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화
‘그러고 보니 성인식이 지나면…… 자카리는 정말로 스무 살이야.’
내일이 지나면 자카리는 온전한 성인이 된다.
그 말은 곧, 자카리가 공작 작위를 이을 자격을 갖춘다는 뜻이다. 그
어렸던 소년이 이렇게 자랐나. 이엘리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버렸다.
“이엔?”
“으, 응?”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니, 계속 바라보고 있기에. 뭔가 할 말이 있나 했지.”
“아, 아냐. 그런 거.”
“아니면 됐고.”
이엘리는 서랍장에 숨겨 둔 자카리의 선물을 떠올렸다.
성년이 되는 이번 생일은 특별하게 챙겨 주고 싶었던 게 그녀의 속마음 이었다. 그래서 서툰 솜씨로 직접 만들어 놓긴 했지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 솜씨가 워낙 조악해서 말이지. 자신이 없던 그녀는 어색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럼 이만 들어가, 이엔.”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방문이 코앞이었다. 그녀를 보는 자카리의 눈동자가 장난이기가 가득 담긴 채 반짝였다.
“참, 잘 자라는 인사를 해야지.”
“응?”
“잠깐만 있어 봐.”
허리를 숙인 자카리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부 드립게 눈을 휘며 인사를 건넨다.
“좋은 꿈꾸고, 내일 보자.”
“으, 응. 너도……”
평소에도 가끔씩 하는 인사의 의미를 담은 가벼운 키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언제 저렇게 능글맞아졌담. 그렇게 생각하며 이엘리는 문고리를 쥐었다.
“……잘 자.”
조그맣게 인사를 건넨 그녀가 방문을 닫았다. 자카리는 닫힌 방문을 오래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 밤 있었던 일들, 모두 꿈이 아닐까.’
이엘리의 가족들에게 인정받았고,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말도 들었다. 자카리의 뺨이 훅 달아올랐다.
손을 들어 양 뺨을 세게 문지르던 자카리가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아, 미치겠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자카리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는 행 복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튿날 아침. 이엘리는 아침 일찍부터 자카리의 침실을 찾았다.
오늘은 무려 은의 홀에서 진행되는 성인식 행사 당일이었다. 자카리의 의복은 미리 세심하게 정돈해 두기는 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자카리가 옷을 차려입 은 모습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걸.’
이엘리는 자카리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하인의 도움을 받았는이지, 자카리는 의복 자체는 말쑥하 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엘리는 매의 눈으로 옷매무새의 흠을 찾았다.
“가만히 좀 있어 봐. 크라바트는 이렇게 매는 게 아니란 말이야.”
두 눈을 가늘게 뜬 이엘리가 남편의 크라바트를 손가락질했다. 크라 바트가 삐뚤어져 있었다.
“몇 번이나 크라바트 매는 방법을 알려 줬는데, 넌 왜 매번 모양을 이상하게 잡는 거야?”
이엘리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자카리를 을러댔다. 자카리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실은 그는 크라바트 매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엘리가 그의 옷매무새를 살필 때마다, 매번 잔소리를 하면서도 새로 매 주는 것이 좋아 실수하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뭐, 이런 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자카리는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카리의 속내 따위는 전혀 모르는 이엘리는, 한숨을 푹 내쉰 채 종종 걸음으로 자카리 앞에 다가왔다.
손을 뻗어 자카리의 크라바트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녀의 손에서 크라바트는 단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음, 좋아. 내 남편 잘생겼다.”
흐뭇하게 말한 이엘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카리의 모습을 감상 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성인식 예복. 금실로 섬세한 수를 놓은 군 청색 의복은 청년에게 굉장히 잘 어 울렸다.
“가자.”
“그, 그래.”
잘생겼다, 라는 말 한 마디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힌 자카리였다. 이엘리의 말에 퍼뜩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느난 얼굴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바라본 후 당연한 동작으로 손을 내민다.
“손. ”
자카리는 마치 강아지처럼 답삭 손을 잡았다. 속으로 쿡쿡 웃으며 이엘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카리의 성인식을 맞이하여 은의 홀로 입장하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은의 홀은 전대 공작 부인이 죽음을 맞이한 이래,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이엘리
가 소곤거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아, 응. 이엘리…… 정말 고생했겠 구나.”
자카리는 멍하니 은의 홀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당당하게 답했다.
“그럼,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꾸몄다고.”
실제로 귀빈들을 접대하는 곳은 에메랄드 홀이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자카리가 실제로 성인식을 치르는
은의 홀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황족까지 오는 자리니, 꿇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아 참, 자카리?”
막 은의 홀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이엘리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생일 축하해.”
“……아.”
자카리는 살짝 뺨을 붉혔다. 성인 식을 준비하는 것 때문에 워낙 바빠서, 성인식이 제 생일이라는 사실 자체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도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해 줄 줄은.
“이따 단둘이서 생일을 축하하도록 하자. 알겠지?”
여상하게 건넨 말 한 마디에 자카리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해 버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엘리는 한숨을 쉬며 그의 얼굴에 한참 동안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자카리가 간신히 멀쩡한 얼굴이 되 어 은의 홀로 들어갔을 땐, 입장 시 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춘 시점이었다.
성인식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는 사실 간단하다.
성인식을 치르는 주인공에게 귀빈들이 축사를 남기고, 머리 위에 축 복의 의미를 담아 성수를 튕긴다. 가장 먼저 축사를 한 이는 공작이었다.
‘다행이야, 오늘 안색은 나쁘지 않으시네.’
이엘리는 공작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푹 쉰 덕분인지 공작의 얼굴 에는 혈색이 돌았다. 공작은 제 옆 에 놓인 성수가 담긴 수반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들의 머리에 성수를 튕긴다.
“헤센바이츠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공작이 되도록.”
그 축사의 의미는 명확했다. 자신의 후계는 오로지 자카리뿐이라는 것을 공고히 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자카리는 깊이 고개를 숙여 공작의 축사를 받아들였다.
황태자는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공작과 자카리는 지금 성인식의 형태를 빌어, 황태자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헤센바이츠의 작위 승계에 간섭하지 말라 이건가.’
황태자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다음으로 축사를 건네는 이는 바로 황태자였다.
그는 성수가 담긴 수반에 손가락을 담갔고, 고개 숙인 자카리의 머리에 성수를 튕기며 말을 이었다.
“황가의 첫째가는 오른팔이 되길.”
“……”
자카리는 서늘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빙하 같은 눈동자가 황태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보았다.
“과분하신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위대한 황가의 벗으로도 족합니다.”
자카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비록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자카리의 말은 한 가지 뜻을 품고 있었다. ‘오른팔’은 신하의 위치일 수밖에 없지만, ‘벗’은 황가와 동등한 위치를 갖고 있다.
‘공작가를 당신네들의 발밑에 넣을 생각은 하지 마라.’
자카리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황태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지만.
자카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황녀의 앞에 다가섰다. 황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아내분과 행복하시길.”
이런 자리에서 선택할 법한 무난한 축사다. 귀족들은 훈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망할 계집.’
황태자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황태자가 이엘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황녀는 알고 있음에도, 황녀는 일부 러 그런 축사를 택한 것이다. 따끔따끔한 시선에 황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이채 서린 시선으로 황녀를 바라보던 자카리는, 황태자와 다르게 정중 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엘리가 기댈 수 있는 훌륭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자작 부부는 그런 축사를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향해 밝게 미소했다.
“앞으로도 잘 지내자.”
“응.”
이엘리의 말 한 마디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로써 자카리 헤센바이츠가 성인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장중한 축하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 데, 이엘리와 자카리는 서로를 가만 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 작았던 소년이 이렇게나 자랐구나. 이엘리는 감회에 차 자카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고했어.’
그런 의미였다. 그 뜻을 재빠르게 눈치챈 자카리가 눈웃음을 쳤다. 그렇게 성인식이 끝났다.
* * *
귀빈들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모두 각자의 영지로 귀환했다.
황족들은 가장 먼저 제도로 돌아갔다. 황태자가 남긴 마지막 미소가 어찌나 느글거렸는지, 이엘리는 표
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애써 야 했다. 귀빈들 사이에 그녀의 부모님도 끼어있었다. 이엘리는 제 부모님을 붙들었다.
“엄마, 아빠.”
“아, 이엔.”
자작 부부는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이엘리의 손을 꼭 마주 잡은 부부가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잘 있으렴. 몸조심하고.”
“조심히 가세요.”
손을 흔들어 보인 부모님이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는 왠지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이엔. 부모님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죄책감이 섞인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이엘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얘 또 왜 이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 어떤 삽질을 통해 자체적으로 자기 멘탈을 부수려고?
“응? 아니, 별로.”
“……그래?”
“그럼, 이제 여기가 내 집인걸.”
어깨를 으쏙이며 그렇게 대답하자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이미 결혼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 데, 아직도 저런 걱정을 하나.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꼭 붙든 채 빙그레 웃었다.
“참, 이제부터 우리 단둘이 생일을 축하해야지. 그렇지?”
“으응.”
그는 붉은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매번 수줍어하고 그러니? 그녀가 픽 웃었다.
이엘리는 눈을 가린 자카리와 함께 방에 돌아왔다.
타고난 전사의 감각이 있어서였는 지, 자카리는 이엘리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곧잘 앉았다. 눈을 가린 천
조각을 긁적이던 그가 물었다.
“이 눈가리개, 언제쯤 풀면 돼?”
“조금만 기다려.”
미리 숨겨 둔 선물과 케이크를 꺼낸다. 그녀가 직접 만든 선물은 왜 이렇게 초라해 보이는지.
‘자카리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사실 그는 이엘리가 하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 줄 것이다.
그래도 단순히 ‘그녀가 선물해 줘 서’가 아니라, 실제로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이엘리는 선물
상자의 리본을 매만졌다.
“오전에는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 한 성인식이었지만.”
“이엔?”
“실은 오늘부터 너 스무 살이잖아. 특별한 날이니까 둘이서만 네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성냥을 들어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켰다.
암막 커튼을 쳐 어둡게 만든 방 안에서 주홍색 촛불이 별빛처럼 일렁거린다. 자카리의 눈가리개를 풀
어 준 그녀가 말했다.
“우리 귀여운 남편님, 스무 살 생일 축하해.”
“……”
자카리는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처럼 새하얀 생 크림을 바른 케이크 위로는, 빨간 딸기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자카리의 곁에 선 이엘리가 조잘조잘 말을 붙였다.
“이 케이크, 내가 직접 만든 거다?”
“진짜?”
그러면 아마 굉장히 달 테지. 그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애매한 표정 이 된 그녀가 실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