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96)

26 화

‘나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 파괴적인 감정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갉아먹는다. 지금껏 그 이유를 숨긴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말하 면, 이엘리가 자신을 두려워할까 봐 겁이 났다.

“그래.”

그리고 대답이 튀어나오는 순간, 자카리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때.

“힘들었겠구나.”

“……뭐?”

“우리 자카리, 무척 힘들었겠다고.”

그녀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하 지 않았다. 새싹 같은 눈동자 안쪽의 따스한 빛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그의 목에 제 팔을 휘감아 안았다. 그녀가 다정하게 속삭인다.

“힘든 이야기였을 텐데 들려줘서 고마워.”

“이엔.”

“이것으로 충분해. 더 자세한 속사 정 같은 건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에 자카리는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당연하다는 양 닿아 오는 체 온이 눈물겹게 따스했다.

“뭐든지 네가 원할 때 하면 돼. 네가 직접 말할 마음이 들 때까지 난 기다릴 수 있으니까.”

말을 맺은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보며 자카리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엔. 하지만……”

“게다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 판단한 바, 이 문제는 역시 네 잘못 이 아닌 것 같아.”

이엘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자카리는 덜컥 굳어 버렸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몇

번씩 들어도 익숙하지 않다. 이엘리 외의 그 누구도 그 말을 해 준 적 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거야. 그리고 넌 고의도 아니었지.”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연녹색 시선은 언제나 올곧기만 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물며 넌 지금껏 모든 일에 책임을 지려 노력해 왔는데, 어째서 너 만 죄책감을 느껴야 해?”

무엇보다도 그 일들은 자카리가 무척 어렸을 때 일어났다. 헤센바이츠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은룡의 힘을 타고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그가 힘을 다루는 법을 알았을리 없다.

‘게다가 공작님과 전대 공작 부인 께서도 자카리를 어른스럽게 대해 주지는 않으셨잖아.’

이엘리는 그 점이 불만스러웠다. 두 사람은 아직 어린 자카리가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기는  커녕, 괴물이라 배척하며 위험한 곳에 내몰았다. 물론 그가 두려울 수는 있지만.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런 방식은 어른이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 야.’

성인은 성인답게 어린아이를 이끌 어 줘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들을 학대했을 뿐이었다.

‘그런 건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다 고생각해.’

생각을 정리한 이엘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녹색 시선은 흔들림 없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너도 상처받은 건 똑같은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네 편을 들어준 적 이 없잖아.”

“……이엔.”

“그러니까 내가 네 편이 되어 줄 게.”

그녀의 말을 듣던 자카리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네 편이 되어 주지 않아도, 내가 네 편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알았지?”

“……“

그녀가 힘을 주어 말했다.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윽.”

깨문 보람이 없었다. 그의 입술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난처하게 말했다.

“이런, 자카리. 이렇게 눈물이 많아 서 어떡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엘리는 이미 자연스럽게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손길이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미간을 좁힌 채 이엘리는 중얼거렸다.

“나, 널 울릴 생각은 없었단 말이야……”

나의 기적. 나의 구원. 네가 없던 세상에서 지금껏 난 어떻게 살아왔 던 것일까.

이엘리를 만나기 전, 그의 세계는 어둠과 슬픔과 절망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제가 저지른 죄가 있기에 그는 그 차가운 세계가 당연하다 여 겼다.

그러나 이엘리는 ‘네 잘못만은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대신 내 앞에서만 우는 거야. 알았지?”

자카리를 곧게 응시하던 새싹 같은 눈동자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 자카리가 간절하게 그녀의 품에 매달렸다. 이엘리는 그런 자카리를 힘껏 끌어안

아 주었다.

 다음날. 자카리는 다소 어색한 자 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엘리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는 자리였다.

길게 깎은 연필을 들고 이젤 앞에 앉은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허리를 곧게 펴야지, 자카리.”

“아, 미, 미안.”

머쓱하게 허리를 펴면서, 자카리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엘리가 상당히 고생했었다.

'미안해, 고마워, 나는……. ’

이엘리를 꼭 붙든 채로, 정신없이 흐느끼며 자카리는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카리의 속삭임을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다. 그 이 후 자카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제안을 한 것이다.

‘뭐가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정 미안하면 내 모델이 되어 줘.’

'모델?’

‘응, 요새 나 그림 연습을 다시 하고 있거든. ’

이엘리가 생긋 웃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짓궂게 대답했다.

‘너를 그리고 싶어. ’

그리하여 그가 그녀의 그림 모델이 된 거다. 자카리는 푹 한숨을 쉬었 고, 그녀는 냉큼 말했다.

“자카리, 움직이지 말라고.”

“으, 응.”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는 애써 자세를 바로 했다. 어제 저지른 진상 짓을 떠올리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아내 앞에서 보일 추태는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지.’

그렇게 생각하던 자카리는 힐끔 이엘리를 곁눈질했다.

하나로 묶어 내린 분홍색 머리카락, 잔뜩 집중하느라 가늘게 뜬 연녹색 눈동자. 그는 다시 한 번 그녀 에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너무 예쁘잖아.’

이러다가 심장 소리도 들리겠어.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카리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날 그리기로 결 정한 거야?”

“응? 아, 초상화 방에 네 초상화가 걸려 있지 않더라고.”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슥슥 연필을 놀렸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결과 물을 얻진 못한 듯하다.

“대신 내가 그려서 걸어 주고 싶었는이데…… 내 실력으로는 네 잘생김을 다 담아내진 못하네.”

이엘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 신이 스케치한 그림을 응시하더니, 곧장 그림을 치우려 했다.

“역시 이건 버려야겠다.”

“뭐? 아냐.”

그가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자카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 그림, 버릴 거면 나 줘.”

“뭐? 이거 그냥 스케치일 뿐이야, 색은 칠하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그거면 돼.”

이엘리는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당사자가 마음에 든다니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소중하게 그림을 받아 든 자카리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따스해졌다.

 * *  *

오늘도 자카리는 영지 시찰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때, 온기 없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요새 많이 변했군.”

“……“

자카리는 서늘한 시선으로 공작을 마주 보았다. 공작이 뚜벅뚜벅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초상화 방에서

마주친 이후로 공작과는 단둘이 만 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건가.

“전투는 물론이고, 영지를 보살피는 일에도 정성을 다한다고 들었지. 무슨 속셈인가?”

공작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들을 마 주 보았다. 자카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말을 내뱉었다.

“……만약 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것이 있다면, 그건 모두 이엘리 덕분입니다.”

“호오. 아내 덕분이라.”

“제가 안정적으로 소공작 위치를 확립하지 않으면…… 그녀가 위험해질 테니까요.”

자카리를 응시하던 공작의 눈이 오 묘하게 가라앉았다. 입술 끝이 미세 하게 위로 솟아오른다.

“안정적인 소공작의 위치…… 그래.”

공작은 팔짱을 꼈다. 두 눈을 내리 깔아 자카리를 마주 보는 그 눈빛 은, 아들과 꼭 닮아 있었다.

“괴물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만 한 말 아니더냐.”

“글쎄요, 아버님께서는 그 괴물이 란 말을 평생 포기하지 못하시더군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공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그는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말이 아니라면, 저를 비난할 수 없어서입니까?”

“자카리.”

“하지만 어머님에게는, 저뿐 아니라 아버님 또한 괴물이었을 텐데요.”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공작이 순간 언성을 높였다. 아델라이데는 공작의 역린이었다. 이엘리가 그의 역린인 것처럼.

“그리고 괴물이라 해도,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카리는 이엘리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의 역린이든 공격할 수 있었다. 그 상대가 자신을 ‘괴물’로 만든 채 사망한 어머니라 할지라도.

자카리는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이엔이 제게 가르쳐 준 사실이지 요. 그리고 그 예시가 바로 제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공작은 불타오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자카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괴물로 여기셨 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잖습니까. ”

“……“

자카리는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던지, 공작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마침 이엘리가 메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실내 온실을 다녀왔는지, 품 안에는 꽃들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아델과 다르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지금껏 보시고도 그것을 모르십니까?”

자카리의 날 선 대답에도, 창밖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빛은 확연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카리는 문득 생각했다. 아마 이엘리가 없었다면, 우리 부자는 아주 오래전에 서로를 죽여 버렸을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던 그는 핵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자카리를 공작은 바라보지 않았다.

* * *

온실에서 꽃을 꺾어 돌아오던 그녀의 곁에 메리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혹시 이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니?”

이엘리는 흘끗 메리를 돌아보았다. 메리는 아주 큰 비밀을 말해 주기라도 하듯 자신만만했다.

“요새 영지민들에게 소공작님의 인기가 무척 높다고 해요.”

“그래? 어째서?”

자카리가 인기가 높다고?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메리는 콧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소공작께서 폭설에 훌륭하 게 대처하셔서, 피해가 적었다고 하 더라고요.”

“그게 정말이야?”

“물론이죠, 제가 아가씨께 이런 거짓말은 왜 하겠어요?”

메리가 빙그레 웃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메리가 은밀한 목소리로 이엘리를 향해 소곤거렸다.

“그래서 공작 성에 영지민들의 선물이 몇몇 들어왔대요.”

“선물?”

“네. 뭐, 털가죽이나 그런 거요. 집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확실 할 거예요.”

즐거움에 가득 찬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카리가 인정받는다는 소식은 언제 들어도 기쁘다.

그녀는 품에 안은 꽃을 추스르며 자카리의 방으로 향했다. 꽃병의 꽃을 갈기 위해서였다.

“아, 이건.”

익숙한 물건 하나가 눈에 띄자, 막 꽃을 갈던 그녀가 뺨을 붉히며 살짝 눈웃음을 쳤다.

“뭐야, 부끄럽게. 액자에 담아 둘 줄은 몰랐네.”

집무실 책상 바로 옆에 걸려 있는 액자 안에는 그녀가 그린 자카리의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4. 성인의 길목에서 (1)

시간은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빨랐다.

그 관용적인 말을 이엘리는 피부로 느끼는 중이었다.

어느새 다시 일 년이 지난 것이다. 자카리는 이제 스무 살, 성년식을 치르기 직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에는 눈이 엄청 많이 왔었는데.’

이번에는 가느다란 눈발만이 두어 번 날렸을 뿐, 작년처럼 폭설이 내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엔!”

“자카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막 온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이엘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로 새하얀 은발이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성큼성큼 다 가온 자카리가 그녀 곁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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