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화
“응. 백작 부인이 좀 귀찮게 굴기는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
“……내가 해결해 줘?”
금세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되어 자카리가 되물었다. 이엘리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이건 내 문제니까.”
“네 문제, 내 문제가 어디 있어. 난 네가 무례한 행동에 시달리는 건 못 참아.”
“나도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문제는 함께 해결하는 게 맞다, 그렇게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와 인물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질 수 있으니까. 이엘리는 힘을 주어 말했다.
“난 괜찮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절 대로 중간에 끼어들지 마. 알았지?”
이엘리는 황가가 자카리를 불쾌하 게 볼 수 있는 여지는 모두 차단하고 싶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카리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덮은 앞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았어. 그래도 내가 뭔가 도와줄 만한 게 있다면 말해 줘.”
“그렇게 할게.”
이엘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시선이 삽시간에 부드러워졌다.
“참, 이엔. 오늘 네게 전해 줄 얘 기가 있어.”
“나한테?”
이엘리는 소파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자카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번 성인식에는 장인어른과 장모 님도 초대할 생각이야.”
“뭐? 그래도 돼?”
이엘리가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떴다. 반짝 밝아졌던 낯이 잠시 후 시무룩하게 변했다.
“하지만 공작님이……”
“아버지 걱정은 하지 마. 이미 허 락하셨으니까.”
“공작님께서 내 부모님을 초대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엄격한 공작님께서? 자카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응. 대신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하지만……”
“조건이라니?”
“요새 공작령 외곽에 소형 마물들이 가끔 내려온다는 소문이 있거든.”
자카리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반짝였다. 이엘리의 뺨을 어루만지며 자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쓸어버리려고.”
“뭐라고?”
기겁한 이엘리가 언성을 높였다. 아니, 무슨 마물을 쓸어버린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해? 아무리 소형 마물이라지만, 기본적으로 마물은 기사 한 명 이상이 달라붙어 처리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위험하잖아!”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 말에 이엘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카리는 그녀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웃었다.
“이엔, 그렇게 인상 쓰면 미간에 주름 생긴다.”
“자카리."
이엘리는 자카리를 빤히 올려다봤 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시무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설마 내 부모님을 초대하기 위해 무리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
“그런 거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 봐, 공작님께서 억 지로 시키신 거 아니야?”
그녀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때 자카리가 그녀의 양 뺨을 양손으로 꾹 잡아 늘렸다.
“이엔.”
“……왜애.”
이엘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뺨을 늘리고 있어 발음이 제멋대로 샌다. 그 말을 듣던 자카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시지 않았어. 이건 내 선택이야.”
“그래도!”
이엘리는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자카리의 짙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네 부모님을 처음으로 북부에 초 대하는 거잖아.”
“……“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뺨을 놓아준 자카리가 고개를 숙여 이엘리와 시선을 맞췄다.
“네가 안전하게 살고 있다고, 안정 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어.”
“그래도……”
이엘리는 어쩔 줄 모르고 말꼬리를 늘였다. 잠시 입술을 삐죽대던 그녀가 툭 질문을 던졌다.
“그, 그렇다고 해도 굳이 마물 토벌까지 할 필요 있어?”
“어차피 영지 외곽에 들끓는 소형 마물들은 무척 약해.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걸.”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해 봤자 3일 정도?”
“그렇지만!”
“이엔, 난 네 부모님께서 안심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침착한 목소리가 이엘리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대외적인 소 문은 별로 좋지 않잖아?”
“소문?”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난 북부의 괴물처럼 보일 테니까.”
“너, 괴물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이 나 말했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이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자카리는 가슴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언제나 네가 그렇게 대답해 줘서 난 정말로 기쁘지만.”
“진심이야, 난 네가 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싫단 말이야!”
이엘리는 언성을 높였다. 자카리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아.”
“그런데 왜……!”
“하지만 난, 네 부모님께서 적어도 내게 신뢰를 가질 수 있으셨으면 좋겠어.”
“……어?”
이엘리는 어쩔 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가 그녀의 이마에 촉 소리 나게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너도 날 믿어 줬으면 좋겠고.”
“그, 자카리.”
“고작 소형 마물일 뿐이야. 널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테니까.”
손을 뻗은 자카리는 그녀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 후, 나지막이 속삭인다.
“믿어 줄 거지?”
자카리가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 보였다.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못 살아, 내가 정말.”
불퉁한 중얼거림에 자카리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녀는 팩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해.”
“물론이지.”
자카리가 선선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카리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켰다.
고작 이틀이란 시간 동안에 소형 마물들을 모조리 토벌하고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 * *
로렌 백작 부인과의 이런저런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카리의 성인식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황태자와 황녀는 자카리의 성인식 삼 일 전에 오기로 했다.
두 황족이 도착한 당일 저녁에 대 규모 연회를 연다. 다음 날에는 남자들은 사냥회, 여자들은 티타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자카리의 성인식 행사지.’
이엘리는 턱을 괴고 이번 행사의 차례를 되짚었다. 사실 앞서 치르는 연회와 사냥회에 비하자면 성인식은 상대적으로 챙길 것이 적었다. 공작이 성인식을 진행할 테니, 홀만 꾸미면 된다.
‘이번 성인식에는 은의 홀을 개방 한다고 했던가.’
사실 그 점은 조금 놀라웠다. 은의 홀은 헤센바이츠의 상징인 은룡을 주제로 꾸민 가장 오래된 홀이다. 당연히 공작 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 고, 화려하며, 중요한 행사에만 사용하곤 한다.
‘보통은 공작 작위를 계승하거나, 공작 부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에나 개방하는데.’
공작의 이 행동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공작이 자카리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명백히 황족을 겨냥한 행동이었다.
“이엔.”
“아, 응. 자카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때마침 자카리가 성큼성큼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이엘리는 코끝을 찡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냥, 내일이면 황족 남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지금의 이엘리의 목소리는 확연히 어색했으니까.
“그게 왜?”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이엘리는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조심스럽게 말한다.
“안네로제 황녀님은 원래 네 아내가 되실 분이었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자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가 그녀에게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왜? 혹시 너, 결혼을 후회하고 있는 건……”
“그런 건 절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데서만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
이엘리는 단호한 얼굴을 했다. 자카리는 약간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게, 제대로 설명은 하지 못하겠는이데.”
그녀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솔직 히 말하자면, 이엘리는 그 누구보다 도 안네로제 황녀가 불편했다. 과거 에는 자카리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 이 있었다지만, 소문은 모두 옛날 일이지 않나.
‘로렌 백작 부인만 해도, 소문이 좀 가라앉자마자 자카리에게 관심을 보였었고….’
지금의 자카리는 누가 봐도 탐낼 만한 인재였다. 원래대로라면 한미 한 자작가의 여식과는 만날 수도 없을 위치에 있는 사람. 황태자는 탐욕스러운 성정이라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안네로제 황녀를 결혼시키려 한 것도 황태자였으니까.’
이엘리는 황가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태자는 피를 나눈 여동생을 헤센바 이츠 공작가에 넣어 두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엔.”
자카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고요히 가라앉은 새파란 눈동자 가 그녀를 똑바로 본다.
“아까 전부터 너, 계속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건……”
이엘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런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너를 빼앗길지도 몰라 불안하다고? 황태
자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황녀가 아름답고 강인하게 자란 널 탐 낼까 봐 걱정된다고?
‘그러고 보니, 난 왜 불안해하는 거지?’
흠칫 어깨를 굳힌 이엘리는 저에게 자문했다. 솔직히 결혼에 대해 큰 욕심이 없던 그녀였다.
‘자카리와 결혼한 목적은 일차적으로 집안의 빚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잖아.’
하지만 이제 빚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더 이상 지금 관계에 매달 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카리를 잃어버릴까 봐, 그가 그녀를 아껴 주지 않을까 봐.
‘어째서?’
그녀는 이제 혼란스러워졌다. 엉킨 실처럼 머릿속이 엉망이다.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네 결혼 상대가 되셨을 황녀님이 오시니까?”
그러자 이엘리를 빤히 응시하던 자카리의 귓바퀴가 화륵 붉어졌다. 그 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혹시.”
“응?”
“그, 그러니까.”
자카리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여름의 맑은 하늘처럼 따스한 시선이 그녀를 슬쩍 곁눈질한다.
“……질투하는 거야?”
“뭐?”
이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질투? 말도 안 돼. 자카리는 그저 남동생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것뿐…….
아니, 정말 그런가? 그녀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게. 그게, 그러니까.”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이엘리는 중얼거렸다. 정말로 내가 질투를 하는 건가? 어째서?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질투 안 하잖아!’
그녀는 그를 남동생처럼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때 자카리가 손사래를 쳤다.
“아냐, 됐어. 말하지 않아도 돼.”
“……응?”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빼꼼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걱정하지 마.”
자카리의 손가락이 이엘리의 뺨을 스르륵 어루만졌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꼈을 부드러운 감촉이, 지금만큼은 이상 하게 또렷하게 느껴진다. 자카리의 푸른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내 아내는 오직 너뿐이니까.”
“어……”
“그러니까 너야말로……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카리의 뺨이 흑 붉어졌다. 이엘리의 얼굴도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저기, 자카리.”
“이엔, 그보다 이만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어. 시간이 늦었으니까.”
어색한 공기를 날려 버리려 자카리가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으응……”
이엘리는 살짝 손을 내밀었다. 손 과 손이 맞닿고, 서로 감아쥐는 그 동장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을 그 손을 바라보며, 왜 이렇게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지.
“가자.”
자카리의 말에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두 사람은 입술을 꾹 다물 고는 복도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