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화
공작은 매끄러운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카리 또한 지금은 공작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 뒤편으로는 직접 공작가의 분 위기를 보고 파악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을 터.”
“공작가의 분위기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네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자카리에게도 물려준, 헤센바이츠 특유의 짙푸른 눈동자가 자카리를 제 안에 깊숙이 담았다.
“이엘리.”
그 이름에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공작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마 네가 이엘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황족들도 그나마 이엘리를 존중하겠지.”
이엘리를 존중한다. 자카리의 눈이 싸늘해졌다. 황가가 이엘리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황녀 대신 그녀를 결혼시킨 주제에, 한미 한 자작가의 여식이라며 함부로 휘 두르려 했다.
“그녀가 가장 안전해지려면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해.”
공작의 말에 자카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공작의 언사에
반발하곤 하는 자카리였지만, 이엘리에 관련한 일만큼은 공작의 조언을 귀담아듣곤 했다. 공작이 제 손을 까닥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거라. 피곤하구나.”
“……“
곧장 방을 빠져나가려던 자카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던 자카리가 속삭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동시에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닫힌 방문을 보는 공작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이엘리는 온실에서 꽃을 꺾던 중 공작을 마주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질문을 했다.
“공작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제게요?”
이엘리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평소의 공작이라면 할 말이 있다면 그녀를 집무실로 호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온실까지 찾아오다니, 뭔 가 중요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생각하던 때.
“이엘리, 네게 이번 일이 좀 불편 할 것을 안다.”
“예?”
이엘리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공작은 다소 머쏙한 낯을 하고는 낮 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로렌 백작 부인의 일 말이다.”
“아아……”
지금 공작님께서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시는 건가? 이엘리는 살며시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너와 백작 부인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정이 있다 보니.”
“괜찮아요.”
이엘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작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미 조 금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마 황가에서 압력을 넣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맞나요?”
공작은 순간 놀랐다. 그녀가 거기까지 예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로렌 백작 부인은 자카리의 외숙모이니, 거절 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고개를 가로저은 이엘리가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동자는 따스한 빛에 차 있었다.
“그보다 절 신경 써 주셔서 여기까지 오신 거죠? 감사해요, 공작님.”
“……“
“사냥회와 연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게요. 저를 믿고 맡겨 주셔서 정말 기뻐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이엘리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로렌 백작 부인이 끼게 되긴 했지만, 공작은 연회와 사냥회를 이엘리에게 맡겼다. 그녀를 믿고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래.”
잠시 머뭇거리던 공작은 멋없는 대답만을 내놓았다. 어느새 이엘리는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고, 그런 그녀는 자카리와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델. 눈앞의 아가씨를 바라보던 공작은 잃어버린 아내의 이름을 입 안으로 작게 불러 보았다. 네가 이 아이를 보면 무어라 할까.
“참, 이엘리.”
“네?”
“앞으로 누군가가 너를 ‘레이디 블랑쳇’으로 부르게 두지 말거라.”
공작의 눈동자가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렌 백작 부인이 이엘리 에게 ‘레이디 블랑쳇’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눈을 가늘게 뜬 공작이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넌 ‘레이디 헤센바이츠’니까.”
“그럴게요, 공작님.”
왠지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이엘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렸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안주 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다.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공작님께서 이제 날,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 이야.’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으로 이엘리를 일별한 공작이 온실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콩콩 뛰어서, 이엘리는 양손으로 심장 위를 지그시 눌렀 다. 인정받는다는 건 이렇게 행복한 거였다.
“이엘리.“
그때 자카리가 온실 안으로 쏙 들 어왔다. 아마 이엘리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방금 전에 아버지가 나가신 걸 봤는이데, 아버지께서 네게 함부로 말씀 하신 건 아니지?”
자카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공작이 이엘리를 아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공작은 무뚝뚝한 성미였고, 상대의 기 분을 배려하여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오히려 좋은 말씀을 해 주셨어.”
“좋은 말씀?”
“응. 좋은 말씀.”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레 이디 헤센바이츠. 공작이 직접 그 호칭을 사용하라 말할 줄이야.
자카리는 그녀의 손에서 꽃을 담아 둔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뭐, 좋은 말씀이었다니까 다행이네.”
이엘리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그로 괜찮다.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곁을 걷던 그녀가 물었다.
“아참, 자카리. 성인식 하니까 생각나는데…… 네 열여섯 번째 생일 기억해?”
“물론 기억하고 있지.”
자카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엘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손을 감아쥐며 소곤거린다.
“그때 너, 네 생일인 것도 나한테 말 안 해 줬었잖아."
"그건 널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알아. 하지만 나, 나중에 네 생일을 메리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서운했었다고.”
이엘리는 문득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카리는 자신의 생일이 축하받아야 하는 날이라는 사실 자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주받은 괴물이었 고, 그 누구도 자카리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엘리는 그 사실 자체가 화가 났었다.
“너에 관한 이야기는 네 입으로 듣고 싶다고, 널 쫓아가서 고래고래 화를 냈었는데.”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엘리는 자카리의 방문을 쾅 밀어 열고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당황하여 얼어 붙은 자카리를 앞에 둔 채 잔뜩 성질을 냈었다.
‘왜 생일인 거 말 안 했어!?’
'그게, 챙겨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귀찮기만 한걸…… ’
‘뭐가 귀찮아? 하나도 안 귀찮아! 네가 이런 중요한 날을 말해 주지 않는 게 안 괜찮다고!’
씩씩 화를 내던 이엘리는 주방에 내려가 전날 먹다 남은 파이를 얻어 왔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기에 남은 건 그것밖에 없었다. 케이크 대용이라 면서, 파이 위에 촛불을 켠 채로 선 언했다.
‘촛불을 불어 끈 다음에, 소원도 빌어.’
'소원?’
‘그래, 소원. 원래 생일 초를 끄면 서 소원도 비는 거야. ’
두 눈을 깜빡이던 자카리는 다소 멋쩍은 얼굴로 촛불을 흑 불어 꼈었다.
이엘리는 그런 소년 앞에서 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고는 호기심 이 가득한 눈동자가 되어 자카리에게 묻는다.
‘무슨 소원 빌었어?’
‘그건……’
‘음, 아냐.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원래 생일 때 비는 소원은 말해 주는 거 아니랬어. ’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엘리가 말했다. 그리고 파이 위에 꽂혀 있던 초를 치우고는, 자카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반씩 나누어 먹었던 라즈베리 파이가 어찌나 달콤했던지.
‘생일 축하해, 자카리. ’
하지만 파이보다도 더 달콤했던 건, 이엘리가 작게 속삭였던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었다.
지금 제 곁에서 있는 이엘리를 바라보면서 자카리는 다시 한 번 그 때 빌었던 소원을 되새겼다.
‘너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겠어.’
자신의 마음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자카리는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그때 이후로 네가 내 생일을 꼬박 꼬박 챙겨 줬잖아.”
“그야 당연하지. 네 생일은 축하받아 마땅한 날이거든.”
“그래?”
“그럼, 넌 내 소중한 남편이니까.”
이엘리의 남편. 그 단어만큼 자카리를 행복하게 하는 단어도 없었다. 이엘리가 빙그레 웃었다.
“요새 네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이었다. 자카리를 억누르던 괴 물이라는 소문은 어느새 사라졌다. 현재의 그는 영지민들에게 사랑받는 소공작이자, 기사들의 충성을 받는 군주였고, 또한 북부의 가장 강한 전사였다.
“하지만, 이엔.”
이엘리의 부드러운 말을 듣던 자카리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뺨을 가만 어루만진다.
“그건 모두 네 덕이야.”
“아냐, 네가 노력했기 때문이지.”
간지러운 감촉에 눈웃음을 치던 이엘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노력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네 덕분이니까.”
“으음……”
자카리가 저렇게 말해 버리면 정말 내 덕분이라 믿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뭐, 자카리가 그렇게 생각 한다는데 뭐 어떠랴. 그녀는 흐뭇한 낯을 했다.
이엘리는 본격적으로 연회와 사냥 회 준비를 시작했다.
대규모 행사의 준비를 위해서는 반 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만난 로렌 백작 부인과 이엘리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로렌 백작 부인도 정말 너무하세요.”
“메리.”
주의를 주는 목소리로 이엘리가 메리를 불렀다. 하지만 이엘리의 머리를 꼼꼼히 빗기면서 메리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공작성 사람들은 모두 그녀 편이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이제 곧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 되실 분인데, 너무 무례하 잖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백작 부 인이 공작 성에 온 건 황태자 전하의 제안인걸.”
“하지만 백작 부인을 보고 있으면, 아가씨가 아니라 부인이 공작 성의 안주인처럼 보인다고요.”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분홍색 머리 카락을 느슨하게 묶어 내리며 메리 가 투덜거렸다.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리본을 모양을 내어 매만지면서, 메리는 부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떠들어 댔다.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죠. 백작 부인이 도대체 뭘 그렇게 잘하신다고 그러는지.”
“메리, 말을 조심해야지.”
“도대체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으시잖아요.”
입을 삐죽거리며 메리가 실내용 드레스를 가져왔다. 이엘리는 잠옷에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매번 허세만 부리시는 데다, 문제는 어찌나 많이 일으키시는지.”
메리는 이엘리의 드레스 자락을 탁 탁 쳐 주름을 펴 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며 한숨을 내쉰다.
“왜 아가씨께서 로렌 백작 부인의 뒷감당을 하셔야 해요?”
“내가 헤센바이츠의 일원이니까?”
“그렇게 치면 로렌 백작 부인은 공작가의 혈통도 아니시잖아요.”
메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에 거의 내쫓기듯이 공작 성을 나선 탓 일까, 다시 돌아온 공작 성에서 백 작 부인은 제 세상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엘리가 선을 긋는 게 다행일 정도로.
“백작 부인께서는 거의 월권을 행 사하고 계시다고요.”
월권? 하긴, 남들 눈엔 그렇게 보 일 여지가 크지.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엘리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하는 척이라도 했다.
이엘리도 황가의 자존심을 고려하여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차라리 작은 주인님께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분명히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
“아니, 그건 싫어.”
이엘리는 딱 잘라 거절했다. 메리는 금세 풀이 죽었다. 이엘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 문제야. 자카리를 귀찮게 만들고 싶진 않아.”
문득 자카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 다.
'불쾌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네가 날 지켜 주면 되잖아?’라는 그 말.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었지만, 이건 이엘리가 감당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