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96)

42 화

말랑말랑하게 변한 티타임의 분위 기에 모두가 즐거워했다.

‘도대체 이 분위기는 뭐야?’

하지만 언제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건 바로 로렌 백작 부인이었다. 백작

부인은 현재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번의 티타임에서 황녀 와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는데, 실상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은 도끼눈을 떴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째서……!’

딱 보기에도 황녀는 자신보다는 이엘리와 더 친분을 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대놓고 이엘리를 곁에 앉히는 것도 그렇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렇다. 분해 견딜 수 없었다.

‘북부에서 로렌 백작가만큼 황가와 친밀한 가문도 없는데!’

헤센바이츠 소공작의 외가, 전대 공작 부인의 친정. 그리고 공작가가 아닌 황가에 충성을 바친 가문. 그 럼에도 묘하게 찬밥 신세인 것 같은 느낌이다. 백작 부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하지만 황녀 전하를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선 황녀의 관심을 이쪽으로 끌어 야 했다. 백작 부인은 낭랑한 어조로 황녀에게 말을 걸었다.

“황녀 전하, 이 케이크를 드셔 보세요. 무척 맛있답니다.”

살가운 음성에 황녀가 살짝 시선을 돌렸다. 백작 부인의 말대로 케이크는 무척 맛있어 보였다.

“아, 고마워요.”

연한 갈색 크림을 우아하게 쌓아올린 케이크가 얼른 한입 먹어 달라 유혹한다. 황녀는 포크를 집어 들었

다. 케이크를 한 조각 커다랗게 잘 라 내며, 황녀는 크림의 정체에의 문을 품었다.

‘크림의 색이 특이하네. 이건 아마 도…… 커피 크림 같은 건가?’

황녀의 호의적인 분위기에 백작 부 인은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한편 이엘리는 황녀가 받은 케이크 접시를 바라보다 말고,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크림이 잔뜩 쌓여 있는 케이크.

하지만…….

‘어라, 저 케이크는?’

분명히 저건 땅콩 크림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였다.

주방장의 자신작이며, 이엘리도 상당히 좋아하는 간식이다. 하지만 여 기서는 등장해서는 안 될 음식이었다. 이엘리는 눈을 크게 치떴다.

‘황녀 전하는 분명 음식을 가리셔 야 한다고 했어.’

이번 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엘리는 황궁에 직접 귀빈들의 음식 취향이나 건강 상태에 대해 물어봤었다.

그 이후 받은 답변은 두 황족은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황녀는 땅콩에 과민 반응을 보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엘리는 그 사실을 백작 부인에게 도 전해 주었다.

‘내가 분명히 땅콩이 들어간 음식 은 모조리 제외하라고 했었는데?’

그 증거로 이엘리가 직접 주관했던 연회에는 땅콩이 들어간 음식은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설마, 내 조언은 싹 무시한 거야?’

이엘리는 홱 고개를 돌려 로렌 백 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황녀에게 케이크에 대한 맛을 칭찬할 뿐이었다. 호들갑스러운 어 조에 그녀는 미간을 구겼다.

“솔직히 북부는 제도만큼 음식의 질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건 먹을 만하답니다."

“로렌 백작 부인. 지금 말씀은 좀……”

황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이엘리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하나 백작 부인은 신이 나 있었다.

“어머나, 전 북부와 제도에 모두 방문해 봤으니까요. 그 경험에 따라 말씀드린 것 뿐이예요.”

게다가 깨알같이 공작 성의 음식까지 무시하는 그 행동까지. 이엘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녀 전하, 그 케이크는 드시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무례한 말씀이십니까?”

로렌 백작 부인이 이엘리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딴에는 황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 고, 그게 잘 먹히고 있는데 이엘리가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한 거였다. 백작 부인은 날을 세우며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케이크를 좋아하신 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방에 미리 말해 제작한 겁니다.”

백작 부인은 억울함이 가득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이엘리는 한심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백작 부인은, ‘황녀가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을 기억하여 티타임을 준비한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황녀의 건강을 먼 저 살피는 것 아닌가?’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한편, 백 작 부인은 거의 이엘리를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며 말했다.

“주방장이 최고의 정성을 쏟아 만 들어 낸 최고급 케이크인데!”

“압니다. 저도 그 케이크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연녹색 눈동자는 곧, 데구루루 굴러 케이크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케이크, 땅콩 크림이 들어있잖아요?”

“예? 땅콩 크림이 어때서요?”

백작 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분위 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땅콩 크림이라고요?”

황녀가 창백한 얼굴로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 게 뜨면서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땅콩에 대해 과민 반응이 있으시다고, 미리 말씀해 드렸잖아요?”

“네? 저, 저는 들은 적 없습니다!”

백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 발뺌을 했다. 하지만 이엘리는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 두었다.

“연회를 준비하면서 총 세 번 말씀 드렸습니다.”

“저,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처음 성인식을 총 기획하면서 한 번.”

그녀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백 작 부인의 얼굴이 핼쑥해졌지만,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백작 부인께서 티타임을 주최하시 기로 결정된 이후 메뉴를 선정할 때 두 번.”

“레, 레이디 헤센바이츠!”

“그리고 어제 오전, 마지막으로 전 체적인 과정을 살피면서 세 번입니다.”

이엘리가 차분하게 말을 맺었다. 백작 부인은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굴렸지만,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엘리의 말은 사실이었이기에 항변할 여지도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번 티타임은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랐는데.’

이엘리는 짧은 한숨을 삼켰다. 이엘리도 이런 식으로 백작 부인과 충 돌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도 계속 이렇게 대립각을 세우는 건, 이엘리 스스로에게도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너무 무신경하지 않나’

게다가 이건 미리 백작 부인과 선을 그어 두어야 할 문제였다. 아무리 실수라 한들, 백작 부인은 이엘리에게 주최 자리를 양보받은 위치였다. 잘못하면 공작가가 트집을 잡힐 문제가 되었다.

“백작 부인, 황녀 전하께 좋은 음식을 바치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

“그런 호의가 전하께 적절한지에 대해 먼저 고민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엘리는 더 매몰차게 말했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속, 그녀의 목소리만이 쟁쟁했다.

“적어도 티파티의 주최이시면, 귀빈께서 가리셔야 하는 음식은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구구절절 옳은 지적에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인 이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의 사과는 황녀에게 한정되어있었다. 포크를 내려놓 은 황녀가 말을 이었다.

“저뿐 아니라 레이디 헤센바이츠에게도 사과해야 할 문제 같은데요.”

“예?”

백작 부인은 황망한 얼굴을 했지 만, 황녀는 백작 부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황녀가 말했다.

“로렌 백작 부인의 실수 때문에, 황가와 공작가가 서로 얼굴을 붉힐 뻔하지 않았습니까.”

“화, 황녀 전하!”

“큰 민폐를 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러니 당연히 사과해야지요.”

백작 부인은 식은땀을 홀리며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변의 분 위기는 백작 부인에게 전혀 호의적 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이엘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좋아요. 이번 건은 황녀 전하의 얼굴을 보아 눈감아 드리죠.”

“……”

그 말에 백작 부인의 얼굴이 처참 하게 일그러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황녀가 말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잠시 저와 함께 이 근처를 거닐지 않겠어요?”

“따르겠습니다, 황녀 전하.”

잠시 황녀의 표정을 살펴보던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고귀한 여인들이 자리를 비우자,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귀부인들은 밝은 목소리로, 서로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황녀께서도 너무하시지, 계속 저 어린 계집아이만 감싸고 계시잖아!’

백작 부인은 이를 갈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저를 마주 보는 어린 여자 아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당했으면서도, 부인은 아직도 그녀를 꺾어 놓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백작 부인의 눈에 마침 좋은 대상이 보였다. 그 대상은 바로, 블랑쳇 자작 부인이었다.

* * *

사냥 숲 근처에는 레이디들이 짧게 산책할 수 있도록 산책로를 마련해 두었다.

아직 소녀에 가까운 두 아가씨는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짧게 한숨을 내쉬며 황녀가 입을 열었다.

“로렌 백작 부인은 레이디에게 상당히 무례하게 행동하시네요.”

“괜찮습니다. 사실 백작 부인이 그렇게 행동하실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거든요.”

이엘리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백작 부인이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라 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무려 황가를 뒷배로 둔 데다가, 어쨌든 명목상 자카리의 숙모 아닌가.

“그래도 죄송해요. 아마 백작 부인은 황가를 믿기에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일 테니까요.”

황녀는 진심을 섞어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엘리는 이채 섞인 눈동자 로 황녀를 돌아보았다.

‘황녀 전하 스스로, 로렌 백작가가 황가를 믿고 있다고 이야기하다니.’

황녀의 입으로 로렌 백작가와 황가의 연계를 증명해 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건 황녀가 이엘리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 준 거였다. 그때 황녀가 이엘리를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했다.

“아마 레이디 헤센바이츠도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이겠지만……”

말갛게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빛을 머금은 짙은 회색 눈동자가 이엘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께서는 로렌 백작가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공작가에 간 섭하고 싶어 하시죠.”

그런 말을 어째서 내게? 이엘리는 황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황녀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실은 그것 때문에 로렌 백작 부인 이 계속 제게 친한 척 행동해서, 저도 좀 불편하거든요.”

불편하다, 라. 황가가 북부에 심어 둔 가문의 안주인을 앞에 두고 평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레이디 헤센바이츠 에게 산책을 나오자고 제안한 거예 요.”

황녀는 사박사박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엘리는 불쑥 질문을 했다.

“황녀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그리 친밀하지 않으신가요?”

“레이디가 보시기에는 어때 보이시 나요?”

황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되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엘리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대답을 원하여 물은 건 아니었는지, 황녀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실의 적자이자, ‘아샤의 축복’까지 타고 난 오라버니께서는 절 마땅잖게 생각하실 법하죠.”

“……”

“저는 하잘것없는 서녀예요. 그나마도 제 어머님께서는 황제 폐하의 시녀였고요.”

이엘리는 잠시 침묵했다. 안네로제는 황제가 침수 시녀를 안아 태어났다.

그나마도 황녀의 어머니는 오래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들었다. 아마 소문으로는, 황태자에 의해 살해당 했다고.

“황가의 여자들이란, 그나마도 서출이란…… 결혼 동맹으로밖에 사용 할 수 없는 존재죠.”

“황녀 전하.”

“하지만 정말로 제 쓸모란, 결혼 동맹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황녀는 고집스럽게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더니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말을 이었다.

“가끔은 제가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 말하는 황녀의 목소리는 가늘 게 떨리고 있었다.

피를 나눈 이복 오라비에게 어머니를 잃고, 그나마 황녀를 귀애하던 황제는 병석에 누운 지 오래다. 기댈 곳이 없다. 황녀가 말했다.

“왜 레이디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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