 새벽, 자카리와 이엘리는 놀란 얼굴이 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주무실 줄 알았는데요.”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성 밖에서 있는 이는 바로 공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희가 떠나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 그런 건가요?”

“그래.”

공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이엘리가 공작 앞에 다가 섰다. 공작은 빙긋 웃었다.

“몸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아버지께서도 건강 조심하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자카리가 인사를 건넸다. 두 부자는 데면데면하게 서로를 마주 본다. 보다 못한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성을 비우는 건 처음인데, 서로 포옹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나요?”

“저, 이엔.”

“얼른요.”

이엘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공작이 못 이기는 척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오거라.”

“……“

머쓱한 얼굴로 자카리가 공작을 포옹했다. 두 부자가 서로를 끌어안은 모습을 이엘리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손짓했다. 어리둥절한 이엘리에게 말한다.

“이엔도 와야지, 뭐해?“

“나, 나도?”

“당연하지.”

두 부자는 똑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위기에 못 이긴 그녀가 주춤주춤 다가선다.

“그럼…… 곧 다시 뵈어요, 공작 님.”

수줍은 얼굴이 된 이엘리는 공작과 자카리를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감싸 안은 공작의 팔이 가벼워서 마음이 아팠다. 이엘리는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지만 다정한 눈빛이 보였다.

‘……기분이 좀 이상해.’

아직 공작성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이 장소가 그리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엘리는 묘한 기분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뒤에 남은 공작은 떠나는 마차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대관식 전날, 두 사람은 제도 리펜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제도의 모습은 기억과 거의 비슷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오 가는 거리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귀족들이 머무는 구역 안쪽엔 화려 한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하지만 이엘리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공작령과 크게 다른 모습 은 없는걸.’

솔직히 말하면 두 도시의 발전된 정도는 비슷했다.

그녀는 제가 공작령을 처음 봤을 때의 문화 충격을 아직 잊지 못했다. 제도가 공작령보다 번화했다는 황가의 자부심이 우스울 뿐이다.

“이엔. 뭘 그렇게 열심히 봐?”

그때 자카리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냥, 제도 모습이 예전이랑 거의 비슷하다 싶어서.”

그 말을 들은 자카리의 눈동자가 금세 가늘어졌다. 자카리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혹시 제도에서 살고 싶다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기가 막힌 이엘리는 자카리의 뺨을 꾹 잡아당겼다. 그는 기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보다 공작저까지는 얼마나 남았어?”

“글쎄, 이제 곧?”

자카리가 힐끗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엘리도 함께 고개를 내밀었다. 귀족가의 타운하우스들이 모여 있는

구역 안쪽, 유난히 눈에 띄는 저택이 있었다. 장밋빛 벽돌로 쌓아 올린 우아한 건물이었다.

“……설마 저거야?”

“응. “

자카리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멍하니 저택을 바라보다 말고, 작게 중얼거렸다.

“……규모가 엄청나네.”

“겨우 이 정도로 가지고 뭘.”

이게 ‘겨우’라는 소리를 들을 일인가.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공작 성에 비교할 규모까진 아니지만,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주변 귀족가의 저택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내리자, 이엔.”

“아, 응.”

자카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이엘리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엘리는 잘 정돈된 저택의 정원을 돌아보았다.

저택 앞에 늘어서 있던 사용인들이 90도로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올린다.

“소공작님, 그리고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뵙습니다.”

“그래.”

자카리는 오만하게 대답했다. 이엘리가 자카리를 곁눈질했다. 그녀에 게는 언제나 다정한 자카리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면 약간은 벽을 세우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는 방긋 웃었다.

“다들 반가워요.”

“레이디를 뵙습니다.”

사용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결혼 내내 소공작 부부는 공작성에 머무르고 있었 기에, 타운하우스의 사람들은 새로 이 들어온 차기 안주인에 대해 꽤나 궁금해했다.

‘소공께서 저렇게 유한 모습을 보 이시는 건 처음 보네.’

‘아무래도 안주인께서 곁에 계셔서 그런 건가?’

사용인들이 가장 놀랐던 점은 역시 자카리의 태도였다.

아주 드물게 타운하우스에 들렀던 자카리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공작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리고 레이디 헤센바이츠께서는……’

마치 맹수의 목줄을 쥔 것만 같은 차기 안주인. 살랑거리는 긴 분홍색 머리카락과 연녹색 눈동자, 그리고 가녀린 체구.

살가운 태도의 그녀는 화사하게 핀 아샤꽃가지 같은 미인이었다.

“이엔, 피곤하지는 않아?”

마차에서 내려선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용인들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보았다.

‘소공작께서 저렇게 잘 웃으실 수 있는 분이었던가?’

‘게다가 레이디의 안부까지 물어보시다니?’

사용인들은 여러모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바라 보며 불퉁하게 말했다.

“참, 이번 마상 시합에는 황제 폐하도 출전하시겠지?”

“마상 시합?”

“응. 뭐, 아마도 대리 기사를 내보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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