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화
느른한 눈동자가 조소를 가득 담고 백작 부인을 곁눈질했다. 자카리의 입술이 곱게 휘어졌다.
“이번 티타임의 주최는 숙모께서 먼저 조르셔서 성사된 거라고 했던 가요?”
“저는……!”
“됐습니다.”
손을 휘저어 백작 부인의 항변을 가로막은 자카리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어조로 말한다.
“숙모님의 변명은 지금까지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얹힐 것 같거든요.”
그렇게 말한 자카리는 홱 돌아섰 다. 분을 못 이겨 백작 부인의 어깨 가 부들부들 떨렸으나, 전여 신경 쓰지 않는다.
자카리의 시선은 이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른 사냥감들은 몰이꾼들에게 가 져오라고 했어. 너무 많아서.”
“아, 응……”
“하지만 이것만큼은 네게 직접 주 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은빛 여우를 내밀었다. 반지르르한 털이 우아하게 빛났다.
“……은여우?”
이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눈에 화살을 정확히 쏘아 맞혀, 가죽이 상하지 않은 은빛 모피가 황혼의 햇살 속에서 주홍색으로 반짝거린다.
자카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너 추위를 많이 타잖아. 은여 우 모피는 다른 모피들보다도 훨씬 더 따뜻하니까……”
이엘리는 손을 뻗어 여우의 털을 쓰다듬어 보았다. 보들보들한 감촉 이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정말 고마워, 자카리.”
뺨을 붉힌 이엘리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자카리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말로만?”
“그럼?”
이엘리가 미심쩍은 낯으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환히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저기,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기겁한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답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불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내 아내에게 상을 받겠다는데.”
“……”
“얼른 안아 줘, 응?”
결국 이엘리는 귀 뒤를 빨갛게 물 들이며 자카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자카리는 환하게 웃으며 이엘리를 꼭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사냥 숲을 헤치고 다녀서일까, 그의
품 안엔 차가운 감촉과 함께 눈 냄새가 났다.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폭 파묻은 채 이엘리는 작게 투덜거렸다.
“내가 못 살아, 정말.”
“그래도 이혼은 안 된다?”
장난스럽게 대답한 자카리가 이엘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자 리에 모인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소공작은 제 아내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길처럼 열렬한 감정이었다.
“……젠장.”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황태자는 한 껏 포옹하고 있는 자카리와 이엘리를 발견했다.
몰이꾼들이 힘겹게 끌고 오고 있는 자신의 사냥감이 더욱 초라하게 여 겨졌다. 황태자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렇게 사냥회의 밤이 저물었다. 내일 아침 성인식의 마지막 행사, ‘축복 의식’만 끝내면 모든 일정은 끝난다. 여성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남성들은 사교를 위해 응접실에 모여 포커를 치고 있었다. 공작 대신 자리를 차지한 자카리는 의자에 길게 늘어진 채로 얼굴을 문질렀 다.
‘이거 은근히 피곤하군.’
그렇다면 이번 성인식을 총괄하여 주관한 이엘리는 얼마나 더 피곤할 것인가.
자카리는 성인식이 끝나기만 하면 이엘리가 푹 쉴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다 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소공작님.”
“외숙부?”
자카리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비스듬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로렌 백작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만큼은 제가 한 말씀 올려야 겠습니다.”
“말씀이라니요?”
자카리는 고개를 꺾었다. 저 비장 한 표정 하며, 중언부언하는 말투까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까 사냥회에서 제 아내에게 하셨던 행동은 부적절하셨습니다.”
자카리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백작은 식은땀을 흘 리면서도 계속 지껄였다.
“아무리 레이디 헤센바이츠가 소중 하다고 하셔도, 제 아내는 소공작님의 숙모 아닙니까.”
그 말에 활기찼던 분위기가 순식간 에 얼어붙었다.
자카리는 더 말해 보라는 것처럼 두 눈을 느른하게 내리깔았다. 그리고 백작은 그 행동이 자카리가 제게 동조하는 것이라 착각해 버렸다.
“과한 행동이셨습니다. 아무리그래도 혈연이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저 멀리 황태자가 흥미진진한 얼굴로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황태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함인 가, 혹은 진심인가. 자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 은 말이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를 감싸기 위해, 혈연까지 무시하시는 건……”
“로렌 백작.”
“예?”
싸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로렌 백작은 얼어붙었다.
게다가 자카리는 그를 ‘외숙부’가 아닌 ‘로렌 백작’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는 것은 자카리는 지금 소공작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혈연이라니요, 참으로 우습군요.”
“……소, 소공작님!”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 그리 고 은통 헤센바이츠의 피를 이은 청년. 자카리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로렌 백작은 물론이고, 주변 귀족들까지도 얼어붙었다.
자카리의 전신에서 겨울의 냉기와 도 비슷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말 그대로, 손에 잡힐 것 같은 기 운이었다. 칼날처럼 벼려진 기운이 주변 귀족들의 목덜미를 콱 잡아 눌 렸다.
만인을 완벽하게 찍어 누르는, 완벽한 살기.
“그 무례한 입, 당장이라도 찢어 버리고 싶지만.”
자카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하처럼 새파랗게 가라앉은 눈 동자가 백작을 쏘아본다.
백작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제대로 입 조차 열지 못했다.
잠시 후,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나마 백작이 내 어머니의 오라비였으니, 그것만큼은 참겠습니다.”
“헉, 어헉, 헉 소공작, 소공……!”
백작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한때 로렌 백작 부 인에게도 가감 없이 쏟아졌던 살기였다.
실제로 자카리는 제 분노를 한껏 억눌러 참고 있었다. 주먹을 꽉 말 아 쥔 그의 손등과 팔뚝에 새파랗게 핏줄이 도드라져 올랐다.
자카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사납게 미소 지은 그가 나지막이 빈정거린다.
“이엘리가 나의 혈연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라면.”
“수,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한번 제대로 따져 보도록 하죠. 로렌 백작 부인과 저는, 피 한 방울 조차 섞이지 않은 남 아닙니까?”
로렌 백작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희게 질렸다. 딸깍 딸깍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내뽐은 살기는 거둘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자카리는 비뚜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로렌 백작 부인은 로렌 백작, 당신의 아내일 뿐입니다.”
“헉, 억, 허억……!”
“그것보다 로렌 백작. 자꾸 그대가 내 외척임을 주장하여 특별 대우를 받길 바라는데.”
자카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진심으로 의아한 얼굴이 되어 로렌 백작에게 질문을 한다.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소공작님, 수, 숨을……”!"
“무엇보다 난 단 한 번도, 내 외가 가 날 그렇게 가치 있게 여겼노라 느낀 적이 없습니다.”
온기라고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새파란 눈동자. 자카리는 차분 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지금껏 해 왔던 건 그저 날 ‘쓸모 있는 만능 괴물’ 취급하는 것뿐이었는데요.”
“주,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무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외 척임을 내세워 헤센바이츠의 내정에 간섭하려 들다니.”
호흡이 막힌 로렌 백작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카리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렌 백작가는 꿈이 참 크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씩 웃었다. 감정이 말끔히 정리되어 싸늘한 미소. 그가 그대로 말을 맺는다.
“게다가 내 어머니께서는, 로렌 백작가에서도 행복했던 적은 전혀 없으신 것 같은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로렌 백작가는 애초부터 북부에서도 그 세력이 한 미한 가문이었다.
신분을 봤을 때 한참 아래인 툴란 남작가에게도 치이는 신세일 정도였다. 그런 로렌 백작가가 지금의 위 치를 갖게 된 이유는, 아름다운 딸을 헤센바이츠에게 팔아넘기듯이 결혼시켰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이 가문과의 혼사를 원한 적이 없었지.’
그럼에도 로렌 배작가는 약혼자와의 혼사까지 깨 가며 아델라이데를 공작에게 보냈다.
그 결과, 아델라이데는 천천히 시 들어가다가 괴물을 낳았다는 절망감에 빠진다. 그 이후의 결과는…….
‘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어머니의 죽음은, 우리 부자와 로렌 백작 가의 합작품 아닌가.’
짧게 조소한 자카리는 고개를 반듯하게 세웠다. 살기를 거두자, 백작이 헉헉거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은 채 기절
할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가 비명처럼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푹신한 카펫 위를 침과 눈물로 더럽히는 로렌 백작을, 자카리는 질색 하면서 내려다보았다.
“죽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자카리는 더러운 것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발자국을 뒤로 물린 다음, 곧장 말을 이었다.
“다만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모욕을 받은 건 내 아내입니다. 로렌 백작 부인이 아니지요.”
“저는, 저는……!”
“참고로 로렌 백작 부인이 내 장모님에게 무례한 언사를 지껄이는 걸 제가 직접 봤으니.”
짙푸른 눈동자가 로렌 백작을 내려 다보았다. 백작은 고개조차 들지 못 하고 덜덜 몸을 떨었다.
“다시는 내 아내와 아내의 가족들 에게 모욕을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소, 소공작님……!”
백작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떨 어뜨렸다. 자카리는 침착한 어조로 백작에게 못을 박았다.
“특히 이엘리에 대한 모욕은, 저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그는 미간을 좁혔다. 사위는 고요 했고, 백작이 헐떡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대답.”
“아,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작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대답을 들은 자카리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주변을 보았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황태자도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북부의 귀족인 것으로 압니다.”
자카리의 말에 귀족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황태자는 불쾌한 얼굴이었으나, 지금 일은 로렌 백작의 과도 한 인정 욕구에 따른 불상사에 가까웠다.
여기서 자신이 끼어들면 모양이 이상해 진다.
“가끔 북부의 군주가 누구인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사람이 나 오는데.”
자카리는 눈동자를 굴려 로렌 백작을 돌아보았다. 명백히 로렌 백작을 예시로 드는 행동이었다.
“처신을 확실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경고였다. 황태자가 있는 자 리에서, 북부의 군주는 명백히 헤센바이츠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이 헬쑥해졌다. 하지 만 황태자가 트집을 잡을 만한 언사는 전혀 없었다.
‘헤센바이츠 소공…… 일부러 원론적인 말만을 지껄인 거겠지.’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카리가 한 말은 ‘북부의 군주는 헤센바 이츠’라는 것뿐이었다.
그 말은 즉, 황가의 명예를 운운하여 트집을 잡을 여지가 없다는 것이 다. 자카리가 빙긋 웃었다.
“그럼 전 조금 피곤하여, 먼저 들 어가 보겠습니다.”
“드, 들어가십시오.”
“좋은 밤 되십시오, 소공작님.”
사람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자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로렌 백작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자카리는, 마지막으로 황태자를 일별했다.
달칵,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충동적으로 이엘리의 방부터 찾았다. 이상하게 이엘리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에 없었다. 대신 방 정리를 하던 메리가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아가씨께서는 부모님의 방에 가 계세요.”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인 자카리는 곧장 별채의 손님방으로 향했다. 자작 부부가 묵는 손님방의 위치는 그도 알고 있었다. 자작 부부는 황족에게 준 방 과 동급의, 가장 좋은 손님방에서 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