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96)

30 화

“뭐?”

자카리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저 말은 황가의 사신이 타고 온 말일 터였다.

황가가 도대체 왜, 지금 사신을 보 내는 건가? 이엘리가 불안한 얼굴로 자카리의 옷깃을 쥐었다.

“……자카리.”

이엘리가 약간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카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내 자신이 공작가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이엘리였다. 그는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왜 그런 표정 하고 있어, 이엔?”

“……“

“별일 아니겠지. 아마 내 성인식 관련한 문제 아닐까.”

자카리는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엘리의 표정이 약간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성인식을 치르는 거니까.”

“제국 내에서 내 입장이 좀 그렇긴 하지.”

자카리가 가볍게 어깨를 으쏙거렸다. 어쨌거나 그는 제국 유일의 공작 작위를 물려받을 차기 후계자이 자, 겨울의 마법을 지닌 존재였던 것이다. 황가에서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래도 빨리 들어가 보는 게 좋겠 어.”

“그래, 그러자.”

자카리의 대답에 이엘리는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보드랍게 속삭였다.

“참, 이엔.”

“응?”

왜 불러? 우리 이제 들어가야 하 지 않아? 그런 의미를 담아서 이엘리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성인식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작년에 네가 만들어 줬던 생일 케이크 말이야.”

“아, 그거?”

아니, 그 얘기를 왜 여기서 하는 거야? 솔직히 그 케이크는 거의 실패작에 가까웠다. 이엘리는 살짝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자카리의 시선을 피했다. 자카리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엄청 맛있었어.”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내가 만 들었지만 너무 달았어.”

“하지만, 달아도 상관없으니까.”

자카리가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그의 손길이 기분 좋다.

“난 그냥, 네가 직접 만들어 주었 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 거야.”

그러고 보면 자카리는 이엘리가 만 든 케이크를 남김없이 다 먹었다. 케이크를 직접 만들었고, 단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조차도 한 조각을 다 먹지 못했는데. 이엘리가 멋쩍어 하면서 물었다.

“자카리. 넌 내가 직접 만든 걸 좋아해?”

“응. 네 손이 닿은 거라면 무엇이든지 좋아.”

그의 다정한 말에 이엘리는 뺨을 붉혔다. 손을 마주 잡고 공작 성으로 향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곧 자카리의 성인식이니까-.

스무 살, 청년이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특별한 날. 그러니 그녀 또한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눈동자를 굴리던 이엘리는 문득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카리, 혹시 내 긴장을 풀어 주 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이야기를 꺼 냈던 건가?’

확실히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감은 지금 대화를 통해 말끔히 해소되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 하나가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녀는 자카리의 마음에 쏙 들 수 있는 선물을 해 주기로 결심했다.

공작은 황가의 전령을 에메랄드 홀을 개방하여 맞이했다.

에메랄드 홀은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작은 홀로, 그 홀 안에서 전령을 맞이함으로써 황가에 대한 예우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귀찮게 굴 테니까.”

다소 신랄하게 중얼거린 자카리가 홀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엘리는 곁을 따랐다.

“자카리.”

“아버님.”

고개를 숙여 보인 자카리가 황가의 문장을 단 전령을 돌아보았다. 싸늘하게 식은 새파란 눈동자가 저를 향 하자, 전령이 움찔했다.

공작이 경고하듯 자카리를 보자,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헤센바이츠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서슬 퍼런 기세에 기가 질린 전령 이 황급히 인사를 했다. 자카리는 까닥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가의 전령이시군요.”

북부까지 무슨 용무로 귀한 발걸음을 내어 오셨습니까? 비록 입 밖에 내어 묻지는 않았지만, 자카리의 표 정 자체가 빈정거리고 있음을 명백 히 보여준다.

전령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소공작님께서 곧 성인이 되시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자카리가

그렇게 말했다. 전령은 애써 배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소공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하 여,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실 예정이십니다.”

“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한쪽 눈 씹을 높이 치켜 올린 채, 전령을 거의 노려보듯 응시하는 자카리의 표정은 딱 그러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다. 두 분 황족께서 네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내려오시기로 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목소리다. 공작의 표정 또한 상당히 고까워 보였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엘리."

“예, 공작 각하.”

자신의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기에 내심 놀란 이엘리였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공작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러나 불쾌감을 담아 말을 이었다.

“이번 자카리의 성인식을 맞이하여 사냥회와 대규모 연회를 베풀려 한다.”

그 말은…… 이엘리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황족께서 방문하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다만.”

다만? 이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이 저렇게 말을 덧붙이면, 보통 안 좋은 말이 따르는데.

“사냥회와 연회는 로렌 백작 부인의 조언에 따라 진행하도록 한다.”

“아버지!”

발끈한 자카리가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공작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공작이 선언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지만……!”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때 이엘리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공작은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자카리는 간신히 분을 억 눌렀다.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공작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공작은 자카리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한 공작이 손을 까닥거려 보였다. 물러나라는 뜻이다. 자카리

는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중간에 끼어든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낚아챘다. 이엘리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공작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잡아당겼 다. 미간을 찌푸린 자카리가 공작과 전령에게 말을 퍼부으려다 말고 한 숨을 내쉬었다. 곧 두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엔, 도대체 왜 그랬어!”

홀을 빠져나오자마자 자카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뭔가 사정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자카리, 넌 내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 성인식은 나에게도 아주 소중해.”

그 말에 자카리는 화가 난 와중에도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이엘리가 조곤조곤 설명을 했다.

“그런 성인식을 진행하면서, 뭔가 황가에게 트집이 잡힐 여지는 남겨 두고 싶지 않아.”

“황가?”

“그래, 황가.”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또한 로렌 백작 부인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공작이 굳이 백작 부인을 또다시 들일 정도면, 황가에서 뭔가 압력이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네가 그런 불쾌한 여자를 참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잠깐 침묵하던 자카리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이엘리는 그런 자카리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불쾌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네가 날 지켜 주면 되잖아?”

허를 찔린 얼굴로 자카리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코끝을 찡그리며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아, 이엔.”

자카리는 결국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엘리였다. 그가 그녀를 말다툼에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결국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어떻게든…… 널 지켜 줄게.”

기분이 상한 것과는 별개로 자카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엘리의 손을 움켜쥔 손은 풀어질 줄 몰라, 이엘리는 지그시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귀여웠이다.

황가의 전령은 공작 성에서 하루 묵은 후, 곧장 황성으로 돌아갔다. 전령이 떠나는 모습을 보자마자 자카리는 곧바로 공작의 집무실로 쳐 들어갔다. 성이 난 자카리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 어째서 로렌 백작 부인을 들이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백작 부인이 직접 황태자에게 읍 소했기 때문이지.”

공작은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구 나’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답했다.

자카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대 되었다. 그 망할 여자. 자카리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공작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네 외숙모 인데, 네가 자신을 숙모로서 존중하 지 않았다고 하더군.”

“정 대우를 받고 싶다면, 숙모라는 이유로 주제넘는 짓은 하지 말아야 지요!”

자카리가 미간을 구겼다. 그 여자,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공작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박대하여 내 쫓았다고 하던데…… 뭐, 사실이긴 하지.”

공작은 픽 비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인 채,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공작 성을 떠난 백 작 부인. 그런데 이런 깜찍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공작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태자는 이 사실에 꽤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직접 내게 언질을 넣을 정도면.”

자카리의 표정 또한 싸늘하게 굳었다. 공작은 그런 제 아들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로렌 백작 가문과 화해하는 것도 좋지 않으냐고 묻더 군.”

“예?”

자카리가 기가 막힌 낯을 했다. 하 지만 공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작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황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다……”

공작의 새파란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맺는다.

“……네 외가인 로렌 백작 가문을 계속 박대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보이겠지.”

“화해는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자카리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쳤 다. 그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뭐라고? 순간 자카리가 의아한 얼 굴로 공작을 응시했다. 단 한 번도 그의 의견에 긍정적이었던 적이 없던 공작이었다. 무슨 속셈으로 내 말에 동조하는 거지. 짙푸른 눈에 의심이 서렸다.

“하지만 아직 황가와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서는 안 돼.”

“……“

“적어도 네가 공작 작위를 무사히 잇기 전까지는.”

공작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 보자, 자카리는 어깨를 굳혔다.

아무리 제 입지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해도, 황가는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는다.

‘겨울의 마법을 가진 서리 악마, 은룡 헤센바이츠의 후손, ’

그 이름은 황가가 자카리를 경계하게 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공작의 말도 일부 일리가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로렌 백작가는 황가의 수족이나 마찬가지다.”

공작은 턱을 괸 채 아들을 올려다 보았다. 공작의 시선엔 약간의 온기 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자면, 황가가 붙인 수 족을 끊어 낼 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는 게지.”

“어째서 헤센바이츠가 황가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까?”

“그거야 당연히, 우리 가문은 지킬 것이 많은 가문이니까.”

공작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공작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지킬 것이 많아질수록 조심스럽이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지.”

지킬 것이 많아질수록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공작의 말을 듣자마자 자카리는 제 아내를 떠올렸다.

이엘리. 아샤꽃을 닮은 사랑하는 아가씨. 자카리의 기세가 약간이나마 누그러졌다.

“아마 황태자와 황녀가 공작 성에 방문하는 것도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미가 있을 거다.”

“정치적인 의미라면……”

“겉으로는 황가가 공작가를 이렇게 나 생각해 준다, 라고 과시하고 싶은 거겠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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