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화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공작 곁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연녹색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품었다.
하지만 공작은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이 걱정시키는 건 싫다.
“괜찮다. 고작해야 감기일 테지.”
공작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공작의 낯은 핏기가 사라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감기라고요? 하지만 공작님, 기침이 너무 심하신데……”
“조금 피곤해서 그럴 뿐이야. 신경 쓰지 마라.”
공작이 완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공작을 바라보며, 자카리는 미세하게 미간을 구겼다.
“……아버지,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다.”
내뱉듯 공작이 대답했다. 허리를 곧게 편 공작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워낙 단호하여, 이엘리는 차마 더 공작에게 캐물을 수가 없었다.
공작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
그 말을 들은 자카리는 탐색하듯이 공작을 응시했다. 공작은 그 눈을 말없이 맞받았다. 다만 이번에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자카리가 아닌 공작이었다. 자카리의 시선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날 저녁. 공작은 저녁 식사를 걸렀다. 그리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일 찍 침실에 들었다.
침대에 몸을 기댄 채, 그는 느릿하 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웠다. 피곤했다.
‘하필이면 거기서 기침이 터지는 바람에.’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환약으로 어떻게든 증상을 다스리고 있었지 만, 이제 그것도 한계가 온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다.
사랑했던 아내가 죽은 후부터 발병 한 병을 의욕적으로 치료하지 않은 건,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외부에 몸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헤센바이츠 공작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봤자, 황가에게 물어뜯을 기회만 주지.’
공작이 짧게 조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공작가를 노리는 황가였다.
겨울의 힘을 가져 불안정한 후계자 만을 두고 있으니, 만약 지금 공작의 병이 밝혀진다면 일이 더 귀찮아 질 터.
‘그리고 두 번째는……”
자카리와 꼭 닮은 짙푸른 눈동자가 문득 과거를 더듬었다. 공작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아델.”
눈을 감으면 그녀가 떠올랐다. 물결치던 다갈색 머리카락, 찬란하게 빛나던 짙은 녹색 눈동자. 이기적이 라 해도 좋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보이는 증오조차도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이 병은 내 죗값이 아닐까.’
아주 오래전부터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치료법도 없는 병이었지만, 사실 그는 치료 자체에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공작이 치료를 받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델라이데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녀가 죽으면서 그에게 이 병을 남겨 준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는다면……”
그는 멍하니 생각을 더듬었다. 그녀가 그를 노려보던 눈빛이 생생했다. 새가 지저귀듯 아름다운 음성은 그에게만큼은 절절한 증오에 들끓었다. 그래도.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죽음도 나쁘지 않겠지.’
공작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작은 의아한 얼굴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일찍 잔다고 미리 말해 두었는데 이 시간에 방을 방문하다니?
“들어가겠습니다, 아버지.”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닌 통보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자카리가 서늘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순간 움찔했다. 마치 아델라이데가 살아 돌아와 그 자신을 경 멸하는 것 같았다.
“이젠 허락조차 구하지 않는 게냐?”
공작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그는 공작에게 질문을 했다.
“아버지. 주치의에게 병에 대해 물어보셨습니까.”
“쓸데없는 참견 마라.”
공작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자카리가 미간을 구겼다. 고개를 기웃이 기울이며 차갑게 답한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니요. 적어도 전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네가 내 건강을 그리 염려 했나?”
“그야 비록 아버지는 절 증오하시 지만, 그래도 이 공작령의 주인이시니까요.”
자카리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 왔다. 짙푸른 시선을 싸늘하게 내린 채 그가 말을 이었다.
“공작령을 책임질 분이시니, 그 후 계 된 자로서 당연히 걱정해야지요.”
공작은 가만히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카리와의 관계도 이미 갈 데까지 간 것 같았다.
자카리는 이제 공작에게 부자 간의 애정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망쳐 버린 관계임을 알면서 도,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작은 쓰게 웃었다.
“신경 쓸 것 없다.”
“아버지.”
“그만 물러가거라.”
자카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숨을 삼킨 그가 그대로 몸을 물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공작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서 난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마음 한구석이 어지럽게 엉킨다.
'이제 와서 아비 노릇을 하려는 것 도 우스운 일이지.’
어차피 너무 먼 길을 와 버렸으니, 하는 수 없었다. 베개에 머리를 기 댄 공작은 두 눈을 감았다.
이후 공작은 며칠 앓아누웠다. 가벼운 미열로 시작한 병세는,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적 어도 사람의 운신을 귀찮게 할 정도는 됐다. 자리보전의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이엔, 그게 뭐야?”
자카리 단지를 들고 복도를 걷고 있자니, 자카리가 고개를 쏙 디밀었다.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아, 이거? 레몬 꿀 절임이야.”
“레몬 꿀 절임?”
“응. 공작님께서 내내 식사도 거르고 계시잖아.”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공작은 입맛이 없다면서 식사를 계속해서 물리고 있었다.
이엘리는 그런 공작이 꽤나 걱정스러웠다. 그리하여 생각해 낸 게, 공작의 입맛을 돌게 할 음식이었다.
“그래서 이거 한번 만들어 봤어, 공작님 드리려고.”
“직접 만든 거야?”
“응. 차로 타 마셔도 되고, 간식처럼 집어 먹어도 돼. 감기에 좋다고 하더라고.”
이엘리는 어깨를 가볍게 으쏙거렸다. 그러던 중, 이엘리가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거절하시면 어쩌지?”
내내 입맛이 없다며 음식을 거부하 던 공작이었다.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음식조차 거절하곤 했으니, 그녀가 서툴게 만든 레몬 꿀 절임 같은
음식이 입에 맞을 리 없지 않나.
“걱정하지 마.”
하지만 자카리는 확신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이엘리가 살짝 울상이 된 채로 되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분명히 받아 주실 거야.”
이엘리는 힐끗 자카리를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약간 기대에 찬 눈빛이 되어서 그를 채근한다.
“……그걸 너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내 아버지께서는 널 예뻐하시거든. 그 뒷말을 접어 넣은 채 자카리는 빙그레 웃었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해졌지만, 자카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이엘리가 그 사실을 아는 건 싫었다.
‘널 사랑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고생각했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집착임을 알 지만, 그래도 자꾸만 그런 욕심이 드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 외의 다
른 사람을 아끼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신만 바라보고, 그에게 만 웃어 줬으면.
‘유치하기는.’
자카리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생각인지. 그 와중에 두 사람은 공작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이엘리는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공작님, 이엘리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엘리는 눈짓으로 자카리에게 함께 들어갈 거냐고 물어보았지만, 자카리는 고개를 저었다. 말다툼을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공작을 보는 건 껄끄러웠다.
“이따 데리러 올게.”
“응? 데리러 올 필요까지는 없는데?”
"내가 오고 싶어서 그래.”
낮게 소곤거린 자카리가 빙긋 눈웃음을 쳤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우선 방 안에 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준 자카리는 이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기, 공작님.”
방에 들어간 그녀가 작게 공작을 불렀다. 침대에 파묻히듯 누워 있던 공작이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로 왔느냐.”
“아, 그것이.”
우물쭈물하던 이엘리는 자카리 단지를 내려놓았다. 공작의 눈동자에 희미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건?”
“그…… 레몬 꿀 절임이예요. 감기에 좋다고 해서... “
이엘리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공작은 몸을 일으켜 단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주방장이 직접 썰었다고 보기에는 삐뚤빼뚤한 레몬 조각들. 층층이 설 탕과 꿀이 채워져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직접 만든 게냐?”
“그게…… 네.”
머뭇거리던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 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으으, 괜히 만들었어. 거절하시면 민망할 것 같은데. 공작은 이채가 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공작이 입을 열었다.
“고맙구나.”
“저기, 역시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버리셔도…… 네?”
중언부언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이엘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공작을 바라보자, 공작은 다소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귓바퀴가 미세하 게 붉어졌다.
“단지는 거기 두고, 레몬 꿀차라도 한 잔 타 오거라.”
“아, 네!”
두 눈을 깜빡이던 이엘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자카리와 공작은 부자가 맞나 보다. 부끄러워할 때 귓바퀴가 붉어지는 것도 그렇고, 시선을 피하며 할 말은 하는 것도 그렇고.
‘두 사람, 너무 닮았잖아.’
이엘리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몸을 돌렸고, 레몬과 꿀을 듬뿍 넣어 서 차 한 잔을 만들었다.
“여기요.”
“그래.”
공작은 뜨거운 차 한 잔을 받아 들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공작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물었다.
“역시 조금 단가요?”
“괜찮아.”
차 한 모금을 마신 공작이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약간의 침묵 후, 공작이 말했다.
“맛있구나.”
이엘리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오늘 나, 참 많이 놀라는구나. 공작은 그런 그녀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요새 왜 이렇게 유해 지셨지?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마주 웃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하게 지는 시간이었다. 아까 마주친 메리는 이엘리가 아직 자신의 방에 돌아가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공작의 방 앞에 선 자카리는 심호흡을 하고 똑똑 노크를 했다.
“아버지, 자카리입니다.”
“들어와라.”
공작이 대답했다. 자카리는 방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엘리였다. 아샤꽃잎처럼 보드라운 분홍색 머리카락은 의자 등받이 위에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의자 위로 몸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고개를 기댄 채 색색 숨소리를 낸 다. 어느 모로 보나 잠든 모습이었다.
“……이엔?”
“쉿."
공작이 검지를 들어 입술 위로 세웠다.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공작 곁에 다가섰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자카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말끔히 비운 찻잔이 놓여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군.”
공작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두 부 자는 잠든 소녀를 바라보며 각자 침묵했다. 자카리가 말했다.
“회복하셔야지요.”
“그래……”
곱게 잠든 소녀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아버지와 아들은 지금만은 서로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두 부자 사이로 짧지만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이는 공작이었다.
“자카리.”
“예?”
“누군가가 소중하다면, 최선을 다 해 아껴 주어야 한다.”
난 비록 그러지 못했지만. 공작은 뒷말을 삼켰다. 자카리는 묘한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보더니,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규칙적으로 새근대는 호흡이 두 사람의 귀를 간지럽혔다.
* * *
공작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다. 안색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져서, 두 사람은 한숨을 놓았다.
“정말 다행이야. 처음에 기침하실 때는 큰 병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