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나란히 침묵을 지켰다.
이엘리는 살며시 자카리를 곁눈질 했다. 아직까지는 걸음이 약간 흐트러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 상당히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저기, 이엔?”
이엘리의 방에 도착한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왜 그녀가 기분이 상했는지 이유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이엘리는 자카리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 이후 입을 연다.
“바보, 멍청이.”
그렇게 말한 그녀가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왜 저러는 거지. 자카리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밤의 복도를 걷 고 있었다. 한껏 빛을 줄여 놓은 등 불이 주홍빛으로 아른거린다. 그의 시선이 어둠 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엔의 입술이 너무 가까웠어.’
이엘리의 붉은 입술을 생각할 때마 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른다. 키스. 키스라.
그 단어를 생각하던 자카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카리는 저도 몰래 손을 들어 입술을 어루만졌다.
‘도대체 나, 이엔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지.’
사실 그들은 부부였고, 그 정도 신체 접촉은 해도 전혀 상관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실제 그들은 아직 방조차 합치지 않았다. 이엘리의 동의가 없다면 자카리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엔, 화가 났나? 내 일 사과를 해야 하나.’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생각하던 자카리는 근심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콜록, 콜록!”
반쯤 열린 두꺼운 문 너머로 거센 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순 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
그 소리는 공작의 집무실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병은 모두 완치되셨던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시간까지 아직 주무시지 않았나?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공작의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콜록, 콜록! 쿡, ……하아.”
공작은 하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 고, 허리까지 굽혀 가며 격렬한 기 침을 토하고 있었다. 간신히 기침이 멎었다. 손수건을 떼자, 그 위에는 온통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자카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 졌다.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취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가 공작을 불렀 다.
“……아버지?!”
“……“
공작은 낭패한 얼굴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그 이후, 단정한 표정이 되어 자카리에게 말한다.
“과음한 것 같구나.”
피를 토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말끔한 얼굴이다. 내가 설마 헛것을 봤나? 자카리는 순간 혼란스러워졌 다. 하지만 공작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손수건엔 여전히 새빨간 피가 번져 있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신경 쓸 것 없다.”
“피를 토하셨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자카리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공작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지금 날 걱정하는 게냐?”
“그건……!”
자카리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 다. 공작을 걱정한다? 순간 그는 혼 란스러워졌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 이 남았느냐 물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았는데. 하지만 지금 상황은……
“내가 며느리는 잘 들였군. 살다 살다 내 아들이 날 걱정하는 모습까지 보다니.”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카리는 공작을 쏘아보았다. 가슴 깊은 곳까지 답답해졌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삐뚤어지셨다 니, 역시 내 아버지답군.’
속으로 빈정거린 자카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공작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렇죠. 유일하게 아버지가 잘한 일이 이엔을 제 아내로 들이신 겁니다.”
자카리의 음성은 냉정하기만 했다. 공작은 그런 자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하긴, 이엘리는 너와 나에게 아까운 아이긴 하지.”
그렇게 대답한 공작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 와서. 그게 솔직한 본심이었다. 이제 와서 아비 노릇을
하려 하는 것도 우습다. 게다가 공작에게 자카리가 정을 붙여 봤자, 소용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미리 결정해 둔 제 인생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는 자는 가끔 자기 자 신의 죽음까지 이용해야 하는 법이 다. 그리고 공작은 이미 선택했다. 그가 냉랭하게 답한다.
“오랫동안 내가 널 내치고 싶어 했 던 건 잘 알고 있겠지.”
그는 흠칫했다. 아버지에게 움직이려던 마음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아직도 절 내치는 것에 대한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셨지요.”
자카리는 차갑게 대답했다. 오연하 게 턱을 올리고 시선을 맞추는 눈동자는 공작과 꼭 닮았다.
“제가 없어진다면 헤센바이츠는 사 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아들의 싸늘한 말을 듣던 공작은 처음으로 심장이 꽉 죄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공작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느새 아비 취급을 받고 싶어진 것인가. 이기적이고 어리석게도.
“잘 알고 있구나.”
“그럼요, 예전에는 이 사실을 몰라…… 아버지께 버림받을까 매번 두려워해야만 했지요.”
자카리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짙푸른 눈동자는 가장 깊은 겨울의 빙하처럼 차갑기만 하다.
“하긴,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망설임 없이 내뱉어지는 차가운 목소리.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애정조차 사라진 싸늘한 얼굴.
“하지만 이미 제 필요성을 인정하 셨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치졸해 보이는군요.”
”……”
공작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 다. 자카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건 명백한 거부였다.
“물론 아버님의 생각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는 않지만요.”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엔 온기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 헤센바이츠의 차기 공작이 되어야 할 자는 응당 그래야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안 이 쓰다. 공작은 반쯤 충동적인 기 분이 되어 입을 열었다.
“자카리.”
“예?”
“넌 네가 있어서, 이엘리가 행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 지 않았나?”
자카리는 멈칫했다. 공작은 무감정한 눈동자였다. 아주 오래된 의문이었다.
아델라이데는 공작의 곁에 있으면 서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괴물의 힘을 가진 자카리는 어떠 할까.
“너 때문에 그 아이가 불행해진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자카리는 잠시 침묵했다. 이엘리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자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이엔은 제 인생의 단 하나뿐인 기적이 고, 빛입니다.”
공작은 물끄러미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낮게 억눌린 어조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전 이엔이 행복하기를 바람니다. 하지만……”
자카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신이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 자 체에 죄책감이 밀려든다.
“……이엔이 행복해야 할 장소는 바로 제 곁이예요.”
과연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내 곁에 얽매어 놓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내가 널 사랑해도 괜찮은 걸까.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 문. 오래 묵은 죄악감과 애정이 뒤 섞여 혼란했다.
“왜냐하면 전…… 이제 이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자카리는, 공작 앞에서는 가장 내밀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진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있는 힘껏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런가.”
자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짙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질문은…… 근본부터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전제로하고 있어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
“이엔이 저를 떠나는 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습니다. 아니, 상상 할 수 없다는 게 맞죠.”
그렇게 말한 자카리는 이윽고 쓰게 웃었다. 서로를 꼭 닮은 시선이 상 대방을 제 안에 담았다.
“……이런 점에서는 저도, 아버지를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고해성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공작은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두 부 자는 이 순간, 서로를 완벽하게 이 해했다.
가없는 애정. 마음 바친 이에게 사 랑과 온기를 구걸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모자라고 나약한 존재 들. 그게 바로 그들 부자였다.
“그것보다, 아버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 낸 자카리가 공작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공작은 그 시선을 맞받았다.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건강, 도대체 어떤 상태입니까?”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그 대답을 들은 자카리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카리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공작령을 책임질 분 이십니다. 그러니……”
말끝을 흐린 자카리가 공작을 노려 보았다. 말을 맺는 그 목소리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후계 된 자로서 당연히 걱정해야 한다고, 예전에 답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 쓸 필요 없다.”
“예?”
자카리는 의아한 낯을 했다. 공작은 손안의 피 묻은 손수건을 와락 움켜쥐면서 말을 이었다.
“너와 이엘리가 마음 졸일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건, 무슨……”
“난 네가 공작 작위를 잇는데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뜻 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공작의 목소리는 흡사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것처럼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다만 이번 일은 이엘리에게는 말하지 마라.”
잠시 머뭇거리던 공작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자카리에게 당부했다.
그 말을 듣던 자카리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숨
이 막혀 온다.
‘그나마 마음 졸일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저 말씀은……’
적어도 지금 당장 병세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건가.
자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당장 주치의를 불러다 아버지의 건강을 물어보고 싶지만, 때가 안 좋다. 지 금 공작 성에는 황족이 있다.
'아버지가 내가 주치의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공작의 건강 상태를 황태자가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것만큼 은 역시 막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아버지.”
억눌린 목소리로 자카리가 인사를 건넸다. 공작은 말없이 고개를 까닥 여 보였다.
자카리는 걸음을 물렸다. 소리 없이 방문이 닫혔다. 뒤에 남은 공작은 닫힌 방문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 *
이튿날, 오전을 기해 사냥회가 열렸이다. 사냥회가 진행되는 장소는 공작성 근처의 사냥 숲이었다.
울창한 사냥 숲 앞 공터엔 갖가지 가문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깃발은 공작 가, 그리고 황가의 깃발이다. 이엘리는 물끄러미 사냥회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아샤꽃을 같은 상징으로 삼은, 제국의 가장 강력한 두 가문이라니.’
경쟁적으로 펄럭이는 두 가문의 깃 발을 바라보던 이엘리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공작은 자리를 비웠다. 자연스레 공작의 건강에 대 해 관심이 흘러갔다.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오늘은 쉬신다는데…… 괜찮으신 걸 까.’
요새 계속해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자카리가 이엘리에게로 뛰듯이 걸어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엘리의 이름을 불렀다.
“이엔.”
“……자카리?”
이엘리는 마땅찮은 표정으로 자카리를 맞아들였다.
잔뜩 술에 취해 있었던 간밤의 모습은 간데없이, 자카리는 이제 소공작의 지위에 걸맞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자카리는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내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 어?”
“실수?”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큰 실수를 저지른 건 없어.”
“그런데…… 왜 자꾸 내 눈을 피하는 거야?”
자카리는 마치 사고를 친 강아지처럼 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연녹색 눈동자를 집요하게 따라붙는 푸른 눈동자는 이유를 알 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