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조금만 참아 줘, 메리. 성인식이 끝나면 백작 부인은 돌아갈 테니까.”
“……솔직히 아가씨가 제일 힘드시 죠. 저희가 뭐라고요.”
불퉁한 얼굴이나마 메리는 그렇게 말했다. 메리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이엘리가 빙긋 웃었다.
“고마워. 자, 그럼 오늘의 일을 하 러 가 볼까.”
그녀는 기운차게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 기분은 백작 부인을 만나자마자 망가지고 말았다.
백작 부인은 응접실에서 이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을 일부러 차갑게 굳힌 게 티가 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
이엘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하 게 기울였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불쾌감으로 찡그려졌다.
“뭐하시는 건가요?”
“예?”
“단둘이 있는 자리잖아요.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예를 갖추셔야죠.”
이엘리는 마치 ‘오늘 산책이라도 가는 게 어때요?’라고 말하듯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께서는 방금 절 레이디 헤센바이츠라고 부르지 않으셨나 요?”
로렌 백작 부인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엘리는 눈매를 곱게 휘며 미 소 지었다. 싸늘한 웃음이었다.
“그 호칭을 보아하니, 백작 부인께 서는 제가 소공작의 부인임을 잘 인지하고 계시는데.”
“……레이디 헤센바이츠.”
“엄연히 공작가의 일원인 저를, 어째서 백작 부인께서는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하시나요?”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부인을 마주 보았다. 황가를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예의 문제는 기 본이지 않나. 결국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오만하게 대답한 이엘리가 먼저 소 파에 착석했다. 비스듬히 눈을 들어 백작 부인을 응시한다.
“이제 자리에 앉아도 좋아요.”
“……“
로렌 백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며칠 동안 함께 행사를 기획해 본 바, 백작 부인은 일부러라도 스스로의 위치를 잊고 공작가에 간섭하려 들었다.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이런 식으로 내가 윗사람임을 알 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까딱하면 백작 부인이 틈을 노리고 대거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 성내 사용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오늘은 어디서부터 이야기하기로 했죠?”
“사냥회에 관한 예산안, 그리고 사냥회의 구성과 티타임에 대해 말하 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저건 잊지 않아서 다행이네. 이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생각해 두신 게 있나요?”
“네, 있어요.”
아무래도 백작 부인은 이엘리를 만 나며 조금 벼르고 온 것 같았다. 백 작 부인이 입술을 열었다.
“이번에는 황태자 전하뿐 아니라, 황녀 전하께서도 소공의 성인식에 참석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난 별로 반갑지 않고, 자카리도 마 찬가지인 것 같지만. 이엘리는 뚱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두 황족이 이번 성인식에 참석하는 게 굉장히 기대되는 얼굴이었다.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사냥회를 진행할 때 그 시간에 레이디들은 티타임을 갖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 이는 건가. 생각하며, 이엘리는 백작 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그 자리를 주최할까 해요.”
백작 부인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이엘리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내가 저 자리가 얼마나 중요 한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저러나?’
무려 황녀가 북부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참석하는 티타임이었다. 당연 히 그 자리는 헤센바이츠의 안주인 이 담당해야 했다. 그런데 그 주최를 자신이 맡는다 말하다니, 개념이 있기는 한가?
“지금 무슨……!”
반사적으로 입을 열던 이엘리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잠깐 머리를 굴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 정말인가요?”
이엘리가 이렇게 순순히 허락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백작 부인이 반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요.”
그녀는 선선히 미소 지었다. 황가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한발 양 보한 것이다. 자카리가 작위를 잇기
전까지는 황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 그녀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엘리와 동갑내기인 황녀 안네로제는 자카리와 한때 혼담이 오갔던 사이다.
솔직히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좀 불편했다. 자카리를 의심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복잡했다.
‘만약 내가 티타임을 주최하게 된다면, 황녀 전하와 어쩔 수 없이 계 속 대화해야 할 테니까.’
차라리 대규모 연회는 얼굴만 보고 인사를 나눈 후 지나가면 되지만, 티타임은 좀 다르다.
티타임의 주최가 된다면 티타임에 참석한 귀부인들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 나갈 의무를 갖는다.
‘뭐, 로렌 백작 부인도 그렇게 자기 자랑을 하는걸. 한번 그 실력도 구경할 겸…… 맡겨 보지.’
그녀는 약간 삐뚤어진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바꿀까, 부인이 황급히 말했다.
“그럼 제가 티타임을 주최하기로 결정된 겁니다. 맞죠?”
“네, 그건 뜻대로 하세요. 다만, 제 게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은근슬쩍 감사의 인사를 생략하려 던 부인이 움찔했다. 이엘리는 턱을 괸 채 부인을 응시했다.
“……호,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 사합니다.”
“그래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건네는 인사를 들으며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안은 모두 짜 왔나요?”
“네, 여기.”
백작 부인은 당당하게 서류를 내밀 었다. 이엘리는 서류를 받아 들어 예산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상에.’
예산안의 상태를 보던 이엘리는 눈 살을 찌푸렸다. 팔랑팔랑 서류를 넘기는 손길이 바빠졌다.
‘이거 상태가 심각한데?’
예산안에 기록된 금액과 실제 배정 되기로 한 금액 자체가 달랐다.
애초에 그녀가 백작 부인에게 원했 던 건, ‘이엘리가 지정한 일정한 금 액’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분배 하는 것’이었다.
‘이 예산안, 애초에 내가 지정했던 금액 자체를 무시하고 있잖아.’
연회와 사냥회 등, 모든 행사의 기 본은 예산안을 짜는 것부터였다. 이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서로 언성이 높아질 줄은 몰랐다.
이엘리는 손에 서류를 든 채 백작 부인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보다 백작 부인. 안주인으로서 연회를 주관하신 적이 있다고 하시 지 않으셨어요?”
“당연하죠, 로렌 백작가는 황가와 도 연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인걸요.”
헤센바이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아마 의도적인 일일 것이다. 이번에 꽤나 호되게 당한 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일 테지.
하지만 그렇게 황가를 끌고 와 봐 야, 이엘리는 두렵지 않았다.
“황가와도 연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이, 예산안 하나도 제대로 짜지 못하시나요?”
이엘리는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흑 붉어 졌다. 부인이 항변을 했다.
“말도 안 돼요! 제가 얼마나 노력 하여 짜 온 예산인데.!”
“노력은 중요하지 않아요. 금전이 오가는 문제인데, 이런 식으로 하시 면 곤란하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리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설명을 했다.
“잘 봐요. 처음에 제가 지정한 금 액과 백작 부인이 써 둔 총 예산 자체가 다르잖아요.”
“그 정도 오차는 대형 행사를 진행 할 때는 허용할 수 있는 부분이에 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엘리는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손에 든 펜을 까닥거리던 이엘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부인. 이 정도 오차를 내는 회계관이 있다면, 그 회계관은 당장 목이 날아갈걸요.”
“……!“
백작 부인은 입술을 짓씹었지만, 차마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구구절절 옳았으니까.
이엘리는 펜을 들어 백작 부인이 적어 둔 예산 중 하나를 죽 그어 버렸다.
“게다가 꽃 장식은 왜 이렇게 많아 요? 꽃에 파묻혀 죽을 일 있어요?”
이엘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백작 부인은 뺨을 붉혔으나 항변하는 목소리는 쪼그라든 채였다.
“하지만 무려 황족을 모시고 갖는 티타임 아닙니까.”
“그래 봤자 티타임을 하는 천막 안의 화병에나 꽂을 텐데, 이 금액이 필요하다고요?”
기가 막힌 목소리로 이엘리가 되물었다. 백작 부인은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이엘리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엘리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꽃 장식은 헤센바이츠의 온실에서 충당할 거니, 이 금액은 아예 빼세요.”
연녹색 눈동자가 서류를 꼼꼼히 들 여다보았다. 잠시 후, 탁 소리와 함께 서류를 접어 치운다.
“로렌 백작 부인.”
“예, 예?“
놀란 백작 부인이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이엘리는 냉정한 낯으로 공작 부인을 눈 안에 담았다.
“부인께서는 지금 이 예산안이 ‘사냥회’를 위한 것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계신 것 같네요.”
“그건…… 저는, 그러려던 게 아니 라.”
“한번 제대로 고려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백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 리 예산안의 빈 구멍을 이엘리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미 수 없는 구멍을 만천하에 드러낸 거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절 실망시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연녹색 눈동자가 곱게 접히며, 이엘리는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로렌 백작 부인은 이미, 이엘리가 저 화사한 미소로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가는지 보았다. 백작 부
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두고 봐. 황녀 전하를 모시고 티 타임을 열기만 하면...’
그때 저 망할 남부 계집애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것이리라. 백 작 부인은 그리 결심했다.
“대답, 안 하시나요?”
그때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열패감에 휩싸인 채, 백작 부인 은 자신의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답한 이엘리는 물러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백작 부인은 대강 인사를 올린 후 몸을 돌렸다. 뭐, 이제 스스로 인사를 한다는 게 긍정적인가. 그녀는 차게 식은 눈을 했다.
“리펜베르크 황가, 그리고 헤센바 이츠 공작가라.”
이엘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건국 신화에서부터 악연으로 맺어졌던 황가와 헤센바이츠.
비록 황가는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헤센바이츠는 한때 황위를 가졌을 정도로 강력한 가문이었다.
“헤센바이츠는 황위를 되찾지 못하는 게 아니라, 되찾지 않는 것이라 고 했던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황위를 되찾지 않는다. 이 얼마나 오만한 발언인가.
‘그런 가문이 황가의 귀찮은 간섭을 일정 부분 감내하고 있다니.’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들의 강력 함을 증명하는 일화로, 아샤꽃 문장에 관련한 일화가 있었다.
자존심이 드높은 황가는 공작가를 대놓고 견제했지만, 그럼에도 황가의 문장 중 하나인 아샤꽃을 공작 가가 사용하는 걸 막지 못했다. 마음이 멋대로 헝클어진다.
이엘리는 미간을 구겼다.
‘아마 자카리는 자신이 작위를 잇는 문제 때문에, 황가의 간섭을 받아들인다고 말할 테지만……”
하지만 그 간섭을 받아들이는 이유에, 그녀 자신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점에 이엘리는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푹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관자놀이가 쿡쿡 쑤셔 왔다.
‘아무튼, 그 황족들이 헤센바이츠에 직접 방문한다니.’
그때 따스한 손이 그녀의 눈을 가렸이다. 그와 동시에 솜털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쓰다듬었다.
“누구게?”
“누구긴 누구겠어, 자카리잖아.”
“재미없기는.”
작게 투덜거린 자카리가 손을 내렸다.
이엘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소파 등받이에 온몸을 기댄 채, 자카리는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소곤댄다.
“오늘도 고생했어, 이엔.”
“고마워.”
그녀가 생긋 웃었다. 하루 종일 로 렌 백작 부인과 입씨름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생긴 남편의 얼굴을 보 니 약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자카리가 물었다.
“일은 어려운 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