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96)

52화

‘……역시 기사들은 초대하지 말 걸 그랬어.’

자카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다스렸다.

이번 티파티엔 공작성 사람들은 모두 초대되었다. 그 말은 즉, 기사단들도 모두 초대되었다는 소리다. 넓은 공작령 곳곳에 파견 나가 있는 기사들을 제외하더라도 그 수는 거의 오십여명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엘리는 공작성에서 인기가 높았다.

특히 공작가의 젊은 기사들에게 이엘리는 거의 환상 속의 레이디와 가까운 존재였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어. 하지만……’

기사들이 이엘리에게 보이는 호의는 사실, 이성에 관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주군의 아내에 대한 존경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대부분의 일은 유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이엘리에 한해서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 고로 그는 현재, 그녀의 곁에 붙어 앉아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아가씨, 이번 소공작님의 성인식 은 정말로 멋졌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주니 무척 기뻐요.”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그 런데 그때, 매의 눈을 하고 있던 자카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경들, 이엔에게 말 걸지 마.”

“정말 치사하십니다!”

“불만이면 경들도 결혼이라도 하든 지.”

불만을 터뜨리는 기사들을 향해 자카리는 당당하게 말했다. 푸른 시선은 자신감으로 빛난다.

“이엔은 내 아내니까.”

“……”

기사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엘리는 그냥 자카리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호로록 차를 한 모 금 마시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자카리가 저렇게 행동하는 건 익숙해 진지 오래다.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하지만 자카리는 마치 주인을 지키는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이엘리의 곁에 찰싹 붙어있었다.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차후에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희도……”

“아니, 말 붙이지 마.”

자카리는 마치 철옹성처럼 기사들의 접근을 쳐내 버렸다.

이엘리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빨리 결혼해 버려, 그리고 경들의 아내들에게나 잘하도록.”

“너무 그러지 마, 그냥 칭찬해 주는 것 뿐이잖아.”

보다 못한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기사들을 향하여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엔은 안 돼."

“……예에, 알겠습니다. 누가 애처 가 아니랄까 봐,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기사들은 칠면조 고기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전투적으로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다소 민망해진 이엘리가 자카리를 흘겨보았으나, 그는 태연하기만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이엔?”

“아냐, 아무것도.”

어차피 이 문제로는 입씨름해 봤자 답도 안 나온다. 이엘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버렸다.

그렇게 황혼이 내려앉았다. 차와 음식을 실컷 먹은 사람들의 분위기는 녹진한 느긋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슬슬 티파티를 정리할 시간이다.

이엘리는 박수를 쳐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다들 오늘 즐거우셨는지 모르겠어요.”

이엘리의 말에 사람들은 환히 웃으면서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 거나 이번 티파티는 성공적으로 치 른 것 같다며, 그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의 용건 은 따로 있었다.

“참, 여러분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할 생각이예요.”

“성과급이라니요?”

“지금 티파티로도 충분한데……”

티파티를 열어 준 것으로도 모자라 따로 성과급까지 지급한다니.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했다.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걸요.”

빙그레 미소를 지은 이엘리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이후, 준비한 나머지 보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분들에게 3일간 유급 휴가를 드릴게요. 휴가는 원할 때 사용하시면 돼요.”

파격적인 대우에 놀란 사람들이 자카리와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저 두 남자는 이엘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엘리는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사와 나누도록 해요.”

느닷없는 보상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 정말로 즐거웠어요.”

이엘리는 차후에 공작 부인이 되기로 약속된 아가씨였다. 그런 사람이 우리 앞에서 직접 고개를 숙인다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서로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공작성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작 가문을 모셔 왔지만, 단 한 번도 저 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공작 가 문은 다른 가문들에 비해, 휘하의 사용인들을 굉장히 잘 대해 주었음에도 그랬다.

‘내 귀가 이상한 거 아니지?’

‘아가씨께서 우리에게…… 함께 시 간을 보내서 즐거웠다고 말씀해 주셨어.’

하지만 눈앞의 아가씨는 전혀 달랐다. 언제나 냉랭했던 공작성의 분위기를 따스하게 바꾼 아가씨는 이 제, 차별 없이 사용인들을 대하고 있었다. 이엘리는 마지막으로 다정한 인사를 남겼다.

“그럼 먼저 돌아갈게요. 여러분은 마저 즐기다, 편하실 때 자리를 정리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공작 부자를 데리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멍해졌다.

“……세상에.”

“이게 무슨……”

주인 가족들이 자리를 비우자, 남 겨진 이들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다. 단순히 성과급과 유급 휴가를 받아 기쁜 게 아니다. 사용인들은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계셔.’

왠지 가슴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용인들은 행복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날이 저물었다.

 공작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자카리는 무거운 얼굴로 공작이 방에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공작을 바라보는 자카리의 얼굴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요새 몸 상태 가 그리 좋지 못한 공작이었다. 사실, 티파티에 이렇게 오래 남아 있었던 것 자체가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저기, 자카리.”

그리고 나란히 복도를 걷던 중, 이엘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어땠어? 재미있었어?”

“응, 재미있었어. 그렇지만……”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가 문득 눈동자를 굴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래도 그 자식들이 너에게 말을 붙이려 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어.”

자카리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아마 ‘그 자식들’이라 함은 헤센바이츠의 기사들일 것이다.

‘뭐, 내가 보기에는 그냥 차기 안 주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 같았지만.’

아무래도 자카리에게는 다르게 보인 것 같았다. 이엘리는 제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려 보였다.

“내가 뭐라고 말해도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할 거지?”

“당연하지.”

자카리는 뚱한 얼굴을했다. 어차피 저렇게 완고할 때는 입씨름을 해 봐야 소용없었다. 기사들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는, 말을 더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자카리가 문득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 황혼의 빛을 받은 이엘리의 뺨이 발그레했다.

“우리 이엔, 그렇지 않아도 공작성 사람들에게 인기가 엄청난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자카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간지러운 감촉에 그녀가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웃었다. 자카리는 한숨을 섞어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 겠는걸.”

“갑자기 웬 뜬금없는 말인지 모르겠어."

“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넌 이미 이곳에서 그 누구도 대체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공작성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생각하던 자카리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건 좋지만……”

“응?”

“그냥.”

무어라 자신의 속내를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네가 사랑받는 건 좋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네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건 좀 싫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른다.

“음, 자카리.”

그때 새싹처럼 연연한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이후 단호하게 말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공작성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그녀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카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녹색 시선이 부드럽게 휜다.

“가끔 넌, 생각을 줄일 필요가 있다니까.”

“……그래.”

자카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귀 뒤 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언제나 그녀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듣고 싶은 말을 골라 해 주는지, 이젠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엔, 혹시 너 독심술 같은 거 해?”

“그거 농담이야? 너무 재미가 없는데.”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그를 흘겨보았다. 그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 재미없는 것 쯤은 용서해 줄게.”

“정말?”

“그래. 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여상한 말 한 마디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자카리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카리의 예언은 적중했다. 공작성내의 이엘리에 대한 애정은 끝없이 높아져서,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흐뭇한 얼굴을 하곤했다. 다만 이엘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부분에서는 눈치가 빠르면 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것만 둔감하 단 말이야.’

자카리는 불만 반, 귀여움 반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다른 부분에서 발휘하는 눈치의 일부만 발휘 했어도, 공작성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카리의 마음도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카리, 아까 주방에서 쿠키를 구워서 보내줬어. 너도 좀 먹을래?”

서류를 살펴보던 이엘리가, 오독오 독 쿠키를 씹으며 자카리를 올려다 보았다. 자카리는 웃었다.

“아냐, 괜찮아.”

“한 개 먹어 보지, 되게 맛있는데.”

작게 중얼거린 이엘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입맛에 맞는 게 당연했다. 왜냐하면 저 쿠키는 철저히 이엘리의 입맛을 맟줘 구워 낸 것이기 때문이다.

‘뭐, 우리 이엔이라면 당연히 저런 대우를 받을 만하지.’

그때 모든 서류를 살펴본 이엘리가 서류를 정돈하여 책상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요새 다들 내게 무척 잘해 줘.”

“그래?”

“응.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야.”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의자에 몸을 폭 파묻어 앉은 채,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말인데, 뭔가 더 내가 해줄 게 없을까……”

자카리는 싱긋 웃었다. 버릇처럼 분홍색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자, 부드러운 감촉이 감겨 온다.

“그냥 넌 그대로 있으면 돼.”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이잖아.”

자카리의 손길을 느끼던 이엘리가 고양이처럼 눈을 사르르 감았고, 그대로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아.”

“괜찮아.”

자카리는 힘을 주어 말했다. 아마 이엘리는 스스로가 공작성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특별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엘리는 불퉁한 얼굴이 되어 그의 손에 뺨을 기대 왔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그녀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공평하 게 대한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잃지 않는다.

그런 다정함은 귀족 가문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아니 거의 존재하지 않는 덕목이었다.

“정말이니까.”

“으응.”

“나 믿지?”

이제 자카리는 대놓고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설핏 웃더니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그럼. 내가 너 아니면 누구를 또 믿겠니.”

그 말 한 마디에 내 심장이 덜겅 내려앉는 건, 아마 넌 전혀 모르겠지. 자카리는 의자에 기대앉은 이엘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햇살이 말갛게 비치는 날씨 좋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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