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화
“아뇨, 우습지 않아요.”
쓰디쓴 목소리를 듣던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황녀의 귀를 두드렸다.
“오히려 무척 힘드셨을 거라 생각 됩니다.”
담백한 목소리에 황녀는 순간 말문 이 막혔다.
“……”
이엘리는 묘하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랬기에 소공작도 이엘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이엘리는 태연한 목소리로 황녀를 향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내내 궁금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보다 아까 '아샤의 축복’이라 고 말씀하셨는데…… 그 힘은 어떤 힘인가요?”
“아, 그거요.”
은근슬쩍 이엘리는 자신의 호기심을 채웠다. 황녀는 관대하게 그녀의 호기심을 채워 주었다.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예요.”
“매혹이라니 요?”
“그게, 오라버니께서 그 힘을 발휘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라버니께 마음을 빼앗겨요.”
이엘리는 잔뜩 미간을 구겼다. 마음을 빼앗긴다, 라. 그에게는 지나치 게 과분한 능력 아닌가.
“물론 아예 상대를 조종하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그렇다면……”
“보통은 상대방의 호의를 이끌어 내는 정도에서 그쳐요.”
그렇게 말한 황녀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며 황녀가 말을 이었다.
“물론 유혹에 약한 사람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은 아예 홀린다고도 하 지만요.”
유혹에 약한 사람이라. 이엘리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황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대신 심력을 많이 소모하기에, 웬 만해서는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 들었어요. 아 참.”
곰곰이 머릿속을 헤집던 황녀가 뭔 가 알아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황녀가 어깨를 으쏙였다.
“그래도 헤센바이츠의 직계 혈통은 그 힘에서 자유롭다고 하더군요.”
“헤센바이츠의 직계 혈통이라면..”
“아마 공작님이나 소공이겠죠?”
이엘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건국 전설에서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두 가문 다웠다.
“그런데 레이디 헤센바이츠는 괜찮으신가요?”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황녀가 문득 걱정스레 질문을 해서,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황녀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좀 면구 하긴 하지만…… 레이디께서도 아실 거라 믿어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제 오라버니께서는 레이디를 갖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짓이든지 감행 할지도 몰라요.”
그 말에 이엘리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사실,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황태자의 그 비뚤어
진 욕망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리고 그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될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황녀 가 말했다.
“전 사실 오라버니께서 레이디께 ‘아샤의 축복’을 사용하시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어요.”
“음…… “
그녀는 눈동자를 굴렸다. 만약 황태자가 제게 그 힘을 사용했다면 뭔 가 달라진 게 있을 텐데.
“아까 말씀하시기로, 아샤의 축복은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라고 하셨지요.”
“그랬지요.”
“그렇다면 아마 제게 그 힘을 사용 하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엘리는 생긋 웃었다. 황녀는 의아한 낯을 했다. 이엘리는 당연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전 황태자 전하께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황태자는 싫은 편에 가깝 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충고 감사합니다, 전하.”
이엘리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런 충고를 해 주는 것 자체가, 서출인 황녀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가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고개를 끄덕인 황녀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음…… 이제 시간이 얼추 다 됐네요. 사냥을 나간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예요.”
그렇게 말한 황녀가 짓궂게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꽤나 살가 운 태도로 이엘리에게 말한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예, 전하.”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기 대를 하고 따라온 건 아닌데,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아샤의 축복’이 누군가를 유혹하는 힘이었다니. 황태자가 왜 그리 자신만만했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어느새 황혼이 만물을 부드럽게 덮어 내렸다.
이엘리와 황녀가 돌아왔을 때쯤엔 사냥회는 이제 거의 끝나 있었다. 각자 사냥감을 얻은 기사들이며 귀 족들이 하나둘씩 귀환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너무 늦지 않게 돌아 온 것 같아요.”
황녀가 낮게 소곤거렸다. 가볍게 한쪽 눈을 감아 보인 황녀가 이엘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다면 레이디 헤센바이츠는 소공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이만 찢어지도록 하죠.”
“아, 배려 감사합니다.”
“아니예요. 오늘 굉장히 즐거웠어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인 황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엘리는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자카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자카리가 타고 갔던 덩치 큰 흑마는 보이지 않는다. 빨리 보고 싶다. 생각하던 이엘리는 문득 주변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인지했다.
뭐지? 상황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 이 한쪽에 고정되었다.
“굉장히 운이 좋으세요.”
“로, 로렌 백작 부인.”
“미천한 신분의 따님을 공작가의 차기 안주인으로 들여보내시다니, 수완이 대단하세요.”
또 어느 불쌍한 귀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나, 생각하던 이엘리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나요, 블랑쳇 자작 부인?”
로렌 백작 부인이 한껏 빈정거리며 괴롭히는 상대는 바로, 이엘리의 어머니인 블랑쳇 자작 부인이었다.
이엘리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고 함을 내질렀다.
“로렌 백작 부인, 당장 그 입 다물 지 못해요!?”
“레, 레이디 헤센바이츠?”
깜짝 놀란 로렌 백작 부인이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내내 어깨를 움츠리며 백작 부인의 말을 듣던 자작 부인이 황급히 손을 흔들어 댔다.
자신은 괜찮다는 뜻이다.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나 때문에, 우리 엄마는 제대로 반박도 못 하고……!’
로렌 백작 부인은 공작가의 외척이자, 황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엘리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려워하여, 블랑쳇 자작 부인은 백작 부인의 모욕적인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바로 그것을 노려 자작 부인에게 실컷 화풀이를 한 거였다.
'감히 저 망할 여자가 우리 엄마한 테!’
이엘리는 입술을 세게 당겨 물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서 이엘리는 재차 언성을 높였다.
“저를 모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제 어머니께도 모욕적으로 행동하시나요?”
“이, 이엔.”
자작 부인이 어쩔 줄 몰라 딸의 팔을 붙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작 부인이 모른 척 발뺌했다.
“……저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 입니다만.”
“아하, 사실요? 그렇다면 저도 지금부터 사실만을 말씀드리도록 하지 요.”
이엘리는 차갑게 빈정거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경멸의 빛을 가득 담고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황녀 전하를 모시고 싶다 계속 고 집을 부리셨죠.”
“그건……!”
“그래서 전, 원칙대로면 제가 진행 해야 하는 티타임 자리를 양보해 드렸어요.”
“오해예요! 전 그냥, 레이디께서 아직 티파티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잘 모르실 거라 생각해서!”
백작 부인은 제가 피해자인 척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이엘리는 어이가 없었이다. 이번 주최 문제는 황가의 면을 봐서 이엘리가 양보한 거임에도, 배려한 척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런가요? 참으로 훌륭한 배려네요.”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을 쏘아붙였다. 화가 나니까 오히려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하지만 저를 배려하기 위해, 부인도 잘 하지 못하는 일을 억지로 떠 맡으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 절 바보 취급하시는 건가 요?”
제가 저지른 일은 모조리 잊어버린 양, 로렌 백작 부인은 왈칵 성을 냈다.
슬슬 황태자가 귀환할 시간임을 계 산하여 항변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황태자는 제 편을 들어주리라는 속 내였다.
“바보 취급이 아니라, 실제로 좀 모자라시잖아요?”
하지만 이엘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로렌 백작 부인의 얼굴 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백작 부인에게 능력이 있으셔서, 절 배려하여 주최를 맡았다는 식으로 말하고 계신데.”
“레, 레이디 헤센바이츠!”
“아까 전만 해도, 백작 부인께서는 황녀 전하께 실수를 저지르셨잖아요?”
이엘리는 고개를 비스듬히 꼬았다.
연녹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더하여, 지금은 제 어머니께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저는 그저……!”
로렌 백작 부인이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엘리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런데 그때.
“숙모님. 언제쯤 제 아내에게 제대로 된 예의를 갖추실 생각이십니까?”
얼음장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흠칫 놀란 로렌 백작 부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황태자가 제 편을 들어주기 전, 소공작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자카리?”
이엘리가 자카리를 멍하니 불렀다.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 은 없었는데.
이엘리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자카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이엘리에게
다가섰다.
“오늘도 고생하고 있네, 내 아내는. ”
그렇게 속삭인 자카리가 허리를 숙여 이엘리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이엘리는 질문을 던졌다.
“벌써 왔어?”
“응. 네가 보고 싶어서.”
“……”
저기, 그 말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하기는 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엘리는 그 질문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 자카리는 몸을 돌려 백작 부인을 노려보더니, 빙긋 웃었다.
“숙모님께서는 언제나 북부의 안주 인에게 오만불손한 행동을 보이시는 군요.”
“조, 조카님……!”
어떻게든 자카리의 기세를 누그러 뜨려 보려 백작 부인은 일부러 조카 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무슨 조카님입니까? 평소처럼 소공작이라고 부르십시오.”
하지만 자카리는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대꾸할 뿐이었다.
로렌 백작 부인을 공작 성에 들여 보낸 것만 해도, 자카리는 자신이 황가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모두 지켰다고 여겼다.
“제 아내는 공작령, 나아가 북부의 모든 연회의 주인공이 될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소, 소공작님?”
“그런데 일부러 그 권리를 양보해 가면서, 백작 부인에게 티타임의 주최의 기회를 드렸지요.”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긋한 목소리 안쪽에는 불쾌감과 짜증이 스며들어있었다.
“그럼 주제를 알고 얌전히 계실 것 이지, 도대체 왜 자꾸 소란을 일으 키십니까?”
적당히 예의를 갖춰 돌려 말하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너 왜 자꾸 개념조차 없이 나대는 거냐?’라는 질문과 똑같았다.
자카리는 눈을 가늘게 치떴다. 그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잇는다.
“제 아내가 최대한 배려해 드렸으면 감사한 줄이나 알아야지……”
온기라고는 없는 새파란 시선이 백작 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내 픽 비웃음을 짓는다.
“숙모님께서는 어째 예전이나 지금 이나, 변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소, 소공작님.”
“삶의 지혜라는 것을 슬슬 갈고닦 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로렌 백작 부인이 생각이 짧다지만 이엘리와 자카리는 그 위 치부터가 달랐다.
이엘리는 고작 자작 영애 출신이지 만, 자카리는 차후 헤센바이츠 공작령을 상속받을 소공작이지 않나.
“게다가 제 장모님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시다니…… 생각이란 게 있으신 건지 의문입니다.”
장모님. 그 단어에 블랑쳇 자작 부 인이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이엘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장모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을 두 사람이 모를 리 없다.
자카리는 여기서, 이엘리와 블랑쳇 자작 부부가 완벽히 헤센바이츠의 일원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리 이엘리가 양보해 줬다 해도 덥석 받아들이다니.”
”……”
“때와 장소를 가리는 사양의 미덕을 좀 아셔야 할 것 같군요. 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