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화
“이엔.”
그때 이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 안는 손이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자카리에게 물었다.
“자카리, 왔어? 공작님은?”
“뒤에 오고 계셔.”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그가 조그맣게 소곤댄다.
“오늘 네 옆자리는 나에게 주기로 약속했어. 그렇지?”
“걱정 마, 잘 기억하고 있다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이엘리는 자카리를 살짝 밀어냈다. 그렇게 예고 없이 흑 들어오면 조금 설레고 만단 말이야.
게다가 오늘 자카리는 이상하게 자신의 옷차림에도 신경을 쓴 모습이다.
“그보다 웬일로 이렇게 잘 차려입었어?”
“그야 네게 잘 보이기 위해서지.”
“아, 그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았다. 오늘의 자카리는 날렵한 몸매 에 착 달라붙는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거기다 하얀 은발을 빈틈없이 빗어 넘긴 모습까지, 완벽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다른 여자들이 보면 꽤나 설렐 것 같은 모습이잖아.’
왠지 심술이 돋은 이엘리는 불퉁하 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어째서 이엔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걸까?’
한편, 그는 이엘리의 옆얼굴을 보며 짧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말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침부터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는 제 솔직한 고백을 들을 때마다 전혀
믿어 주지 않는다.
“이엔, 정말로 네게 잘 보이기 위해 준비한 거야.”
“응, 그래. 믿어 줄게.”
이엘리는 성의 없이 손을 휘저어 보였다. 자카리는 뚱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인데, 난 언제나 진심만을 말하는 건데. 억울함을 담아 이엘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대충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정말로 작은 주인님께서는 왜 아가씨가 저러시는지 이유를 모르시는 걸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용인 들은 티가 나지 않도록 서로서로 눈 짓을 주고받았다. 공작성의 사람들은, 자카리가 언제나 자신의 진심을 이엘리에게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주인님께서는…… 솔직함도 과하면 독이 되는 것의 살아 있는 예시라니까.’
메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어째서 모르신담. 이엘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너무 자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자신의 진실성이 떨어진 걸 전혀 모르는 자카리였다.
‘그래도 그만큼 두 분께서 서로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야.’
바로 그때, 공작이 이쪽으로 다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엘리는 환하 게 웃으며 공작을 반겼다.
“공작님, 오셨어요?”
“그래.”
공작은 작게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사용인들은 내심 이엘리의 수완에 감탄했다. 번거로운 일들은 대부 분 거절하곤 하는 공작이었다. 그럼에도 공작이 이번 티파티에 참석한 다는 건…….
‘역시 아가씨이시군.’
‘공작 각하와 소공작님을 함께 같은 자리에 둘 수 있는 건, 아가씨만이 유일할 걸.’
‘게다가 아가씨가 계실 때만큼은 두 분은 서로 얼굴을 붉히지도 않으시니까.’
사용인들의 기대에 충실히 보답하여, 공작 부자는 서로를 바라볼 뿐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공작님을 위해 몸을 따스하게 해 준다는 허브차를 마련해 봤어요.”
“그래, 기대되는구나.”
이엘리가 공작에게 살갑게 말을 걸자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는 공작을 가장 상석에 안내 하고, 자카리를 제 옆에 앉혔다. 어딘가 뚱해 보이던 자카리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러워졌다.
“다들 앉도록.”
가장 연장자인 공작의 느긋한 말에 사용인들도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티파티의 시작이었다.
티파티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분위 기로 진행되었다. 공작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임에도, 세 사람은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처음엔 약간 긴장한 것 같던 사용인들도, 세 사람의 차분한 태도에 조금씩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때 공작이 이엘리에게 말을 붙였다.
“뭔가 한 마디 해 보는 게 어떠냐?”
공작이 이엘리를 쿡쿡 지르며 웃어 보였다. 이엘리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공작을 돌아보았다.
“제가요?”
“그래. 네가 이 티파티의 안주인 아니냐.”
티파티의 안주인이라. 그녀는 뺨을 붉혔다. 공작이 그렇게 말해 주니,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음, 상사가 축사랍시고 길게 말하는 거.. 아랫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건 이미 잘 아는데.
‘그, 그래도 뭔가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아.’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곁에 앉은 자카리뿐 아니라,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반짝이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녀는 뭔가 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 그럼 최대한 짧게……”
큼큼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은 이엘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자카리의 성인식을 치르며, 공작성의 여러분들이 모두 고생하신 걸 잘 알고 있어요.”
이, 이 정도면 무난한 시작이려나? 느닷없이 인사를 하게 된 바람에, 긴장감에 가슴이 조였다.
“여러분들의 노고 덕택에 무사히 자카리의 성인식을 치를 수 있게 됐 어요.”
그 말을 들은 공작성 사람들이, 이엘리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그래서 한번, 여러분들과 대화도 나눌 겸 이렇게 함께 모여 봤어요.”
이엘리는 활짝 웃었다. 자리에 모인 공작성 사람들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엘리는 사용인들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 용인들을 대접하고자 한 것이다.
“이번에 무척 고생스러웠을 텐 데…… 다들 불만 없이 끝까지 노력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평소라면 공작 가족께서 저희와 동석하시면 안 된다고 정색할 집사마저 제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엔, 잘했어.”
“으응……”
비록 자카리는 그녀가 자리에 늘어져 있기만 해도 ‘잘했다’라는 칭찬을 할 테지만. 그래도 자카리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게 기뻤다. 이엘리는 살며시 자카리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 묻어나는 감사 인사였다.”
‘윽, 공작님까지?’
이엘리는 또 한 번 홧찾하게 달아 오르는 뺨을 느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지? 생각하던 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아가씨.”
“맞아요. 고작 고용인인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어쩐지 공작성 사람들도 감동의 물결에 파묻힌 것 같다. 특히 그 중에서도 메리가 열정적인 눈으로
이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뭔가 내가 모르는 새 대단한 일이라도 해 버린 건가?
“그, 아무튼. 즐거운 티타임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빨갛게 물든 낯을 푹 숙이며 다시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주변은 금세 왁자지껄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온갖 디저트 와 다기, 꽃병까지 놓인 테이블은 알록달록했다.
‘난 이렇게까지 엄청난 자리를 마련하려 한 게 아니었는데.’
어째 황녀와 함께했던 티타임보다 도 지금 차려진 테이블이 훨씬 더 정성이 가득한 것 같았다.
“자, 이엔.”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불쑥 접시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당연하다는 양 그녀에게 묻는다.
“이 롤 케이크, 네가 좋아하는 거 지?”
“응. 좋아하긴 하는데……”
이엘리는 당황한 얼굴로 그가 내미는 접시를 받아 들었다. 눈처럼 하얀 생크림을 잔뜩 넣은 딸기 롤 케이크. 입 안에 넣기만 해도 부드럽게 녹아내릴 것 같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카페 로랑의 롤 케이크를 좋 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예전에 카페 로랑에 갔을 때 봤으니까 그렇지.”
”……”
우리, 그 카페 갔던 게 최소 5년 전인데요? 이엘리는 물끄러미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밀크 티를 마실 때면, 각 설탕을 최소 여섯 개는 넣는다는 것도 알아.”
“음…… 그렇구나.”
자카리가 그녀에 대해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는 건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고,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따스한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러던 중, 자카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래도 단 건 좀 줄이는 게 좋겠어. 건강에 나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내 앞에 케이크 접시를 계속 끌어당겨 놓는 건 뭔데?”
기가 막힌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되물었고, 자카리는 머쏙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거야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자꾸 보이니까……”
”뭐야,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잖아.”
쿡쿡 웃은 이엘리는 포크를 들고 딸기 롤 케이크를 크게 잘라 맛을 보았다.
“맛있어.”
그녀의 말에 자카리는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롤 케이크를 공략하려 할 때.
“이엘리, 그보다 이 샌드위치를 하나 먹어 보려무나.”
“네?”
공작이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이엘리 앞으로 밀어 주었다. 베이컨과 양상추, 토마토와 계란을 듬뿍 넣은 두툼한 샌드위치였다. 공작은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이엘리에게 말했다.
“케이크는 식사 대용으로는 역시 걸맞지 않으니까 말이다.”
“……네?”
“끼니를 잘 챙겨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저게 시시때때로 입맛이 없다면서 식사를 거르시는 분이 하실 말씀이신가? 하지만 날 생각해 주시
는 건 역시 기쁜 일이니까. 이엘리는 반박하는 쪽보다는 얌전히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무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아가씨!”
주방장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이엘리에게 디저트 접시를 내밀었고, 자랑스럽게 설명을 이었다.
“이건 제 특제 레시피로 구워 낸 바나나 팬케이크입니다.”
“생크림을 찍어 드시면 훨씬 더 맛 있어요.”
주방장과 부엌 하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머랭을 듬뿍 쳐 넣었는지, 도톰하게 구워진 바나나 팬케이크는 구름처럼 폭신폭신해 보였다. 연갈색 시럽이 우아한 모양으로 흘러내린다.
“……설마, 이거 직접 만든 거야?”
“그럼요. 저희가 직접 카페 로랑의 파티시에게도 레시피를 물어봤는 걸요.”
이엘리는 난처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얼른 먹어 보라는 것처럼 열렬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녀를 위해
일부러 이렇게 팬케이크까지 구워 오다니.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일이 긴 한데…….
“저기, 이번에 난 부엌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기 싫어서 일부러 카페에 주문한 건데……”
문제는 바로 이거였다. 일을 안 시키려 했는데, 알아서 일을 늘려서 디저트를 만들어 오다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가씨의 디저트를 만드는 건 저희의 기쁨이예요!”
“아가씨께서 맛있게 드셔 주시기만 하면, 저희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요!”
마치 즐거움을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부엌 사람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엘리는 당황했다.
“그런 거야?”
“그런 겁니다!”
“그런 거예요!”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공작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아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활짝 미소 짓던 그녀는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다 못 먹어.’
주변의 모든 디저트들이 이엘리 앞에 모여 있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고마워.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많은데."
“먹을 만큼만 먹으면 돼, 괜찮아.”
“맞아요, 입맛에 맞는 음식을 드시면 되죠.”
아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있잖아.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원하는 디저트만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된다.’라는 말과 다르게, 다들 그녀가 무엇을 먹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최대한 열심히 먹자.’
결국 이엘리는 굳게 마음을 다져 먹었다. 이엘리는 결연한 표정으로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우리 팬케이크를 드셨어.”
“설마, 샌드위치가 더 입맛에 맞으셨던 건가?”
“안 돼, 저 롤 케이크는 카페 로랑거 잖아!”
저기, 소곤거린다고 해도 잘 들리거든…… 공평하게 한 입씩 롤 케이크와 샌드위치, 팬케이크를 먹던 그녀는 급격히 피곤해지고 말았다. 무 슨 티파티를 하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