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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196)

48화  

“그래서 처음에는 다 함께 차라도 마실까 했는데……”

이엘리는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생각만 한 거야, 귀찮게 굴지 않을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쿠션을 깐 것뿐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는 말고! 그때 메리의 얼굴이 환 하게 밝아졌다.

“정말인가요?”

“그냥 생각만 한 거야!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그냥 성과급을 주는 것으로…… 응?”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메리의 눈동자가 기대 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저희와 함께 티타임을 가져 주시겠다는 생각이신가요?”

“아니, 그럼 다들 피곤하지 않겠어?”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메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즐겁게 외쳤다. 상사랑 차를 마시는 건 데 피곤하지 않다고? 이엘리는 당황해 버렸다. 물론 이렇게 공작성 사람들과 친해진다면 이엘리는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공작성 사람들은 좀 귀찮지 않을까?’

티타임 한 번을 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을 생각해 보라. 우선 티푸드와 차를 마련해야 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앉을 자리까지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나중에 청소도 해야 하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야? 난 공작성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일을 만드는 것 같아서……”

“아니예요, 저희가 언제 주인 나리의 티파티 자리에  초대받아 보겠어요?”

메리는 기대감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아, 혹시 아가씨께서 불편하신 거 라면……”

“아니, 그건 아니고!”

이엘리는 양손을 마구 저었다. 메 리의 말을 들으면서 이엘리도 깨달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여긴 내가 예전에 살았던 현대 한국이 아니라 리펜베르크 제국이야.’

그곳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제국은 다르다. 귀족들은 하인들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단 한 번도, 이런 티파티 초대는 받은 적이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저희는 좋아요.”

메리는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로 대답했다. 아마 저 말은 ‘저희를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 주셔서 기 뼈요.’라는 뜻이겠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된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게.”

“네! 뭔가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메리는 생글생글 눈웃음을 쳤다. 머쓱한 얼굴이 된 이엘리가 메리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감사 인사를 하는 건데 새로 일을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가 기뻐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 준다면 고맙고.”

이엘리가 미소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 대화로 바쁜 메리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은 이만 물러가도 좋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메리는 꾸벅 인사를 남기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메리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메리가 저렇게 신이 난 모습을 보니, 이엘리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다만.

‘……음, 그럼 티타임을 새로 기획 해야 하려나?’

어떤 식으로 티타임을 치러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미 성인식을 치르면서 과도한 노동에 노출됐었던 고용 인들이기에, 새로이 일거리를 만들 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음, 우선 집사한테 상담을 좀 해 볼까.’

얼마나 예산을 융통할 수 있는지 등등, 이것저것 물어보면 좋을 것 같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장 집사를 찾아 나섰다. 긴 복도를 가로지르는 데, 저 멀리 하얀 은발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자카리?”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카리였다. 그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하고 있는 거야?’

무슨 고민에 그리 깊이 빠져 있는 지,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조 차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자카리!”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 의아한 어조로 질문을 한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이엔?”

느닷없는 그녀의 등장에, 살짝 눈을 치켜떴던 자카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 거 같은데?”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대화의 방향을 바꿔 버렸다.

“그보다 이엔, 넌 어디 가는 거야?”

“아, 그게. 집사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데려다줄게.”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가 당연하다는 양 이엘리의 곁에 붙어 섰다. 이엘리는 조금 샐쭉해졌다.

“저기, 집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알아. 혼자 찾아갈 수 있다고.”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하자 자카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는 이상하게 힘이 없어 보였다.

“그냥 너랑 같이 걷고 싶어서 그 래.”

“진짜야? 뭔가 걱정이 있다거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고?”

“응, 아니야.”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자카리의 모습은 차라리, 스스로에게 ‘아무 일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엘리는 미심쩍은 얼굴이 된 채 자카리의 손을 꼭 맞잡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해 주기 야. 알았지?”

“……그래.”

짧은 침묵을 지키던 자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애써 웃고 있는 자카리의 얼굴이 묘하게 힘들어 보여서, 이엘리는 걱정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만 들어가 봐.”

잠시 후, 사용인 별저에 도착한 자카리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엘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카리."

“응? ”

“뭐든지 힘든 일이 있으면 내게 얘 기해 주는 거야, 알았지?”

연녹색 눈동자에 서린 걱정스러운 기색에, 자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엘리는 집사의 방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고개를 내민 집사가 작은 주인과 아가씨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아가씨? 그리고 작은 주인님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난 그냥 이엔을 데려다주러 온 거야. 신경 쓰지 말게.”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엘리는 마지막으로 자카리에게 시선을 주고는 집사의 방으로 발을 들였다. 자카리에게 인사를 남기는 이엘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들어가, 자카리.”

“그래.”

그녀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자카리는 미소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간신히 노력했다. 마침내 방문이 닫혔 다. 살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채를 하 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엔.”

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짙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돌을 삼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

사실 자카리는 아까 주치의를 만나 고 온 것이었다. 그는 공작이 피를 토한 것을 본 후, 내내 주치의를 찾아갈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공작의 반응이 워낙 완고한 데 다 상황 또한 좋지 못한 터였다. 황 족들이 공작성에 머물 때 굳이 공작의 좋지 못한 상태를 공개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찾아가 봤던 건데.’

자카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자카리의 느닷없는 방문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는 당황하지 않았다. 주치의에게 물어본 바, 공작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주치의는 그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비밀을 지켜 달라 말씀하셨지만, 작은 주인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실 정도면……”

“각혈하신 것을 보았어. 숨기지 말 고 말해 줘.”

그 대답을 들은 주치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치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공작 각하께서는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셨습니다.”

“언제부터?”

날카로운 물음에 주치의가 짧은 한 숨을 내쉬었다. 안경 너머의 갈색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전대 공작 부인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발병하셨고, 그 이후 병세는 쭉 진행 중입니다.”

”……”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자카리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가 자신을 증오하다 못해 목숨까지 스스로 놓아 버린 이후, 공작은 자카리에게 있어 비정한 신에 가까웠다.

아내를 죽게 한 아들을 죽이고 싶어 하면서도 공작가를 지키기 위해 차마 아들을 포기하지 못했던 아버지.

‘그런데도…… 그렇게 공작가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스스로의 병을 치 료하지 않았다고.’

자카리는 아드득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새파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래, 그 병은 무슨 병이지? 어째 서 치료하지 않았나?”

“병의 이름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 병은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기도 합니다.”

“젠장, 세상에 치료할 수 없는 병 이 어디 있어!”

자카리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주치의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헤센바이츠 공작가에는 있습니다.”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

“아주 드물게, 공작가의 ‘겨울의 마법’이 발현되지 못하고 체내에서 폭주하는 경우.”

그가 덜컥 멈췄다. 겨울의 마법. 이번에도 그 빌어먹을 은룡의 힘인 가.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 경우에 공작 각하처럼 이유 모를 병이 발병됩니다.”

주치의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자카리는 주치의의 목소리에 서린 정말감을 곧장 알아보았다.

“공작가의 일원에게만 몇백 년에 한 번, 아주 드물게 발병되는 병입니다.”

공작가의 일원에게만 발병되는 병이라니. 이 가문은 도대체 제대로 돼먹은 게 하나도 없다.

“당연히 치료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 병에 걸린 사람이 무척 희귀하며, 오래 살아남은 사람도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병이 라기보다는 마법적인 재해에 가까우니까요.”

“그렇다면 아버지는……”

“사실 저 병에 걸리신 것치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견디신 편입니다.”

주치의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주치의가 가라앉은 어조로 설명을 했다.

“최대한 증상을 늦추기 위해 약재를 쓰고 있지만, 그도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언제까지 생존하실 수 있는 건가?”

“적어도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성마른 질문에 주치의는 죄스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자카리는 문득 공작과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 올렸다. 공작이 피를 토했던 것을 발견했던 날, 그는 공작에게 사납게 따져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공작령을 책임질 분 이십니다. 그러니 후계 된 자로서 당연히 걱정해야지요. ’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 쓸 필요 없다.’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들으며, 공작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조금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다.

‘난 네가 공작 작위를 잇는 데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 대화를 되새긴 자카리는 스스로 가 원망스러워졌다. 당시의 그는 ‘공작의 몸이 괜찮으며, 안정적으로 작위를 승계할 것이다’라고 해석했었다. 하지만 실제 공작의 상태는 무척 좋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작은 주인님.”

주치의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죄를 표했다.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주치의의 탓은 아니 지.”

자카리는 혼란스러워졌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껏 아버지를 증오해 왔는데, 증오를 끝까지 가져 가려 했는데.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이다. 그 사실이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주치의와의 만남을 떠올리던 자카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입술을 깨문 그가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

언제까지나 대화를 미룰 수는 없었다. 공작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더더욱.

자카리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공작과 미뤄 뒀던 대화를 나눌 시간이었다.

 그 시각, 이엘리는 집사와 함께 마주 앉아 있었다. 집사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다 함께 차를 한번 마시고 싶은데요.”

“다 함께요? 티파티 준비를 하면 됩니까? 손님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집사는 전문가다운 태도로 이엘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엘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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