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96)

49 화

“아뇨, 제가 원하는 건 공작성의 사용인들과 차를 마시는 거예요.”

“……공작성의 사용인들과, 말입니까?”

“네. 공작성 사람들과 말이예요.”

집사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으나, 이엘리는 끗끗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이번에 자카리의 성인식을 치르면서 다들 너무 고생한 것 같아서요.”

“그건 저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의무를 훌륭히 수 행했을 때 약간의 보상 정도는 주어져도 되잖아요.”

“보상이라면……”

집사가 묘한 얼굴을 했다. 집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엘리는 우선 미소부터 지었다.

“고생한 사람끼리 모여서, 차도 마 시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쉬면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됩니다. 차기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실 분과 사용인이 어떻게 한자리에  앉습니까?”

집사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사에게 설명한다.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도 저를 도와줄 사람들이잖아요.”

”……”

“오히려 전, 제가 공작성의 사용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집사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열었다.

“음, 아직 정식으로 안주인이 된 것도 아닌데 제가 너무 번거롭게 하나요?”

“작은 주인님의 아내 되시는 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집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리둥절해진 이엘리 앞에서 집사가 완고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공작성의 차 기 안주인이시니까요.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성의 사람들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감동을 받고 만다.

‘공작성의 차기 안주인…….’

집사는 상당히 깐깐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사용인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공작가를 모신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집사는 특별하다고. 집사의 가문은 대대로 공작가의 집사 직위를 맡아 왔고, 지금의 집사도 평 생을 공작가에 봉사했다고 했다. 그런 사람에게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서, 이엘리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즐거워 졌다.

“고마워요.”

그녀가 생긋 눈웃음을 쳤다. 집사는 그런 이엘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주인님의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치러 내셨다고 했지.’

사실 이엘리와 집사는 평소 마주치기 힘들었다. 이번에 자카리의 성인식을 치르며 예산안을 정리하기 위해 몇 번 만났을 뿐이었다. 집사는 내심, 이엘리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상향시켰다.

‘적어도 아가씨께서는 권위보다는 자기 사람을 더 챙기는 분이신 것 같군.’

이번에 로렌 백작 부인이 여러모로 오만불손하게 행동했었다. 그러므로 집사는 아가씨가 ‘다 함께 차를 마 시고 싶다’라고 말했을 때, 당연히 화려한 티파티를 열 줄 알았다.

북부의 귀부인들을 초대해서 스스로가 차기 북부의 안주인임을 과시한이다. 그건 이엘리의 권리이기도 했다.

‘……저런 분이시기에, 공작 각하 와 소공작께서 아가씨만큼은 아끼시는 건가.’

실제로 이엘리가 공작성에 들어온 이후, 공작성의 분위기는 상당히 온화한 쪽으로 변화했다.

‘소공작님은 물론이고, 공작 각하께서도 아가씨가 곁에 계실 때만큼은 자주 웃으시곤 하니까.’

오랫동안 공작과 자카리를 모셔 온 집사였다. 그러므로 집사는 이엘리가 오기 전, 냉랭했던 공작성의 분 위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을 외면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인형처럼 살아 가던 아들. 그런 두 사람의 깊디깊은 거리를 이엘리는 말끔하게 좁혀 버렸다.

“참, 이번 티파티의 주제는 휴식이니까요.”

한편 무슨 생각을하고 있었는지, 이엘리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제 앞의 집사를 마주 보았다.

“적어도 부엌 하녀들이 티파티를 위해 노동하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그래서 말인데……”

발랄한 목소리가 집사의 귀를 두드렸다. 이엘리는 집사를 힐끔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카페 로랑에서 티푸드를 들여 오고 싶거든요. 그렇게 하면 비용이 많이 들까요?”

“헤센바이츠의 차기 안주인께서는 그깟 돈을 사용하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십니다.”

집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 했다. 이엘리는 다시 활짝 미소 지었다. 햇빛 같은 미소였다.

“고마워요. 전할 얘기는 대부분 끝 났으니, 전 이만 돌아갈게요.”

“조심히 가십시오, 아가씨.”

자리에서 일어난 집사가 정중한 동작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이엘리를 배웅하는 집사의 태도에는, 적어도 존중이 가득 차 있었다. 이엘리는 즐거운 얼굴로 복도에 발을 내디디며 생각했다.

‘이번 티파티에 자카리와 공작님을 초대한다면…… 두 사람 모두 참석해 줄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두 부자의 관계 가 조금이라도 화목해지지 않을까. 이엘리는 살짝 기대를 품었다. 만약 티파티에 초대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공작님께 먼저 여줘 보고, 자카리는 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상대적으로 거절할 확률이 높은 공작부터 공략하는 게 나았다. 이엘리는 결연한 표정을 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나중에라도 새로 티파티를 열 일이 있을이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연습 겸, 티파티 계획이 세워지는 대로 초대장까지 일일이 만 들어 볼 것을 다짐했다.

자카리는 심호흡을 하며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달칵, 방문이 열렸다. 다행인지 불 행인지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 안에 있었다. 한참 서류를 정리하던 공작은 책상에 놓여 있는 약병을 슬그머니 숨겼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질문을 한다.

“자카리. 네가 여기는 웬일이지?”

”……”

자카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잠한 아들을 돌아보면서, 공작은 미간을 좁히고 다시 물었다.

“얼굴이 창백하구나. 유령이라도 본 게냐?”

“……아버지.”

“왜 그러지?”

공작은 언제나처럼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카리가 한숨처럼 말했다.

“어째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매끄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자카리는 피가 나도록 제 입술을 물었고, 한 음절씩 씹어 뱉었다.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요.”

”……”

평소라면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공작은 드물게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애써 차분함을 가장하던 자카리의 목소리에 천천히 온갖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 끝까지 숨기실 작정 이셨습니까?”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

자카리가 언성을 높였다. 공작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공작은 자카리를 향해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 평온한 물음에 그는 말 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내 병을 외부에 알린다 한들 나아 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 정말!”

자카리가 악을 질렀다. 하지만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으로 빚은 것처럼 말끔하기만 하다.

“헤센바이츠 공작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 황가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쯤 아시지 않습니까!”

“자카리.”

공작이 고요한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오랜 증오와 미움은 옅게 희석 되어 잠잠한 목소리였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안전한 작위 승계, 그리고 모든 일을 정리한 이 후의 조용한 죽음뿐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너에게 지금 당장 작위를 승계하고, 난 뒤로 물러 나고 싶다. 하지만……”

공작이 말끝을 흐렸다. 설명할 말을 고르는 태도였다. 잠시 후, 공작은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현 시점에서 내가 네게 작위를 승 계한다면 황가를 포함한 작자들은 의심을 품을 거야.”

공작은 언제나처럼 차분한 태도였다. 자카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공작을 응시했다.

“적어도 난 겉으로는 멀쩡하고, 병을 가졌다는 것도 숨기고 있으니까.”

”……”

“게다가 너는 은통의 힘을 가졌지. 네게 작위를 물려줄 때 그들은 분명 그 점을 공격할 터.”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되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이다. 공작이 말을 이었다.

“공작 작위를 맡기에는 너에게 위험한 요소가 다분하다고, 그렇게 주 장하겠지.”

“……저는.”

자카리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작위를 얻기에 부족한 후계자. 아무리 노력해도, 괴물의 힘을 발휘하여 공작령을 지켜도. 그래도 소용이 없나. 그때 공작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네가 작위를 물려받기에 가장 좋은 때를.”

“……아버지?”

“너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떻든지 간에, 너 외의 헤센바이츠의 공작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없다.”

자카리는 멍하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아들을 향해서 드물게 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 전에도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난 조용한 죽음을 원하고 있다고.”

”……”

“어차피 아델라이데가 죽고. 내게 이 병이 발현한 때부터.”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아들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훑어 내렸다.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말한다.

“내 목숨에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내를 먼저 보냈는데, 내가 오래 살아봤자 무에 그리 즐겁겠나.”

짓씹듯이 내뱉는 자카리의 말과는 다르게, 공작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 누듯 가벼운 어조였다.

“가끔씩 난, 이 병이 아델에 대한 죗값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어.”

”……”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공작이 자신의 속내를 이렇게까지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태도를 방패처럼 두르고 있던 공작이 최초로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그, 그건……”

“멍청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이 병이 발병했을 때 난 오히려 기뻤다.”

공작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양손을 들어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곧장 말을 잇는다.

”이 병이 아델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라 여겼어.”

“……아버지.”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사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말한 공작이 양손을 내려 자신의 아들을 마주 보았다.

자카리는 멍하니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자카리가 증오도 미움도 없이 공작을 향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지금 당장 죽어 나자빠질 것도 아닌데,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 하지 마라.”

공작이 픽 웃었다. 그 미소에 자카리는 약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카리가 따져 물었다.

“좋습니다. 이엘리에게는 언제까지 숨기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내가 죽을 때까지?”

자카리는 이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자카리는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방문으로 걸어갔다. 벌컥 소리 가 나도록 방문을 열자, 이엘리가 서 있었다.

“이엔?”

두 눈을 가늘게 뜬 이엘리가 한 걸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미심쩍게 질문을 했다.

“무슨 일이예요, 설마 두 사람 싸 우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잠시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두 남자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 쨌거나 이엘리를 걱정시키는 것은 싫다는 게, 항상 감정싸움을 벌이는 두 남자가 드물게 타협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공작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지?”

“아뇨, 그냥.”

이엘리는 힐끔 둘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자카리가 여기 있다고 말을 들어서요. 그리고 공작님의 몸 상태도 어떠신가 해서……”

“내 몸은 괜찮다.”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자카리는 순간 기가 찬 얼굴을 했지만, 공작은 제 말에 동조하라는 것처럼 아들을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자카리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맞아, 이전보다 꽤 기침이 줄어드셨대.”

”그래? 다행이네요, 공작님.”

이엘리는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된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후 공작에게 종알종알 말한다.

“그래도 약은 꼬박꼬박 드시고, 주치의도 항상 곁에 두셔야 해요.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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