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96)

29 화

안도한 이엘리가 종알종알 입을 열었다. 현재 두 사람은 밖에 나와 있는 중이었다.

날씨가 차갑다는 이유로 온갖 목도리며 모자를 둘둘 감아 놓았기에, 이엘리는 마치 눈사람처럼 보였다.

“이엔, 너도 감기 조심해. 요새 날 씨가 무척 차가우니까.”

자카리가 이엘리의 곁에 바짝 붙어 서며 말했다. 미간을 좁힌 이엘리가 힘겹게 팔짱을 끼었다.

“이렇게 옷을 둘둘 감아 놓았는데, 어떻게 감기에 걸려?”

“솔직히 더 입혀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나, 이제 뒤뚱거리다 못해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걸.”

이엘리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현재 옷차림에는 자카리의 입김이 상당수 들어가 있었다. 밖에 나가기로 결정하자마자 그녀를 찾아 와 목도리며 장갑이며 모자를 덮어 씌운 것이다.

“네가 아픈 것보다는 나아.”

완고한 자카리의 대답에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 네가 마음이 편하다면 된 거지.

“그것보다 이엔, 이리 와.”

자카리가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이엘리는 총총걸음으로 자카리 곁에 다가섰다. 그의 손에는 말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콧잔등에 하얀 점이 흩어진, 순한 성격의 진한 갈색 암 말이었다.

“말에 올라가는 거, 도와줄까?”

“으응……”

이엘리는 다소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곁에 다가 온 자카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엘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자카리의 목에 매달리면서 외쳤다.

“꺄아, 자카리!”

“왜? 말에 올라가려면 이게 제일 빨라.”

“그, 그래도!”

그냥 손을 잡아 주거나,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기겁한 그녀가 뺨을 붉히며 말 위에 올라탔이다. 자카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말고삐를 쥐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그런 거긴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엔을 안아 볼 수조차 없단 말이야.’

이엘리가 들으면 음흉하다는 둥, 그러면서 종알거릴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자카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 위의 그녀를 흘겨보았다.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모두 그녀 탓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예뻐지 라고 했나.”

조그맣게 투덜거리자, 막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애쓰던 그녀가 자카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카리, 지금 뭐라고 했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자카리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내 저었다. 이엘리는 잠시 의심의 눈빛을 보냈지만, 우선은 말을 타는 데 집중하느라 시선을 거두었다.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걷던 자카리가 피식 웃었다.

“이엔 너도 참, 갑자기 말 타는 연습이라니.”

“하지만 나만 말 타는 게 서투른 건 싫단 말이야. 북부는 사냥회도 자주 한다고 했다고."

이엘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말에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까지는 두 사람이 어려서 사교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이젠 달 탔다.

그녀는 명실공이 헤센바이츠 소공작인 자카리의 아내였으며, 차후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슬슬 사교 활동을 생각할 때가 됐다.

“그래서 말 타는 연습을 시작한 거 야?”

“응. 뭐, 탈 수는 있지만…… 아직 서투르니까.”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자카리가 짓궂은 얼굴로, 집중하는 이엘리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달리고 싶지 않아?”

“응? ”

잔뜩 긴장한 채 말 위에 올라타 있던 이엘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자카리가 씩 웃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은 편이라서, 말을 타고 달리면 엄청 상쾌할 텐데.”

“어……”

그렇게 들으니 좀 혹하기는 한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는 살살 유혹의 말을 건넸다.

“어때? 내가 같이 타면, 말에서 떨어지지도 않을 거야.”

“음, 그렇다면 좋아.”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 위에 날렵하게 올라탔다. 그대로 이엘리의 허리를 끌어안자, 그녀가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네가 떨어질까 봐 끌어안은 것뿐이야.”

“진짜?”

“진짜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자, 이엘리는 미심쩍은 얼굴로 다 시 시선을 돌렸다.

자카리는 목 뒤가 화끈화끈 달아오 르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의 바로 앞에 이엘리가 앉아 있었다.

‘이엔.’

모피와 솜털 옷과 목도리 따위로 둘둘 싸여 있었지만, 이엘리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자카리는 문득 쿵쿵 뛰는 제 심장 소리를 들킬까 두려워졌다. 그는 고삐를 쥐었다.

“이랴!”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 이 홱홱 지나간다. 앞에 앉은 이엘리가 곧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이 정도 속도, 괜찮아?”

“응!”

이엘리의 신이 난 대답을 들으며, 자카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차가 운 공기가 시원하게 양 뺨을 어루만지고, 세상이 뒤로 빠르게 지나간다.

와, 이거 엄청나잖아. 엄청 재밌어! 자카리는 말을 능숙하게 몰아서 공작성 뒤편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여긴 어디야?”

“내 비밀 장소.”

“자카리, 비밀 장소도 있었어?”

놀란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카리가 쿡쿡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사실 비밀 장소까지는 아니고, 최근에 우연히 찾아낸 곳이야.”

“그렇구나.”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날렵하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 위에 앉은 채, 이엘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서리가 내린 숲 속 조그만 공터는 흰 얼음으로 조각 한 다른 세계 같았다.

“자, 손.”

자카리가 손을 내밀었다. 이엘리는 손을 맞잡았다. 자카리는 그녀의 손을 쥐면서, 반대편 팔을 들어 이엘리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대로 꼭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는 그의 품에 폭 파묻혔다.

“자카리, 숨 막혀!”

이엘리가 자카리의 등을 콩콩 두드려 댔다. 자카리는 그녀의 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엔.”

“응?”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옹 한 자카리의 온기가 두꺼운 옷감 밖으로도 느껴질 것 같다.

“난 네가 너무 좋아.”

이런 느닷없는 고백은 이제 익숙할 정도였다. 자카리는 시시때때로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속삭이고는 했다. 눈이 마주치거나 우연히 스쳐 지나갈 때, 마치 그녀에게 도장이라도 찍듯이.

“나도 네가 엄청나게 좋아.”

이엘리는 시선을 맞추며 생긋 미소지었다. 자카리는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와 나의 좋아한다, 라는 말은…… 너무 큰 온도 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의 감정을 강요할 생각 은 없다. 어렸을 적, 함께 아샤 축제에 놀러 갔을 때.

결혼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했던 자신의 말은 아직도 유효했다. 그는 한숨을 되삼켰다.

‘네가 만족할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게.’

자카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지금 은 괜찮다. 가슴이 이렇게 뛰어도 참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 다. 복잡한 마음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던 바로 그때였다.

“자카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엘리가 고개를 쏙 내밀며 질문을 던졌다. 맑은 연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자마자, 그를 혼란스럽게 하던 모든 감정이 말끔히 휘발되었다. 그래,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그는 씩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네가 너무 좋아서?”

자카리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더니, 입지 않은 목소리로 톡 쏘아붙였다.

“그냥 이유를 말해 주기 싫다고 해.”

“하지만 진심인걸.”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관찰하는가 싶더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서리가 덮인 잎 사이로 영롱하게 빛나는 빨간 열매를 발견한 것이다.

“앗, 자카리. 이거 봐, 열매가 있어!’’

“아, 그거? 토론 열매네.”

열매를 양손에 양껏 따던 그녀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의아한 목소리로 자카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기사단 훈련 중에는, 맨몸으로 산에서 3일간 생존하는 것도 있으니까.”

“우와, 그거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질색하던 이엘리가 열매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탐스럽게 익은 열매 가 먹어 달라며 손짓했다.

“이거 먹어도 돼?”

“먹어도 되긴 하지만…… 좀 실 걸.”

“그냥 시기만 한 거면 괜찮아.”

입에 열매를 쏙 밀어 넣은 그녀가 코끝을 찡그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엘리가 외쳤다.

“으으, 이거 너무 셔!”

“그러게 시다고 했잖아?”

자카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시야에 머무를 때마다 치솟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다.

이엘리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은 이렇게 찬란해지고, 반짝반짝 빛난다. 행복했다.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에 공작 성으로 돌아왔다. 불타오 르는 노을에 젖은 서리 맞은 숲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이엘리는 내심 자카리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카리가 아니었더라면 그곳에는 가 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이엘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그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 고마워, 자카리.”

“네가 즐거웠다면 나도 기뻐.”

자카리가 빙그레 웃었다. 말에 탄 이엘리는 자카리의 품에 안기듯이 기댄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카리, 이제 곧 생일 아니야?”

“아.”

말의 속도를 느리게 조절하고 있던 자카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네가 기억해 주 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내가 기억해야지.”

“응?”

“난 네 아내인걸.”

그녀가 당연하다는 양 말하는 ‘아내’라는 단어가 가슴을 간지럽힌다. 마치 깃털로 문지르는 것처럼 보드라운 감촉. 자카리는 뺨을 붉히며 웃었다.

이엘리는 곰곰이 그의 나이를 따져 보았다.

“음, 그렇다면 너, 올해 성인식을 치르겠네?”

“아마도?”

자카리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왜 저렇게 무관심 한 거람?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면서 기대앉은 자카리의 가슴을 뒤통수로 쿡쿡 눌렀다. 불퉁한 어조로 그에게 말한다.

“뭐야, 그 반응. 지금 네 얘기를 하고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자카리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전혀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이엔, 네 성인식도 조용히 지나 갔잖아.”

“그건 내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제국에서는 여성은 18세, 남 성은 20세에 성인식을 치른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미 성인식을 마쳤다.

그녀의 성인식 때, 공작은 원한다 면 대규모 연회를 열겠다 제안했지만그녀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곧 자카리의 성인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성인식을 거창하게 하면, 상대적으로 자카리의 성인식이 묻힐 테니까.’

헤센바이츠의 차기 공작은 자카리였다. 그녀 자신 때문에 자카리가 묻히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제국 유일의 공작가의 후 계자인데, 성인식은 좀 신경 써서 치러 주실 거야.”

이엘리는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글쎄……“

과연 아버지가 나에게 그런 배려를 해 주기나 할까? 하긴, 그래도 공작가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그럴지도. 자카리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저 말은?”

“응?”

이엘리가 고개를 쏙 들어 올렸다. 마구간에 들어와 있는 말 중, 처음 보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저런 말은 공작가에 없었던 것 같은데……”

“아이고, 작은 주인님!”

그때 마구간지기가 그들 쪽으로 황 급히 달려왔다. 자카리는 고개를 기 울이며 질문을 던졌다.

“저 말은 뭔가?”

딱 봐도 잘 관리된 말이었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나는 털만 해도 그랬다. 어디선가 손님이라도 방문한 건가, 하지만 공작 성에 손님이 방문한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공작 각하께서 두 분을 찾으십니다!”

그때였다.

“우리를? 왜?”

마구간지기가 혈떡이며 말하자, 자카리가 어리둥절한 낯이 되었다. 마구간지기가 얼른 답했다.

“그게, 황가에서 사신이 도착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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