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96)

35 화

자카리는 말없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빙해처럼 새파란 눈동자에는 온기라곤 한 점도 없었다.

“소공작께서는 북부에서 말씽을 부리곤 하는 야만족들을 모두 쓸어버렸다고 하지요.”

“과찬이십니다.”

“그럴 리가요. 소공작께서 보인 무 용은 온 제국이 찬탄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말한 황태자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 미소엔 어딘가 불쾌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역시 은룡의 힘은 대단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 금 황태자는, 자카리가 공을 세운것 자체를 불쾌해 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럴 법도 했다. ‘겨울의 마법’ 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자카리가 작위를 잇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황가였는데, 자카리는 그 힘을 이용하여 반박할 수 없는 공을 세웠으니.

그리고, 그와 다르게 이엘리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카리 앞에서 은룡의 힘 운운하며 비꼴 필요가 있어? 무례하잖아!’

은근슬쩍 자카리에게, 그가 인외의 힘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라고 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자카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황태자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

“그렇습니다.”

공작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가 황태자를 눈에 담은 채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자랑스러운 아들이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황태자는 약간 울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작과 자카리의 속을 긁어 놓을 요량이었는데, 저렇게 순순히 대답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한편 자카리는 놀란 얼굴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놀라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이 외부에서 자카리를 감싼 적 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공작의 행동에 워낙 놀란 그는, 황태자가 무례하게 군 것마저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전 제국이 놀라워하는 공을 세웠으니까요.”

공작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저분이 정말 공작님 맞나? 이엘리도 기겁했다.

“제 아들이긴 하지만, 북부의 차기 군주에 어울리는 녀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작은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생각조차 못 한 반응에, 이엘리와 자카리는 공작을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제 할 일은 완벽히 해내니까요.”

“……소공작께서는 참 좋으시겠습니다. 공작께서 소공작을 그렇게 믿고 계시니 말입니다.”

황태자가 아득 이를 갈아붙였다. 이엘리는 그 와중에 공작의 말솜씨에 감탄했다. 당연하게 자카리를 제 후계자로 땅땅 박아 버리는 말 아닌 가.

게다가 ‘나이도 어린데’라는 말을 굳이 집어넣음으로써, 황태자와 은근슬쩍 비교하는 것까지. 그 비교

과정의 승리자는 단연 자카리였다.

‘황태자 전하는 아마 올해로 스물 여섯 살이 되시지.’

이엘리와는 거의 열 살 가까이 나 이 차이가 나며, 자카리와도 여섯 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정계에 진 출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음에도, 지 금까지 황태자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금 공작님은…… 자카리에 비교 하면 황태자 전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거지.’

아무리 헤센바이츠의 공작이라지만 저렇게 막 나가도 되나. 이엘리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가끔 자카리가 저지르는 막 나가는 행동은, 아무래도 아버지인 공작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

‘아샤의 축복 외에는, 사실 황태자 로 계시기에는 모자라신 분이니까.’

‘아샤의 축복’은 황가의 일원에게 드물게 발현된다. 자카리가 가진 ‘겨울의 마법’처럼 마법적인 힘이 발현된다고 하는데, 다만 그 힘은 사람마다 다소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의 힘은 뭘까?’

이엘리는 힐끔 황태자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때 황태자와 이엘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던 황태자가 얼른 미소를 짓는다. 이엘리는 생리적으로 기분 이 나빠졌다.

“북부까지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때 공작이 매끄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황태자와 황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즐거운 연회 되시길, 두 분 전하.”

“감사합니다, 헤센바이츠 공.”

한 마디 심술을 부렸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황태자가 이를 갈며 대답 했다. 공작은 자리를 떴고, 이엘리는 분위기를 살폈다.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고개를 숙여,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부모님께 가 보는 게 어때, 이엔?”

“그래도 돼?"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카리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물론이지. 두 분, 만나 뵌 지 오래됐잖아.”

“고마워.”

표정이 환해진 이엘리가 자리를 떴 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황태자가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블랑쳇 자작 부부는 연회장의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엘리는 빠른 걸음으로 부모님 곁에 다가 갔다. 블랑쳇 부부가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리고는 환한 표정으로 제 딸을 바라보았다.

“우리 이엔, 우리에게 와도 되는 거니?”

“잠깐이면 괜찮을 거예요. 자카리가 가보라고 했거든요.”

“소공작께서?”

두 부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는 힐끔, 연회장 안에서 있는 자카리를 바라본다. 여러 손님을 응 대하는 자카리의 태도에는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 부부는 약간 안 도하며 말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아까 전에도, 다들 제게 잘해 준 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 자 작이 목소리를 슬쩍 낮추어 이엘리의 귓전에 소곤거렸다.

“그, 소공작께서는 겨울의 마법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이 있든지 말든지, 자카리는 그냥 자카리예요.”

이엘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연녹색 눈동자가 제 아버지를 빤히 노려 보았다.

“아무리 부모님이라 하셔도, 헛된 소문으로 자카리를 함부로 대하시면 화낼 거예요.”

“이런, 이엔. 그러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단다.”

블랑쳇 자작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의 손을 꼭 붙든 자작이 진심 섞인 어조로 말했다.

“다만 네가 생각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자작의 표정은 안도 한 기색을 품고 있었다. 정말이었다. 비록 소공작을 먼발치에서 봤을 따름이지만, 적어도 소공작이 제 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바로 느껴졌다.

‘그리고 보고 있자면, 우리 이엔도 많이 웃었지.’

처음 연회를 주도하는 이엘리였다. 제 딸은 약간 긴장한 낯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카리가 곁에 다가올 때만큼은 항상 밝게 미소를 짓곤 했다.

딸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소공작뿐일 터다. 이엘리를 보던 자작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자라서……”

“자카리와 결혼한 지도 거의 5년인 걸요. 자란 게 당연하죠.”

이엘리는 난처하게 웃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 좋은데, 가끔 너무 감정이 격해질 때가 있다.

“그것보다 아빠, 내 남편 엄청 잘 생겼죠?”

“으음……“

이엘리의 자랑스러운 물음을 들은 자작은 고뇌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부부였다. 그것도 상당히 잘 어울리는 부부.

게다가 자작은 이성적으로는 자카리만큼 아름다운 청년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찬란한 은발과 짙푸른 눈동자,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화려한 맹수 같은 청년. 하지만……“

'그래도 내 딸이 내 앞에서, 다른 남자가 멋있다는 소리를 할 줄이야.’

자작은 흐린 눈으로 이엘리를 보았다. 딸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엘리는 어렸을 때도 ‘아빠와 결혼할래!’ 류의, 아버지를 흐뭇하게 하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아빠?”

“……그래.”

블랑쳇 자작은 약간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때, 뚜벅뚜벅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블랑쳇 자작이십니까?”

“예?”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자작 부부 가 화들짝 놀랐다. 그들 앞엔 헤센 바이츠 공작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테론 헤센바이츠입니다.”

“헤, 헤센바이츠 공작 각하?”

자작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아무리 공작과의 만남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실 제로 만나는 건 역시 다른 문제였다.

광대한 북부를 지배하는, 제국 유일의 공작이 아닌가. 자작은 황공해 하는 표정으로 공작을 마주 보았다.

이엘리도 공작의 등장에 놀랐다.

“고, 공작님?”

자작 부인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자작 부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블랑쳇 자작 부인이시군요.”

이렇게 두 여자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니, 이엘리는 자작 부인과 꽤나 닮은 모습이었다.

특히 가녀린 체구가 닮았다. 공작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목례를 한 공작이 말을 이었다.

“따님을 훌륭하게 키워서 제게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 러 왔습니다.”

“고, 공작님께서 저희에게……?”

이제 부부는 혼이 나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작은 아무렇 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는 제 사돈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사돈이라니, 사돈이라니! 자작 부부는 경악했다.

그 얼음장 같다는 헤센바이츠 공작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꿈에도 몰랐다. 사실 헤센바이츠에서 초대장 이 왔을 때만 해도 기절할 뻔했는데.

“사실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과분한 아이입니다.”

“……예?”

부부가 이구동성으로 공작에게 되 물었다. 하지만 공작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자란 자카리를 여러모로 저 아 이가 보살펴 주고 있죠.”

이엘리, 정말 그런 거니? 그런 뜻을 담아 두 부부가 이엘리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이엘리는 난처하

게 미소했다. 자카리가 유리멘탈이긴 하지. 그래도 이렇게 칭찬 들을 정도는 아닌데.

“헤센바이츠 공작가에 저 아이가 들어와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예, 예에……”

이제 과부하가 걸린 두 부부는 멍 하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공작은 자작 부부를 보았다.

‘어째서 이엘리가 저렇게 다정한 성격을 가지고 자랄 수 있었는지…… 알 것도 같군.’

두 부부는 천성적으로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부부 밑에서 자랐으니, 그 영 향을 받지 않을 리 없지 않나. 공작은 드물게 즐거운 어조로 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좋은 며느리를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자작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

‘이런 때에는 뭐라고 해야 하지? 소공작을 우리 딸의 남편으로 맞이 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하지만 아직 두 부부는 자카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 않나. 입발린 말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자작이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 자작 부인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 다. 그런데 그때.

“안녕하십니까, 자카리 헤센바이츠입니다.”

근처에 다가온 자카리가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저 공작성의 연회나 구경하고 돌아갈 생각이 던 자작 부부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환대에 체할 것 같았다.

“저를 중심으로 하는, 좋지 못한 소문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자카리는 직구로 제가 가진 ‘겨울의 마법’에 대해 언급했다. 자작 부부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어쩌죠? 소공작께서 저렇게 말씀 하시는데……’

‘괘, 괜찮다고 대답해야 할까요?’

두 부부가 서로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부부에게 자카리가 무언가를 불쏙 내밀었다.

“이, 이건?”

“한번 읽어 보십시오.”

자카리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부부를 바라보았다. 열렬한 눈빛에 못 이겨, 자작은 묵직한 서류 뭉텅이를 내려다보았다.

서류 첫 장에는 단정한 글자로 보 고서의 제목이 기록되어있었다.

“……헤센바이츠 공작령의 마물 침 입 감소율에 대한 보고서?”

자작은 당황한 목소리로 제목을 읽었다. 자카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자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북부가 마수의 침입으로 위험하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그건 옛일 입니다.”

“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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