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96)

38 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레이디와 소공작께서 평생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네? “

의외의 말을 들은 그녀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황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소공작께서는 레이디를 아내로 들이신 후부터, 놀랄 만큼 진정된 모습을 보이고 계시죠.”

진정된 모습이라. 이엘리는 말없이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황녀가 조소 섞인 어조로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신 오라버니께서는, 절 어떻게든 소공작과 다시 엮고 싶으신가 봐요.”

그 이유는 이엘리도 얼추 예상했다. 안네로제는 서녀였다. 그 말은 즉, 그녀는 황태자에게 있어 정략결혼의 이용 대상 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서녀인 안네로제를 가장 잘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대상이 바로 헤센바이츠였다. 결혼을 통해 공작가를 조금 이나마 묶어 둘 수 있으니까.

‘게다가 외부에선 내가 결혼한 이 후부터 공작님과 자카리의 사이가 완화됐다고 느낄 테니까.’

그게 사실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포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황녀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전 그런 결혼, 싫거든요.”

노골적인 말이었다. 이엘리는 흘끔 황녀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황녀는 미간을 구긴 채였다.

“왜냐하면 저와 소공작의 결합으로 이득을 보는 이는 딱 한사람뿐이니까요.”

황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끝에는 황태자가 앉아 있었다. 황녀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바로 제 오라버니죠.”

“……황녀 전하.”

“그래서 전 두 분께서 영원히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무언가를 결정해 본 적 없는, 이리저리 이용당하기만 하던 사람 특유의 서글픔. 황녀가 그녀를 곁눈질했다.

“제 말뜻, 이해하시죠?”

이엘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는 빙긋 미소를 짓곤 뒤로 물러 났다.

“그렇다면 전 이만 먼저 방에서 쉬 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황녀 전하께서 편하신 대로 하셔 야지요.”

“고마워요. 그럼 또.”

그렇게 말한 황녀가 몸을 돌렸다. 그때 이엘리는 보고 말았다. 레이스 로 장식해 풍성한 옷소매 자락에 감 춰져 있는 황녀의 가녀린 팔목을. 그 팔목엔 새카만 멍이 뱀처럼 휘감겨 있었다.

“저, 황녀 전하!”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러냐는 것처럼, 황녀가 흘끗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녀를 붙들어 본들, 무어라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황태자께서 황녀께 해코지를 하고 있냐고? 폭력을 가하고 계시냐고? 이엘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으신가요?”

결국 물어볼 수 있는 건 이렇게 뭉뚱그린 질문뿐이었다. 황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글쎄요. 레이디 헤센바이츠는 참 다정하신 분이군요.”

다만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자리를 떠나는 황녀를 이엘리는 붙들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연회는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소공작과 황태자의 느닷없는 주량 대결은 소공작의 승리로 끝났다. 황태자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하인

들에 의해 실려 나갔다.

자카리는 꽤나 멀쩡한 얼굴로 황태자가 떠나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사람들 또한 모두 연회장을 떠났다.

“자카리.”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배웅해 준 이엘리는 자카리 곁에 살며시 다가갔다.

자카리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여기 좀 보라는 뜻으로, 이엘리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너 괜찮아?”

이엘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자카리는 흘끗 그녀를 본다.

“뭐가?”

“아까 술, 엄청 마시던데.”

“그래? 어때, 나…… 괜찮아 보 여?”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면 어쩌란 말인가. 미간을 잔뜩 구기던 그녀는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너.”

미세하게 말끝이 흐트러져 있다. 이엘리는 기가 막혔다. 멀쩡한 게 아니라 멀쩡한 척이었어?

“취했지?”

“아…… 들켰나.”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가 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자식, 웬만큼 먹여서는…… 쓰러지질 않기에.”

“아니, 그래도 넌 적당히 마셨어야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렇게 만취해 버리면 어떡해? 그녀는 그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우선 나가자. 방에 데려다줄 테니까……”

“싫어.”

드물게 또렷하게 대답한 자카리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푸른 눈 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같이 있을래.”

“……“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카리가 평소 어리광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술버릇까지 그럴 줄 이야. 아무래도 내가 애를 잘못 키 운 것 같은데. 이엘리는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들어가서 눕는 편이 낫지 않아?”

“그럼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됐다. 만취한 사람한테 말해 봤자 뭐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엘리는 고 민에 잠겼다. 술에 취한 사람의 고 집을 이기긴 어려우니까.

“그럼 바람이라도 좀 쐬자. 어때?”

“좋아.”

멍한 시선을 하던 자카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게 빛나는 은발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건 뭐…… 강아지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급한 대 로 자카리를 끌고 밖으로 빠져나왔 다. 자카리는 약간 비틀거리기는 했 지만, 그래도 잘 따라왔다.

연회장 바로 앞에는 조그마한 정원이 마련 되어있었다.

‘밤의 정원도 운치가 있네.’

부드러운 어둠 안, 동그란 달이 잘 닦인 은거울처럼 머물러 있었다. 새 하얀 달빛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만물이 새하얗게 반들거렸다.

이엘리는 맑고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자카리는 좀 괜찮은가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자카리를 곁눈질 하던 그녀가 한숨을 삼켰다. 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군.

“있지, 자카리. 여기에 좀 앉아봐.”

이엘리는 자카리를 벤치에 앉혔다.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른 자카리가 이엘리를 올려다본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한담?”

이엘리는 팔짱을 낀 채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그때, 자카리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앉아.”

“응? ”

“너도…… 앉으라고.”

이건 좀 불안한데.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말끝이 늘어지면서 발음이 슬슬 흐트러지는 것을 보아하니, 자카리는 점점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카리는 칭얼거리면서 다시 말했다.

“빨리, 여기…… 내 옆에 앉아.”

어둠 속에서도 자카리의 뺨은 확연 하게 붉었다. 이엘리는 고집에 못 이겨 그의 곁에 앉았다.

“있잖아, 이엔.”

“그래, 그래.”

“……아까 나한테 왜 화내?”

……”술주정을 하려면 좀 곱게 하지 그러니. 기가 막힌 이엘리가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뭐라고?”

“아까 나한테, ……술 적당히 마시 지 않았다고.”

도대체 얘를 어쩌면 좋을까. 이엘리는 짜증을 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지금 자카리는 술에 취해 서 그런 것뿐이야. 술에서 깨면 괜찮아질 거야. 자카리는 투덜투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뭐가?”

“자꾸 그 자식이…… 너한테 말을 걸잖아.”

자카리는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이엘리를 납득시키 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엘리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거다.

“응?”

“요슈아인지 뭔지 하는 그 재수 없는 자식.”

술에 취한 와중에도, 자카리는 그 말만큼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엘리는 화들짝 놀랐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

아무리 인적 없는 정원이라지만 황태자를 대놓고 ‘재수 없다’라고 말 하다니. 솔직히 재수 없는 건 맞지 만, 그래도 입 밖에 내는 건 다른 문제이지 않나. 자카리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구도…… 너한테 말, 안 걸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던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애도 아니고 이 게 무슨 소리람.

이엘리는 손을 들어 자카리의 머리 카락을 슥슥 쓸어내려 주었다. 흰 은발이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진다.

‘부드럽다.’

남편에게 비유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마치 커다란 대형견을 기르는 것 같다. 한창 부드러운 감촉에 심

취해 있자니, 절 빤히 바라보는 시 선이 느껴졌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카리?”

부름과 동시에 자카리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이엘리의 어깨에 툭 고개를 기대며 중얼거린다.

“그 새끼.. 진짜 싫어.”

취기 때문인지, 자카리의 날숨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카리가 서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개자식이 말이지…… 넌 내 아내인데.”

아니 얘가 술 취했다고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 하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던 이엘리가 자카리를 흘 겨보았다. 자카리는 일부러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는 이엘리의 시선을 피했다.

“자카리, 그런 말 하면 안 돼. 누 가 들으려면 어쩌려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자카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들으란 듯 말을 잇는다.

“개자식. 재수 없는 놈. 미역 머리. 버터 바른 멸치 같은 새끼.”

“……너 미쳤어?”

하지 말라니까 더 하네? 이엘리는 도끼눈을 떴다. 그 와중에도 자카리가 구사한 다채로운 욕설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이엘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자카리가 반짝 눈을 떴다.

“미쳤다고?”

이엘리의 말을 들은 자카리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슬며시 시선을 들어 올린 그가 입을 연다.

“그럴 수도 있겠네.”

“뭐라는 거야?”

이엘리는 와락 인상을 썼다. 그러 자, 자카리가 사르르 두 눈을 접고는 달콤하게 소곤거린다.

“너한테.”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새싹 같은 눈동자가 봄 같은 감정에 휘말렸다. 파르르 떨리는 그 눈동자를 보며, 자카리는 손을 뻗었다. 그녀의 뺨에 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자카리가 미소했다.

“만약 내가 미친 거라면…… 그건 분명 너에게 미친 거겠지.”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분명 예전이라면 오글거린다며 질색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았다. 자카리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똑바로 그녀를 본다.

“이엔.”

입술과 입술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그녀는 자카리를 보며 짧지만 깊은 고뇌에 빠져야 했다.

'키, 키스하려나?’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자카리의 키스를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 생각해 보면 이게 처음도 아니잖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샤 축제에서…… 잠깐만, 그걸 키스라고 쳐야 해?

‘그건 좀 불공평하잖아!’

그러니까 키스는, 좀 더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술김에 하는 게 아니라……! 이엘리는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가는 걸 느꼈다. 바로 그때, 자카리가 홱 고개를 물리며 말했다.

“……안 되겠어.”

“뭐?”

이엘리는 순간 허망한 얼굴을 했다가, 제가 허망함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 혼란스러워졌다.

“이러다가 정말로……”

사고 칠 것 같아. 자카리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엘리는 언제나 그의 여신이었다. 소중하게 대해 도 모자랄 판에,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동의 없는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 자카리?”

“미안, 술에 취해서 해선 안 될 행동을 했어.”

자카리는 정중한 얼굴로 사과를 건 넸다. ……저기요? 이엘리는 아쉬움을 느꼈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자 신이 아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생 경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카리가 손을 내밀었다.

“방에 데려다줄게.”

“……술, 깼어?”

“조금은.”

자카리는 버릇처럼 웃었다. 찬바람을 맞았더니 머릿속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녀는 어딘가 뾰로통한 표정이 되 어, 자카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괜찮아?”

“응, 괜찮아.”

설마 자신이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싶어서, 자카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흐응. 그렇구나.”

이엘리는 삐딱하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덜겅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나, 뭔가 실수를 했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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