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화
“……정확히는 생크림 장식만 내가 했어.”
자카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카리의 눈치를 슬며시 살피던 이엘리는 황급히 설명을 했다.
“처음엔 내가 구워 보려고 했는데, 자꾸만 반죽이 제멋대로 부풀더라고. 그래서……”
“네가 해 준 건 무엇이든지 다 좋아. 정말 고마워.”
중언부언 변명을 하는 그녀에게 자카리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 그럼 얼른 소원 빌고 초도 꺼. 촛농 떨어지겠다.”
“아, 그래. 소원.”
자카리는 두 눈을 내리깐 채로, 양 손을 모아 빌었다. 사실 자카리의 소원은 언제나 하나였다.
‘이엘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이엘리를 생각할 때면, 얄팍한 기원에 의지할 정도로 절박해지곤 한다. 후우, 자카리는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짝짝짝 박수를 쳐 준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조그만 선물 상자를 건넸 다.
“이게 뭐야?”
“한번 풀어 봐.”
이엘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물 상자를 열어 보았다.
“이건……”?”
자카리는 선물 상자 안의 팔찌를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비단실과 보 석을 엮어 만든 팔찌였다.
“그거, 소원 팔찌야. 이거랑 똑같은 거.”
이엘리는 제 손을 들어 자카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 위, 선물 상자에 들어있은 팔찌와
똑같은 모양의 실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실의 색상과 보석의 종류만이 다르다.
“그것도 내가 직접 만든 건데…… 솔직히 좀, 모양이 안 예쁘긴 하지만.”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뭐든지 잘하는 이엘리였지만, 이 팔찌를 만드는 것만큼은 조금 서툴렀다.
“그,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고.”
“의미?”
“응. 이 팔찌를 서로 나눠 착용했다가, 1년 후 함께 끊으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대.”
이엘리의 설명을 들은 자카리는 문 득 손안에 들린 선물 상자를 내려다 보았다.
자카리의 눈동자 색을 맞췄는지, 새끼손톱만 한 사파이어 조각들이 하얀 비단실 사이로 우아하게 반짝였다.
“……영원한 행복.”
자카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새삼스레 피부에 와닿았다. 그녀는 고개를 쏙 내밀었다.
“뭐어,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긴 하지만.”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가 팔을 들었다.
“팔찌, 네가 매 줄래?”
“아, 그러지 뭐.”
이엘리는 고개를 숙여 자카리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팔찌의 끈을 매는 이엘리의 모습을 자카리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팔찌의 매듭을 지어 준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카리, 마지막 선물이 하나 더 남았어.”
“마지막 선물?”
지금만으로도 충분한데, 더 있다고?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가 소곤거렸다.
“응. 그런데 이 선물은 네가 눈을 감아야 줄 수 있거든.”
“알았어.
자카리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보고 있자면 그는 말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
이엘리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이엘리가 오늘 자카리에게 하려고 하는 건 일종의 신체 접촉이었다.
‘내, 내가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긴 했는데…… 실제 하려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엘리는 지금껏 자카리를 남자라기보다는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심장이 뛰는 건 지.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그에게 심장 소리가 들릴까 두려울 정도다. 이엘리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각 같아.’
은빛 설원처럼 반짝거리는 긴 속눈썹이 하얀 얼굴 위로 우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길게 뻗은 목과 조막만 한 얼굴.
조화롭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처 음 봤을 때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엘리는 자꾸만 제 눈이 자카리의 입술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아, 내 가 미쳤나 봐.
이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성년이 된 연인이나 약혼자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성인식의 오래된 풍습 중 하나였다.
그래서 최대한 담백하게 하려 했는데…… 오히려 심장 떨려 죽겠다. 결국 울상이 된 그녀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타협했다.
쪽. 순간 자카리의 두 눈이 반짝 뜨였다.
“이, 이엔……”?!”
“뭐 어때, 우리 부부잖아.”
이엘리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지만 실제로 뺨이 달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자카리는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그게, 나는, 아, 그러니까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이엘리가 먼저 이런 종류의 신체 접촉을 한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자카리가 먼저였고, 이엘리는 받아주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저기, 자카리?”
세상에, 너무 부끄러운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엘리를 그가 와락 끌어안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 어.”
“자, 잠깐만. 이것 좀 놓고……”
“정말 고맙고, 기쁘고, 행복해 서……”
자카리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품에서 벗어 나려던 이엘리는 문득 멈칫했다. 굳이 벗어날 필요는 없잖아? 그녀는 대신 다정한 태도로 자카리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 울보, 울지 마.”
“……안 울었어.”
“거짓말. 너 지금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는 거 알아?”
쿡쿡 웃음을 터뜨린 이엘리는 자카리의 눈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자카리는 다시 이엘리를 끌어안고는 그 어깨에 고개를 푹 묻었다.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제발…… 이런 시간이 영원히 계 속됐으면 좋겠어.”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자카리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카리의 등을 도닥이며 답했다.
“음, 자카리. 너 혹시 날 떠날 생각이야?”
“아니. 그럴 리가……!”
“그럼 뭐가 문제야?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건데.”
다정한 목소리다. 그는 왈칵 감정이 치솟는 걸 느꼈다. 그는 이엘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렇게 공작 성에 평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주문한 화구들을 받은 이엘리는, 오랜만에 휴식 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천과 사과, 바구니 따위를 그리는데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엘리.”
“아, 공작님.”
어느새 그녀의 등 뒤로 공작이 서 있었다. 그녀의 그림을 지켜보던 공작이 여상하게 말했다.
“그림 솜씨가 썩 나쁘지 않구나.”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성인식을 주최하는 솜씨는 굉장히 훌륭했지.”
짧게 인사를 남긴 공작이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쌩하니 곁을 지나가기는 커녕,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 모습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수고했다. 헤센바이츠의 이름에 무척 잘 어울리는 연회였어.”
그렇게 인사를 남긴 공작은 금방 자리를 뜨려 했다.
마치 자신이 한 말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미세하게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엘리는 황급히 공작을 붙들었다.
“저, 공작님.”
“뭐지?”
공작이 힐끗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혈색을 살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지.”
잠시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던 공작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엘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 정말 다행이예요.”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공작은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햇볕이 따스 하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6. 차 한 잔의 시간
이엘리는 오랜만에 재단사를 불렀 다. 자카리가 선물해 준 은여우 모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재단사는 은여우 모피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떴다.
“가죽이 전혀 상하지도 않은 데다 가, 이 광채며 윤기까지. 최고급품이네요."
“그렇게 좋은 건가?”
물론 엄청나게 예쁜 가죽이긴 하지만. 가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요. 제도에서 이 가죽을 구매하려면 못해도 1000 르뎀은 줘야 할걸요.”
이엘리는 저도 몰래 짧은 헛숨을 삼켰다. 르뎀은 제국 내 금화의 단 위로써, 약 10르뎀이 평민 가족의 1 달 생활비였다. 참고로 자작 가는 한창 가난했던 시절, 5르템까지 조인 전적이 있었다.
‘그럼 이 가죽 하나가 우리 집이 가난했을 때, 약 17년 치 생활비가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피를 과연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고뇌하게 됐다. 재단사가 설명했다.
“그나마도 황가가 아닌 다른 귀족 들은 이런 가죽을 접할 기회조차 없을 거예요.”
“그, 그런 거야?”
이엘리의 눈동자가 고속으로 진동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메리가 생글 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 은여우 모피, 아가씨께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아니예요, 진심인걸요.”
메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답했다. 이엘리는 메리를 포함한 공작 성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
다. 처음에는 그녀의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가씨’라고 부르고는 했었지만.
‘이제는 다들, 애정을 담아서 '아가씨’라고 불러 주는걸.’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외부에서는 철저하게 ‘레이디 헤센바이츠’라 불렸고, 그리고 안에서는 친근감을 담아 ‘아가씨’라 불렸다.
공작 성 사람들의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에게 메리가 말했다.
“목도리로 만드시는 건 어떨까요?”
“목도리?”
“네. 가죽이 하나도 상한 부분이 없잖아요. 이렇게 매끄러운데……”
여우 모피를 요모조모 살펴보던 메 리가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는다.
“제 생각이지만, 이 모피는 통으로 사용해서 목도리로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흠……”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잘라서 장식 같은 데에 쓰기에는 아까우니까요.”
재단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어차피 난 잘 모르니까. 이엘리는 선선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자세한 디자인은 제도에서도 샘플을 가져온 이후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좋아.”
하녀들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조심 스러운 손길로 모피며, 늘어놓은 보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엘리는 잠시 움직이는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자카리의 성인식을 치르며, 공작 성의 사람들도 이엘리 못지않게 꽤나 고생했었다. 그럼에도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는 게 고마웠다.
‘어떻게든 이번에 고생한 것들을 보답해 주고 싶은데.’
그녀는 물끄러미 하녀들을 응시했다. 정돈을 끝낸 하녀들이 질서정연하게 밖으로 빠져나간다.
“……씨.”
“아가씨!”
“아, 응?”
때마침,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 짝 놀란 이엘리가 고개를 돌렸다. 메리가 의아하게 질문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음, 그게……”
이엘리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공작 성의 사람들에게 이번 일의 감사 인사와 소정의 보답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 이 안 잡힌다.
그래도 여러 경험을 미루어 보아.
‘성과급이라도 주는 게 나을까?’
전생에 자본주의에 찌든 삶을 살았던 그녀였다. 일주일간 야근을 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긴, 돈으로 주는 게 제일 낫지. 상사랑 밥 먹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데.’
고생한 팀원들을 위한 회식이랍시 고 상사의 비위를 맞춰 주며 술잔을 비워야 했던 삶.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도 그럴 테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운을 됐다.
“저기, 이번에 공작 성 사람들이 다들 고생했잖아.”
“네? 고생이라뇨?”
“로렌 백작 부인도 성가시게 굴고, 귀빈들을 맞아 접대하느라 일이 많았으니까.”
그 말에 메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새삼스러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휘하의 고용인 들을 물건처럼 대했다. 고생이라니. 이런 배려 자체가 생경하다.
‘로렌 백작 부인만 해도 아무렇지 도 않게 뺨을 올려붙이곤 했는데.’
이엘리는 단 한 번도 고용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공작 성의 분위기가, 이엘리를 통해 훨씬 부드러워졌다.
예전보다는 지금이 일하는 것 자체는 훨씬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