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5. 성인의 길목에서 (2)
군데군데 등불을 켜 부드러운 주홍 색으로 일렁거리는 긴 복도를 둘은 나란히 걸었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오늘은 조용 했다.
잠시 후 그들은 그녀의 방에 도착했다.
“그럼, 잘 자. 자카리.”
방문을 닫기 전, 이엘리는 수줍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카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잘 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녀가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자카리는 기나긴 한숨을 내 쉬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덮는다.
짙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이엔.”
그는 이를 깨물었다. 솔직히 기뻤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을 기뻐하 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 에도 기뻐 견딜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너 때문에 가끔…… 난 정말 미칠 것 같아.”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 견딜 수 없다. 심장 위쪽을 손으로 꾹 억누르던 자카리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연회의 아침이 밝았다.
이엘리는 아침부터 공작 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지막 연회 준비에 만전을 가했다. 음식도, 술도, 연회장의 장식까지도 모두 완벽했다. 푹 한숨을 내쉴 때.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군.”
“아, 공작님.”
이엘리는 생긋 웃었다. 어느새 공작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자카리의 성인식에의 홀을 개 방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쨌든 헤센바이츠의 차기 후계자니까.”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지 만, 이엘리는 이제 공작의 표정을 좀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조금 부끄러우신가 보네.’
평소 무뚝뚝한 성미를 갖고 있어서 일까. 공작은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는 데에 서툴렀다.
처음 만났을 무렵의 자카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카리는 그녀와 지내며 그런 성미를 제법 고쳐 나갔다.
“에메랄드 홀에도 가 봤다. 장식이 폴륭하더구나.”
“공작님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 행이예요.”
이엘리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 했다. 공작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 여 보였다. 공작을 보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방금, 공작님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친 것도 같은데.
‘성인식 행사는 은의 홀, 연회장은 에메랄드 홀이지?’
이엘리는 머릿속으로 한껏 꾸며 둔 에메랄드 홀을 다시 떠올렸다. 귀빈을 모시는 작은 홀이라지만 그건 상 대적인 의미일 뿐, 에메랄드 홀도 사람이 100인 이상 들어갈 수 있는 규모였다.
“아까 주방이랑 연회장까지 다 둘 러봤어요. 공작님이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랬나?”
“네.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해 뒀고, 와인 저장고의 와인도 양이 상당하니까요.”
그녀가 방글방글 웃었다. 이렇게 많은 손님들을 맞이해 본 건 처음이었이지만, 그래도 손님들을 접대하는 데 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공작에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부족함 없이 연회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참, 이엘리.”
“네?”
공작이 이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에게 말했다.
“연회에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어떤 것이든 네가 쓰고 싶은 만큼 써도 된다.”
으잉?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공작님, 지금 뭐라고 하셨지?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정말로 착각하고 말아요.”
“진심이다. 넌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그 정도 권한은 당연히 사용해도 돼.”
이엘리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고 보면, 이엘리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는 가랑비에 옷소매가 젖 어 가는 것처럼 천천히 부드러워지 고 있었다. 공작은 약간의 걱정을 담아 말했다.
“다만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몸이 상하면 연회를 진행하기 어려울 게 아니냐.”
……지금 공작이 해 준 말만 해도 그렇다. 예전이었다면 절대 기대할 수조차 없을 발언 아닌가.
“네, 그럴게요.”
이엘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그로는 성에 안 차는지,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로렌 백작 부인이 귀찮게 굴면 언제든지 내게 오거라.”
“걱정 마세요. 그런 건 역시 제 문제니까요.”
이엘리의 눈동자에 호승심이 서렸다. 사실 이번 연회 준비보다도 백작 부인을 대하는 게 더 귀찮았다. 백작 부인은 시도 때도 없이 기어오 르려고 했기에, 적절하게 밟는 것도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공작님도 좋지만, 저에게는 자카리가 있다고요.’
어려운 상황이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결국 자카리였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렇게 연회 당일이 밝았다. 이엘리는 공작 성을 방문하는 수 없는 귀 빈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어서 오세요, 툴란 남작 부인.”
“어머나, 레이디 헤센바이츠.”
툴란 남작가는 비록 남작의 작위를 가졌지만, 대대로 이름 높은 창기병을 배출하는 북부의 고명한 가문 중 하나였다.
대대로 마수와 야만족 때문에 군사가 중요한 북부에서 이름이 높다.
“북부의 안주인이 되실 분을 이렇게 뵙게 되네요.”
툴란 남작 부인은 빙그레 웃었고, 이엘리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는 어쨌든 북부의 군주인 헤센바 이츠의 차기 안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그녀의 세심함은 남작 부인을 기분 좋게 했다.
‘제국의 귀족 명단을 모두 암기해 둔 보람이 있네.’
귀족 명단을 외우느라 하얗게 지새운 밤이 며칠이었던가. 이엘리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두 사람이 걸어왔 다. 순간 가슴이 터질 듯 뛴다. 그녀가 외쳤다.
“엄마, 아빠!”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헛숨을 삼켰다. 앗, 나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엔, 우리 딸!”
하지만 부모님이 그녀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오자, 이성은 말끔히 휘발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부모님 에게 매달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제 어머니를 바라 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엄마, 요새는 몸은 괜찮아요? 여 기까지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어요?”
“물론이지. 우리 딸이 걱정해 줘서 더 튼튼해진 것 같은걸.”
이엘리를 꼭 닮은 블랑쳇 자작 부인은 기쁨에 가득 차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는 곧장 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나이보다 꽤 젊어 보이는 블랑쳇 자작은 어느새 눈이 글씽해져 있었다.
“우리 이엔은 힘든 건 없고?”
“그럼요, 다들 저에게 얼마나 잘해 준다고요."
이엘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린다.
“아빠도 잘 지냈죠? 요새 영지 상황은 어때요?”
“빚이 모두 정리되었으니 이제 크게 문제 될 건 없단다.”
블랑쳇 자작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모두 네 덕분이야.”
“에이, 뭘요.”
이엘리는 쑥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자작에게 입을 열었다.
“아차, 저 손님을 맞아야 해서요. 두 분은 먼저 들어가 계세요, 알았죠?”
“그럴게, 우리 딸.”
부모님은 흐뭇한 얼굴이 되어 연회 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엘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자카리와 공작은 나란히 선 채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기뻐 보이는군.”
“그러게요.”
부자의 의견이 드물게 합치되었다. 자카리는 공작을 살짝 쳐다본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두 분을 초대하는 것,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다.”
공작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어서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큼큼 헛기침을 한 자카리가 말했다.
“그럼 전 이엔에게 가 보겠습니다.”
“그러거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곧장 연회장으로 향했다. 시선 끝에는 이엘리만이 있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점차 달아오르 고 있었다. 이엘리가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게 느껴지는, 잘 꾸며진 연회장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 이었다.
자카리는 이엘리에게 빠르게 걸어 갔다.
“이엔.”
“아, 자카리.”
그녀가 연녹색 눈동자를 곱게 휘면 서 그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순간 넋을 놓을 뻔했다.
‘……아까 전에도 봤는데 왜 이러 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늘의 이엘리는 흡사 요정처럼 보였다. 결 고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리고,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섞은 머 리 장식을 꽂은 모습이었다.
순백색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는 그녀의 가녀린 몸매를 부각시킨다. 자카리는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 너, 진짜 예뻐.”
“고마워. 그 말, 아까 전에도 하긴 했지만.”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자카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제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만 모시면 돼.”
황태자와 황녀는 따로 이엘리가 맞이하는 게 아니라, 황실의 시종이 함께 와서 두 남매의 도착을 알린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그 자리에 서서 두 황족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
“황태자 전하, 그리고 황녀 전하 납십니다!”
때마침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실의 시종이였다.
자리에 모인 귀빈들이 낮게 술렁거렸이다.
사람들 사이로 두 황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의 단둘뿐인 황손, 황태자와 황녀였다.
‘저 사람들이 황태자와 황녀구나.’
모든 점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한 두 남매는, 단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각기 다른 생김새이긴 하지만 서로 화려한 외모를 지녔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황족임을 증명하는 투명한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황족들의 시조인 리펜베르크 경은 회색 기사라는 별칭이 있었다지.’
황태자가 권태로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작과 자카리, 그리고 이엘리가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 헤센바이츠 공. 반갑습니다.”
여타의 귀빈들과 다르게 두 황족만 큼은 공작이 직접 접대를 했다.
마주 인사를 남긴 황태자의 눈동자 가 데구루루 구른다.
그 시선은 공작과 자카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이엘리에게 멈췄다.
“……“
황태자는 짧게 침묵했다. 연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황태자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저 여자.’
지금 제가 느끼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슴이 들 뜨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성을 보면 서 이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없는데.’
객관적으로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여 자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연녹색 눈동자, 아샤꽃잎처럼 쏟아지는 분홍 색 머리채. 하지만 단순히 그녀의 미모 때문에 그녀를 바라보게 되는 게 아니다.
‘도대체 뭐지, 이 느낌은.’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전 이렇게 강렬한 소유욕을 느껴 본 적 이 없었다.
당장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야 할 것만 같다. 심장박동이 빨라 진다. 황태자는 그녀를 홀린 듯이 보았다.
‘뭐지?’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이엘리는 희미한 불쾌감을 느꼈다. 황태자가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그가 나긋한 어조로 말한다.
“소공작의 부인께서 이렇게나 아름 다운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감사합니다.”
이엘리는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객관적으로 황태자는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 진회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정말 싫었다.
‘왜 사람을 저렇게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거야?’
다시 한 번 씩 미소를 지은 황태자가 시선을 돌리고는 성의 없이 손 짓을 해 황녀를 불렀다.
“이쪽은 제 여동생, 안네로제입니다.”
마치 애완동물을 불러오는 것 같은 무례한 태도였다.
그럼에도 황녀는 사뿐사뿐 이쪽으로 걸어왔다. 꿀처럼 흐르는 짙은 금발과 고상해 보이는 연회색 눈동자. 우아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엘리는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남편과 한때 혼 담이 오갔던 사이인데,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필요는 없잖아. 솔직히 좀 질투가 나니까.
‘……질투라고?’
그리고 이엘리는 스스로가 했던 생각에 퍼뜩 놀라 버렸다. 바로 그때, 황태자가 말을 꺼냈다.
“참, 황제 폐하께서 직접 소공작에게 칭찬을 전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