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96)

40 화

“그건.”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던 이엘리는 말을 되삼켰다. 이엘리의 양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사실 어제 네게 설레서 그랬던 거라고…… 어떻게 설명해.’

이엘리도 어젯밤 자신이 했던 처신 이 그렇게 옳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자카리에게 홀로 두근거렸으며,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

키스할 거라고 생각하며 설레발을 쳤던 건 이엘리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아마 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 울 만도 하다.

'하지만 자카리는 내 속마음 따위 전혀 모를 테니까.’

이엘리는 약간 삐뚤어지기로 했다. 그녀는 턱을 치켜세우며 자카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야 너, 어제 술 마시고 진상 부렸잖아. ” 

“그, 그건…… 맞는데. 하지만 큰 실수는 아니라고 했잖아?”

자카리는 소심한 어조로 항변했다. 이엘리의 눈이 점차 세모꼴로 변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쏘아붙였다.

“어쨌든 실수는 실수지. 자잘한 건 실수 아니야?”

이엘리는 꽤나 매서운 기세로 추궁 했다.

자카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슬슬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이 잔뜩 혼나 풀이 죽은 강아지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말 했다.

“……미안해.”

“……“

“이엔, 정말로, 진짜로 미안해.”

어찌나 미안해하는지 그대로 바닥에 쪼그라들어 사라질 것 같다. 음, 좀 불쌍해 보이긴 하네.

“그러니까 화 좀 풀어. 응?”

자카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엘리는 보란 듯 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이야.”

“응? ”

“이번만 용서해 주는 거라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리 대답 하자, 자카리의 표정이 등불을 켜기 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손을 뻗어 이엘리를 와락 제 품 안에 끌어안은 자카리가 안도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마워, 앞으로는 절대 실수 안 할게!”

“으, 저기, 자카리? 수, 숨 막혀!”

이엘리가 자카리의 등을 콩콩 두드려 대며 외쳤다.

성년을 코앞에 둔 소공작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길을 지나던 사람들 은 모두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엘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빽빽한 침엽수림 아래로는 울창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북부는 기온이 차가웠기에 활엽수 보다는 침엽수림이 훨씬 많았다. 황태자는 말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 다. 뱃속이 울렁거린다.

“……아, 젠장.”

현재 황태자는 숙취에 잔뜩 시달리고 있었다. 어제 소공작과 함께 대 작한 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그 괴물 같은 작자는 독주를 쉴 새 없이 비우면서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있었다.

“그 망할 자식, 술은 괴물처럼 강해 가지고는……”

황태자는 입 안으로, 황태자의 신분으로 말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욕설들을 짓씹어 삼켰다.

“젠장, 여긴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왈칵 신경질을 낸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태자의 기분이 저조 한 것을 보며 몰이꾼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는 곧바로 눈치를 살핀 다. 황태자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투덜거렸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군.”

스스로의 고귀함을 잘 아는 황태자였다. 또한 황태자는 자신의 고귀함을 휘하의 신분 낮은 이들을 짓밟는 것으로 과시했다.

얻어맞지 않으려면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한다는 건 상식이었다.

‘……그나마 그녀를 만난 것만 좀 괜찮았지.’

황태자는 입맛을 다셨다. 아샤꽃 잎처럼 우아하게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카락, 그리고 새싹처럼 연한 녹 색 눈동자.

앙칼진 목소리마저 사랑스럽고, 그를 거부하는 목소리마저 노래 같았다.

‘그렇게 미인일 줄 알았더라면, 그 냥 고집을 부려서라도 안네로제를 결혼시킬 걸 그랬어.’

회색 눈동자가 깊숙이 가라앉았다. 병석에 누운 채 반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황제는, 그 당시 드물게 아버지의 정을 발휘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때의 황제는 안네로제를 결혼시키느니 다른 신붓감을 찾아보라며 역정을 냈고, 황태자는 생각 없이 블랑쳇 자작가의 여식을 골랐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단순한 미인 이었더라면 이렇게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텐데……”

황태자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말머리를 돌렸다. 쯧, 혀를 차던 황태자가 묘한 얼굴을 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샤의 축복’ 도 듣지 않는 것 같고……‘

나중에 한 번 더 확인해 봐야 할 테지만, 적어도 지금까진 그렇게 보였이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있어, ‘아샤의 축복’이 듣지 않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헤센바이츠의 핏줄 이 아니면.

'그녀는 외부에서 결혼한 여자고, 아직 헤센바이츠의 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아샤의 축복’이 적용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엘리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황태자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황태자는 입술 끝을 비 죽이 올렸다. 황태자는 비릿하게 미 소 지었다.

“뭐, 괜찮아. 앙칼진 고양이는 길들 이는 맛이 있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이엘리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황태자였다. 그런 황태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 노력하 며, 몰이꾼들은 슬슬 뒤를 따랐다.

바로 그때. 황태자가 몰이꾼들을 홱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늦나?”

커다란 고함 소리에 몰이꾼들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황태자는 말채찍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말채찍으로 죽도록 얻어맞고 싶은 건가!”

“아, 아닙니다!”

몰이꾼들이 허둥지둥 달려갔다. 황태자가 두 눈에 잔뜩 날을 세우며 날카롭게 고함을 지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자네들이 모시는 건 제국의 황태자야! 무슨 일이 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사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사냥 숲은 공작 성이 관리하는 곳이었이고, 당연히 위험한 마수나 맹수들 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황태자는 어제 일을 화풀이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자카리 헤센바이츠!’

갓 내린 설원처럼 새하얀 은발, 빙하처럼 차가운 눈동자.

우아한 맹수처럼 서늘한 청년. 자카리의 새파란 눈동자는 마치 황태자를 조롱하듯이 바라본다. 황태자는 아득 어금니를 물었다.

‘그 끔찍한 괴물 따위가!’

황태자도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자카리는 황태자가 공작 성에 당도한 직후부터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제 이엘리를 보호하기 술을 권했던 것도 알았다. 다만 오랫동안 연회와 향락에 길들여 온 황태자였기에, 그는 자신이 고작 술을 대작하는 것에서 패배할 리 없다고 여겼 다.

“나는 이 제국의 황태자야! 감히 천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황태자는 또 한 번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그때, 사박사박 서리 내린 풀숲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 도대체 뭐지? 황태자는 홱 고개를 돌렸고, 금세 표정을 일그러뜨렸이다.

“이런, 황태자 전하.”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자카리였다. 고개를 가볍게 기울인 채,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전하께서 차후 제국의 지존이 되 실 분임은, 여기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카리의 우아한 목소리에는 싸늘한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황태자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소공작. 지금 날 비꼬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자카리는 매끄럽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황태자는 그런 자카리를 응시하며 눈을 빛냈다.

‘겨우 저 정도 무기만 챙겨 오다니.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좋은 사냥 감을 잡을 수도 있겠군.’

현재의 자카리는 단출한 차림이었다. 무기라고는 커다란 장궁 하나뿐. 게다가 혼자다. 짐승을 찾아 몰아올 몰이꾼들도 없이 혼자서 사냥에 나선다니, 오만하군. 황태자는 속으로 비웃었다.

‘좋아. 그러면 훌륭한 사냥감을 잡아서 그녀에게 바칠 수 있겠군.’

황태자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눈을 가

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게다가 사냥 숲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참으로 섭섭하군요.”

“……그건.”

설마 들었나. 황태자는 순간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제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느냐는 그 말은, 사냥 숲의 주인인 공작가에게 모욕적인 뜻을 품고 있었으니까.

“헤센바이츠가 심혈을 기울여 관리 하는 사냥 숲 아닙니까.”

들었군. 황태자는 입 안의 보드라 운 살을 잘근 깨물었다. 자카리는 느긋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설마 전하께서 공작가를 믿지 못 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실 속셈은 아니시지요?”

질문을 던진 자카리가 화려하게 웃었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한들, 그 화려한 미소 속에 숨겨

진 날카로운 기운을 몰라볼 수는 없었이다. 황태자는 끙, 앓는 소리를 뱉 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말실수를 한쪽은 황태자였기에, 결국 황태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나마 그렇게 말했다.

이 정도 입바른 말이면 자카리도 넘어가 줄 테니까, 그런 얄팍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셨다면, 제게 하셔 야 할 말씀이 하나 더 있을 텐데요.”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제게 하셔야 할 말씀이 하나 더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가 막힌 낯을 한 황태자 앞에서, 자카리가 곱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는 낭랑하게 말했다.

“어린아이도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면 사죄를 합니다.”

“헤센바이츠 소공!”

“그런데도 하시는 행동은, 고작 말을 돌리려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장궁에 날렵하게 활을 매겼다.

끼리릭. 한껏 휘어진 장궁에서 비 명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태자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 무엇을 하는 겁니까!”

화살이 겨누고 있는 방향은 명확히 황태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온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 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자카리는 북부뿐 아니라 제국 전체에서 이름

을 떨치는 전사다.

‘소공작이 미쳤나? 하, 하지만……!‘

만약 자카리가 눈이라도 홱 돌아서 황태자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여기서 자카리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 무도 없었다.

게다가 자카리와 황태자가 싸우면 황태자에게 승산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황태자는 남성 귀족들이 기본 소양으로 익히는 최소한의 검술마저 도 연마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소공에게 말실수를 했 습니다! 잘못했으니까……!”

황태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던 자카리의 푸른 눈동자가 경멸의 기색을 품었다.

한심한 자식. 관심조차 아까운 작자 아닌가, 황태자만 아니었더라도.

그와 동시에 핑, 활 사위가 흔들렸다.

“캥!”

여우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의 등 뒤편에서, 새하얀 여우가 펄쩍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카리는 활을 내렸다. 그가 비뚜 름하게 입술 끝을 밀어 올려 말한다.

“무엇을 하긴요.”

“……”

“사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천천히 눈을 굴려 등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화살을 맞은 여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황태자는 등골이 선뜩해졌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방금 그 화살…… 내 왼쪽 귀를 바로 스쳤어.’

자카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명랑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대답을 했다.

“전 그저, 사냥감이 전하의 바로 등 뒤에 있기에 쏘았을 뿐입니다.”

“……헤센바이츠 소공작.”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뜻 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카리만이 밝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몰이꾼과 황태자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소공작님, 여우의 눈을 정확히 쏘아 맞혔어……”

‘하나 그렇게 거리가 멀었는데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몰이꾼들은 얼빠진 얼굴로 쓰러져 있는 은여우를 바라보았다.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일부러 눈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은여우와 자카리의 거리는 굉장히 멀었다. 가볍게

눈을 쏘아 맞출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카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아, 다행이군요.”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은여우를 집어 들었다. 은여우를 요모조모 살피던 그가 말했다.

“가죽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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