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96)

27 화

“먼저 간 줄 알았는데?”

“그게…… 가긴 갔었는데.”

자카리가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먼저 가긴 갔다.

다만 이엘리가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그녀가 올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말하기는 역시 좀 민망하지 않나.

“공작님께서는?”

“먼저 들어가 계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카리의 손을 맞잡았고, 자카리는 살짝 뺨을 붉혔다.

손안에서 꼬물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의외야, 공작님께서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그거야 네가 한 부탁이니까.”

“응?”

이엘리는 의아한 얼굴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마주 웃어 보였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공작이 이 공작 성에서 유일하게 아끼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엘리일 것이다. 자카리가 그녀를 아 내로 맞아 살아온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공작은 미세 하게나마 미소를 짓는 방법을 배우 게 되었다. 근 15년간 표정을 잃었던 공작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엔이라도 아껴 주셔서 다행이야.’

자카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이제 크게 상관없지만, 혹시나 자신 때문에 그녀가 미움을 받게 된 다면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을 수 없었을 테니까.

“아, 공작님 저기 계신다.”

이엘리는 흘끗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에는 다사 로운 애정이 서려 있어, 자카리는 약간 질투를 느꼈다.

네 모든 애정은 내가 독점해도 모 자란데, 어째서 넌 타인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야.

그녀가 그런 눈빛을 보내는 건 자 신으로 족했다. 다른 이는 싫었다.

‘……아버지까지 질투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이란 말이야.’

자카리는 약간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어 깨를 감싸 안았다.

“이엔.”

“응? ”

“이만 들어가자.”

“아, 그래.”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들어가면 되지, 새삼스럽게 뭘 그런 말을 하냐는 표 정이었다. 넌 내 마음 몰라, 이엘리. 자카리는 시큰둥한 표정이 되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공작 성에 마 련된 커다란 온실이었다.

과거 꽃을 좋아했던 공작 부인의 취향에 맞춰 마련된 온실은, 안주인 이 죽음을 맞이한 후로는 가끔 정원 사만 드나드는 쓸쓸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이엘리가 공작 성에 온 뒤 부터는 주기적으로 꽃을 보러 가곤 했다.

“이렇게 예쁜 꽃들이 가득한데, 아무도 보지 않는 건 아깝잖아.”

이엘리는 방긋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자카리는 그녀의 등 뒤에 선 채 주변의 풍경을 돌아보았다.

꽃향기를 머금은 훈훈한 공기, 화사하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송이들. 그리고 그 모든 꽃들보다도 아리따 운 이엘리.

솔직히 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가 기뻐한다면 그로 좋았다.

“그러게. 이렇게 꽃 종류가 많을 줄 몰랐는데.”

“솔직히 별로 꽃에 관심 없지?”

이엘리가 입지 않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그 새침한 물음을 들으며, 자카리는 빙그레 웃었다.

“응. 사실 너에게 더 관심이 많아.”

“우와, 방금 되게…… 여자에게 익숙한 남자 느낌이 났어.”

“남편은 아내에게는 익숙해져야 하는 법이지.”

자카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재 도대체 왜 저런 담? 이엘리는 샐쭉해졌다. 하지만

저런 버터를 바른 것 같은 발언이, 느끼하기는 커녕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게 더 문제였다.

“공작님께서 기다리시겠다, 얼른 들어가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이엘리는 애써 태연한 척 몸을 돌렸다. 자카리가 웃었다.

“공작 각하.”

“왔느냐.”

공작은 온실 안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이엘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공작은 까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던 자카리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셨습니까, 아버지.”

정중하지만 냉랭한 인사였다. 그러나 공작 또한 그 인사를 들으며 딱 히 유감을 표하지는 않았다.

공작은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들을 가리켰고, 이엘리와 자카리는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주방장 말로는, 각하께서는 리엘론 차를 즐긴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공작은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언제 이엘리가 자신의 취향까지 파악했는지 몰라, 조금 놀란 기색이다.

이엘리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왕 점수를 따기 위해서면 이 정도는 해야지.

“리엘론 차는 다소 맛이 씁쓸하니까,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디저트를 준비해 봤어요.”

은 접시 위에 예쁘게 올라와 있는건 바로 레몬 파이였다. 레몬을 졸 여 만든 잼과 커스터드 크림을 층층 이 쌓고, 설탕물을 발라 윤기를 살 렸다.

리엘론 차는 상큼한 단맛을 가진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고 해서, 이 파이를 만들기 위해 가엾은 주방장을 얼마나 들볶았는지 모른다.

“고맙구나.”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무례인 것조차 잊어버린 채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공작님께서 방금, 이런 사소한 일 로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신 거 야?’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자면 정말이 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언제나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공작은 이제, 적어도 ‘고맙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제게 유해진 것이다.

이엘리는 좀 아쉬워졌다.

‘자카리에게도 이렇게 유해지시면 좋을 텐데.’

이엘리와 공작의 사이는 약간 진전 되었지만, 아쉽게도 자카리와 공작의 관계는 여전히 겨울바람처럼 냉 랭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사이를 좋게 만들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 지는 않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관계니까. 그래도 예전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게 다행이랄까.’

이엘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폭력과 고함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괜찮다, 요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약간은 정신승리 같기는 하지만 할 수 없지 않나.

그때 공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맛있군.”

“지, 진짜요?”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경악한 이엘리가 공작을 향해 되물었다.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물음을 긍정했다. 뭔가 잘못 드셨나? 고맙다는 말에 이어 칭찬까지?

“그러니까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아…… 감사합니다.”

설마 내가 한숨을 쉰 걸 신경 쓰신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너무 이엘리 스스로에게 상냥한 해석 아닌가.

이엘리는 흘끗 곁에 앉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 넌 어때?”

“나도 맛있어. 이번 티타임, 신경을 무척 많이 썼구나.”

자카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칭찬을 들은 그녀의 뺨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으으, 저렇게 달콤하게 말하면 온 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이엘리는 부끄러움을 감추려 레몬 파이를 크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자카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레몬 파이가 마음에 들어?”

“응?”

막 커스터드 크림을 꿀꺽 삼키던

이엘리가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어, 물론 이 레몬 파이는 객관적으로 맛 있긴 하지만……

그러자 곧장 자카리는 그녀 앞에 자신의 접시까지 밀어주었다.

“더 먹어.”

“아니, 여기서 더 먹으면 나 살찌는데...“

“괜찮아. 넌 좀 더 쪄도 돼.”

자카리의 단호한 말에 그녀는 어색학이게 웃었다.

어느새 그녀 앞엔 레몬 파이가 가득이었다.

“저기, 나 드레스 입으려면 몸매 관리를 좀 해야 해서.”

“아니야, 이엔. 넌 너무 말랐다고.”

“그건 자카리의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때 무심한 얼굴로 공작이 말을 툭 던졌다. 이 사람들 도대체 나한 테 왜 이래? 그녀는 좀 어리둥절 해졌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날씬한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굳이 살을 찌울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녀의 앞에 생크림 단지와 설탕 그릇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넌 보통 달콤한 음식을 즐기곤 하 더구나.”

“그, 그런 건 맞지만요……”

“리엘론 차는 밀크티로 마셔도 맛이 괜찮다.”

도대체 이 상황,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하지? 그러니까 지금 날 위해 공작 각하께서 리엘론 티를 밀크 티

로 마시라고 조언해 주고 계신 건 가?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공작의 눈치를 살폈지만, 공작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작은 손수 생크림 단지의 뚜껑까지 열 어 주었다.

“음, 감사합니다……?”

이엘리가 어쩔 줄 모르고 감사 인사를 건네자, 공작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엘리는 찻잔에 우유를 듬뿍 넣었다. 각설탕을 퐁당풍당 집어넣자, 입맛에 딱 맞는 단맛이 완성되었다.

‘아, 이 밀크티. 엄청 맛있어.’

한 모금 차를 마신 이엘리는 행복 한 얼굴을 했다.

듬뿍 들어간 우유와 설탕이 부드러 운 단맛을 내면서도, 쌉쌀한 차 맛이 뒷맛을 느끼하지 않도록 잡아 준 다.

그러던 중, 그녀는 멈칫했다.

“……저기, 두 분.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먹는 데 왜 자꾸 쳐다봐? 이엘리는 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아 내면서 공작과 자카리를 둘러보았다.

아까 전부터 공작과 자카리는, 이엘리가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자카리가 고개를 저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공작도 마찬가지로, 큼큼 헛기침을 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파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것보다 아까 전부터 저만 먹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신 건 아닌지……”

“그런 거 아니야!”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라.”

두 남자가 정색했다. 뭐,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카리는 포크를 들어 롤 케이크를 열심히 공략하기 시작했고, 공작은 손도 대지 않던 푸딩 그릇을 들었다.

‘음,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눈동자를 굴리던 이엘리는 결국 쿡쿡거리면서 웃어 버렸다. 뭐, 그래도 평화로운 티타임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따스 한 온실 안쪽으로 붉은 햇볕이 비스듬히 내리쬐었다.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티타임을 마 친 그녀는 울상이 되어 배를 쓰다듬었다. 배 안이 빵빵하게 찼다.

“아, 나만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그래?”

한편 자카리는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신경 쓰였던 그는, 어떻게든 이엘리를 살찌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는 미간을 좁혔다.

“너무 배불러서 저녁을 못 먹겠는 데.”

“뭐? 안 돼, 넌 끼니를 잘 챙겨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나 굶 고 다니는 줄 알겠어.”

기가 막힌 이엘리가 자카리를 곁눈 질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작까지 자카리의 말에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는 마당에,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절 살찌우려고 작정하신 것 같아요.”

“그야 넌 너무 말랐으니까.”

“넌 팔다리가 지나치게 가늘어.”

이구동성으로 그녀에게 말하는 두 부자를 보며 이엘리는 약간 황망해졌다. 이 사람들의 눈에 난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차마 공작에게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기에, 대신 이엘리는 자카리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리고 샐쭉한 낯으로 그에게 속삭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드레스 안 맞으면 다 네 책임이야.”

“그래, 무슨 일이 있던지 내가 널 책임질게.”

“……“

따지는 말에 달콤한 대답이 돌아오자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 말을 말자.

숫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이엘리의 모습을 공작은 웃으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순간, 공작의 숨이 턱 막혔다.

“콜록, 콜록!”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폐를 쥐 어짜 내는 느낌에, 공작은 허리까지 꺾으며 기침을 내뱉었다.

“고, 공작님? 괜찮으세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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