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화
황태자는 순간 패배감에 가득 찬 낯을 했다.
은여우는 북부에서도 일부 지역에 서만 나는 특산품으로,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값비싼 모피였다. 황태자도 내심 노렸던 사냥감이기도 했다.
‘젠장.’
특히 헤센바이츠가 은여우 모피는 외부 반출을 엄격히 제한했기에, 황가에서도 보통 황후만이 은여우 모 피를 소유할 수 있었다. 드물게는 황제에게 총애받는 황녀나 황자만이 하사받았다.
‘그런 은여우 모피를…… 저렇게 쉽게 얻어 간다고?’
정확히는 자카리의 눈썰미와 정확한 활 솜씨가 결합된 결과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카리의 장점은 전 혀 인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자카리 또한 그에게 인정받을 마음 따위 없었다.
“어떻습니까. 제 아내에게 잘 어울 릴 것 같지 않습니까?”
명백히 황태자가 이엘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자카리는 황태자에게 일부러 그녀를 ‘제 아내’라고 호칭함으로써,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선을 그은 것이다.
“제 아내에게 선물로 주려고 합니다. 그녀는 남부 출신이라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자카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의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그려진다.
담요로 온몸을 돌돌 감은 채, 따끈 따끈한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모습.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다.
“전하. 전 제 아내를 무척 사랑합니다. 제게 있어 아내는 전부지요.”
“……그런 말씀을 왜 굳이 내게 하시는 겁니까, 소공작?”
황태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영민한 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순간 자카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자카리는 온기라곤 전혀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 손이 미끄러져 화살을 위험한 곳에 날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자신이 황태자를 해할 수 있었고, 해할 능력 도 있었으며, 해할 의지도 있었다는 선언. 그럼에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 황태자는 울컥 하고 말았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소공작?”
“협박이라니요.”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연다.
“아까 전부터 말씀드렸듯이, 전 사실만을 말씀드립니다.”
“소공작!”
“그럼 전하께서도 훌륭한 사냥감을 얻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제 할 말만 마친 자카리는 마지막으로 꽤나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황태자는 오히려 그 정중함이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았다. 빠드득. 황태자는 이를 갈았다.
“아 참. 이건 전하께 진심으로 충고를 드리는 건데.”
막 물러나려던 자카리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닿은 이는 바로 몰이꾼이었다.
“사람은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전하를 위해 이 추운 날, 숲 속을 헤집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자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그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런 자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휘 두르는 건, 오히려 전하의 고귀함에 누를 끼치는 행위지요.”
“그, 그게 무슨……!”
“그렇다면 좋은 시간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긴 자카리는 그대로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말에 매단 은여우가 황태자를 놀리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황태자는 훌륭한 사냥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도 제가 자카리에게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은여우 이상으로 희귀하고 값비싼 사냥감은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젠장!”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황태자가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새 무리들이 파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황태자는 그대 로 고래고래 언성을 높였다.
“젠장, 괴물 자식이, 감히 황태자에 게..! ”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몰이꾼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는 화가 나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헉, 헉, 허억……”
여기서 더 화를 내면 자카리의 도발에 그대로 넘어가는 꼴이다. 황태자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 일을 이대로 묻어 둘 수는 없지.’
황태자의 눈이 갸름해졌다. 그는 고민했다. 소공작의 구겨진 낯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레이디 헤센바이츠.’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황태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있었다. 단 한 명, 소공작이 거의 이성을 놓아 가면서 집착하는 대상이. 순간 황태자의 비뚤어진 소유욕에 불이 당겨졌다.
‘비록 먼저 연을 맺은 쪽은 소공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끝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거듭했다.
‘오히려 약간의 장애물이 있는 편 이, 빼앗을 때의 쾌감이 훨씬 더 강하지.’
애초부터 이상하리만치 사람의 가슴속을 헤집어 놓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를 빼앗을 수 있다면, 꼴 보기 싫은 헤센바이츠 소공작에 게도 한 방 먹여 줄 수 있다니. 황태자는 흡족해졌다.
‘좋아.’
황태자의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 났다. 시간이 좀 걸려도 좋았다. 우 선 그녀를 확실하게 빼앗을 방도를 강구해야만 했다. 황태자는 말에 박차를 가했고, 몰이꾼들이 허둥지둥 뒤를 쫓았다.
한편, 이엘리를 포함한 귀부인들은 화려한 천막 안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로렌 백작 부인이 그렇게 주최로 서고 싶어 하던 그 티타임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어머나, 황녀 전하! 제게 전하의 곁에 앉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어요?”
백작 부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주변을 휘젓고 있었다.
특히 황녀에게 어떻게든 아첨을 하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이 귀부인들의 빈축을 샀다. 얼굴을 가린 부채 뒤 로 불쾌한 눈빛이 오고 갔다.
‘차기 공작 부인을 앞에 두고…… 어찜 저렇게 천박한지.’
‘자신이 소공작님의 외숙모라는 자각은 전혀 없는 건가?’
어쨌든 이 자리의 귀족들은 북부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알기로 북부의 군주는 헤센바이츠였다. 그리고 황가와 공작가의 흉험한 관계는 따 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레이디 헤센바이츠께서는 불쾌하 시지 않으신가?’
일부 사람들은 이엘리의 눈치를 넌 지시 살피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는 이엘리에게 호감을 갖게 된 툴란 남작 부인도 있었다. 이엘리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방긋 미소를 지었다.
‘로렌 백작 부인, 망아지도 아니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잖아.’
‘분명 불쾌하실 텐데…… 나이도 어리신 분이, 그래도 의연하게 참고 계시는군.’
귀부인들은 안타까움과 기특함을 담아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백작 부인의 행보에 따라 반사적으로 이엘리의 평가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니, 다들 왜 나를 저렇게 갸륵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야?’
하나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황녀는 그런 백작 부인의 행동을 능숙한 솜씨로 대처했다. 그녀의 요청을 칼같이 잘라 낸 것이다.
“로렌 백작 부인, 제 곁에 앉기에 가장 적합한 분은 아무래도 레이디 헤센바이츠 같군요.”
“예에?”
백작 부인의 얼굴에 실망감이 서렸다. 하지만 황녀는 부드러우나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제 곁에 앉아 주시겠어요, 레이디 헤센바이츠?”
“……”
이엘리는 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솔직히 신분과 지위를 따지자면 이엘리가 황녀의 곁에 앉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로렌 백작가는 황가가 공을 들여 북부에 심은 황가의 측근 아닌 가.
‘굳이 이렇게까지 내게 잘해 주실 이유는 없는데.’
하지만 무턱대고 경계의 날을 세우 기에는 연회의 밤, 황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
‘특히 그 눈빛.’
어딘지 모르게 체념한 것 같던 서글픈 눈동자. 가만히 시선을 내린 채 중얼거렸던 그 목소리.
‘왜냐하면 저와 소공작의 결합으로 이득을 보는 이는 딱 한사람뿐이니까요.’
냉소적인 목소리가 귓전에 쟁쟁했다. 이엘리는 황녀를 바라보았고, 황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아, 황녀 전하.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황급히 표정을 수습한 이엘리는 황녀의 곁에 앉았다. 황녀는 어딘가 짓궂은 얼굴로 질문했다.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그런 표정을 하고 계셨나요?”
“아, 그게……”
이엘리는 눈을 깜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나.
“아, 제가 맞춰 볼게요.”
생각을 맞춰 보겠다고? 하지만 황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엘리에게 찡긋 눈웃음을 쳤다.
“소공의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요?”
“예에?”
아니, 그거 아닌데? 하지만 그렇게 항변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엘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잖아요. 소공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안 계시니까요.”
“음, 그렇죠……”
이엘리가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지금 상황,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황녀는 환히 웃었다.
“두 분께서는 무척이나 다정한 부부이셔서, 보고 있는 저까지 즐거워져요.”
자리에 모여 있던 귀부인들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한때 황녀가 소공작과 혼담이 오간 건 모두 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황녀가 저렇게 대놓고 소공작 부부에 대해 말하는 건.
‘……황녀께서는 소공작에게 전혀 관심에 없다는 뜻인가?’
귀부인들은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어제 연회에서 황태자가 보였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 다. 황태자는 대놓고 황녀와 소공작을 붙여 둔 채, 이엘리를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소공께서 사냥을 나가셔서 지루하 시지요, 레이디 헤센바이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황녀는 꽤나 살갑게 말을 붙였다. 이엘리는 빙그레 미소했다.
“괜찮아요. 각자 해야 하는 일이 다르니까요.”
“어찜, 레이디 헤센바이츠는 무척 어른스러우세요.”
황녀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이엘리를 보았다. 그녀는 낯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와 동갑이시라고 들었는데…… 제가 많이 배워야겠어요.”
이제 황녀는 본격적으로 이엘리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고 있었다. 이엘리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 떻게든 보여 주려는 그 노력이 눈물 겨울 정도였다. 이엘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예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 신 레이디께 그런 말씀을 듣다니, 낯부끄럽습니다.”
“……”
황후는 커녕 피를 나눈 황녀도 없었으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황녀는 아주 잠시 막막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황녀의 그 표정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 라.”
황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치,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녀의 표정은 저에 대한 찰나의 조소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밝게 바꾸곤 말머리를 돌린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블랑쳇 자작도 사냥에 나섰다고 들었는데요.”
“네, 맞아요. 아마 다른 기사들과 함께 가셨을 거예요.”
이엘리는 내심 황녀가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선은 황녀의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좋은 사냥감을 잡아 오셨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어색하게 웃으며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은 사냥감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뭐…… 오히려 짐승 에게 아버지가 잡히지 않으시면 다 행이지.’
블랑쳇 자작은 사실 사냥에는 큰 재능이 없었다. 그랬기에 자카리는 장인을 배려하여, 직접 몰이꾼과 기 사까지 붙여 주었다. 장인의 안전을 꼭 책임져야 한다, 신신당부한 것은 물론이었다.
‘사냥 숲은 안전하니까…… 사실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필요는 없는데.’
이엘리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부담스러워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그럼에도 자카리가 그녀의 가족들을 소중하게 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기쁘다.
“설마 지금도 소공작을 생각하고 계셔서 그런 미소를 짓고 계신 건가 요?”
그때 황녀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정곡을 찔렸기에 이엘리는 화르륵 뺨을 붉히면서 입술을 벙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