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96)

25 화

“요새 정말 뻔뻔해졌구나. 넌 네 어머니를 좀 더 생각해야 할 필요성 이 있어.”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공작에게 쏘아붙였다.

“그건 어머니와 저의 문제입니다.”

“흐응.”

“게다가 아버지께서 끼어드셔도, 어머니께선 기뻐하시지 않을 텐데요.”

자카리의 말에 공작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마 그렇겠지.”

“……”

“하지만 난 아델의 남편이다.”

공작의 새파란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게 식어있었다.

“아내를 잃은 자가, 그 원인이 된 자를 증오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

그 말만큼은 항변할 수 없는지 자카리는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네가 내게 예의를 지킬 이유는 충분하다.”

“아버지.”

“난 네가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자카리가 공작을 힘껏 노려보았다. 공작이 말하고 있는 것은 명백했다. 이엘리. 그녀가 자신의 아내로 남아 있으려면, 또한 자신이 이엘리를 완벽하게 보호하려면.

자카리가 가지고 있는 겨울의 마법만으론 모자라다. 공작이 줄 수 있는 ‘헤센바이츠 소공작’이라는 지위 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나?”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공작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자카리였다.

“가자, 이엔.”

“자, 잠시만. 자카리?”

“……가자고. 제발.”

제발, 이라고 속삭이는 자카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상처 입 은 어린 짐승처럼 가느다랗게 흔들 리는 목소리. 이엘리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 뭔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닐까. 자카리가 정말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를 내 마음대 로 들춰 낸 건 아닌지.

“으, 응. 그래, 가자.”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첸 채 그대로 초상화 방 바깥으로 나갔다.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닫히는 방문 사이로 보이는 공작의 얼 굴은 무표정했다.

 자카리를 속절없이 따라가던 그녀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어찌나 손목을 세게 움켜쥔 건지 그가 쥐고 있는 손목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고통을 참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자카리?”

“……”

“자카리.”

몇 번 그를 불러 보던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나, 손목이 아픈데……”“

그 순간, 자카리가 그 자리에  퍼뜩멈춰 섰다. 새파란 눈동자는 마치 찬물이라도 맞은 것 같다. 화들짝 놀라 이엘리를 돌아보던 그는 파드득 손목을 놓아주었다. 이내 자그맣게 속삭인다.

“미, 미안.”

“괜찮아.”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 만 그녀의 손목은 이미 빨갛게 부푼 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카리의 눈동자에 고통이 차올랐다.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아 올린 그가붉게 달아오른 그 자리에  입술을 댄 다. 마치 유일한 여신을 경배하듯 경건하고도 죄의식에 가득 찬 동작이었다.

“이엔.”

“응.” 

“……미안해.”

나지막한 목소리. 진득한 두려움을 빚어내면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 이엘리는 할 말을 잃었다.

“거기…… 가면 안 되는 곳이었 어?”

“아니.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이 공작성안에 어디도 없어. 하지만……”

자카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짙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 다. 그가 쥐어 짜내듯 질문한다.

“……도대체 거긴 왜 간 거야?”

“미안해, 그냥 난 네 어머니에 대 해 궁금해서……”

“그런 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자카리는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언행이었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자카리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 사라지고, 창백한 낯 또한 손 그늘 아래로 가려졌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난……”

“너 괜찮아?”

“이엔.”

그때 자카리가 절박하게 그녀를 불렸다. 마치 절벽으로 떠밀린 어린아이인 것처럼 매달린다.

“난 있잖아…… 네가 너무 좋아.”

뭐?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 기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는 중언부언 말을 이었다.

“네가 너무 소중해. 넌 내게 있어 구원이고, 기적이야.”

평소라면 낯간지러운 말이라며 등짝이라도 한 대 쳐 줬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눈앞

의 그가 너무 절박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발밑이 무너질 것처럼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그.

“너에게는 내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자카리.”

“그래서, 그래서……”

그는 입술을 꽉 당겨 물었다. 봄 하늘처럼 맑았던 눈동자는 이제, 오래된 빙하처럼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진정해. 그녀는 그의 단단한 팔뚝을 어루만졌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늘어뜨렸다.

“……너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게 너무 많아.”

자카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 앉았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양,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도, 네가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서워.”

“저, 자카리?”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물었다.

“내가 널 왜 싫어한다는 거야?”

몇 번이나 말했다. 그녀는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언제나 버려질까 두려워한다.

“넌 아직 나에 대해 몰라. 내 어머니에 대해서도……”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이엘리는 처음으로 굳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전대 공작 부인, ‘아름다운 아델라이데.’

그 주제에 대해서는 이엘리는 언제나 배제되어있었다. 공작도, 자카리 도 모두 그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자카리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한 후 속삭였다.

“미안해. 모든 것을 미리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자카리.”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정말 모르겠어.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자카리를 보며, 이엘리는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모든 일은 결국 제 잘못이다. 예전에 ‘너는 괴물이 아니다’라며 잘난 척했던 게 무색하다. 그가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의도가 어땠든, 그의 뒤를 캔 것이나 다름없잖아.’

그녀가 저지른 일은 그런 종류의 잘못이었다. 이엘리는 스스로에게 약간 환멸감이 들었다. 아픈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랬었는 데. 제 호기심을 못 이겨 자카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야.”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짙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엔?”

“원하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 도 된다고, 누구든 말하기 싫은 과거가 있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한 그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긴 한숨을 내쉰다. 스스로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전에 잘난 척하면서 말했던 주제에.”

“이엔.”

“미안해, 자카리.”

이엘리는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먼저 포옹해 올 줄은 몰 탔는지, 자카리는 그 자리에  빳빳하 게 얼어붙었다.

이엘리는 그의 품에 고개를 폭 파 묻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었어. 그냥 조금 궁금해서 그랬을 뿐이야.”

“이엔.”

“언젠가 네가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 그럴 때가 오면……”

그녀의 조그만 손이 잔뜩 움츠린 등을 토닥거린다. 긴장 좀 풀라는 것처럼, 다정한 그 손짓들.

“그때 얘기해 줘. 알았지?”

“……“

“너 혼자 힘든 건 나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엘리는 힘을 주어 그렇게 말한다. 자카리는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엔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하지만……”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이엘리는 언제나 그에게 따스하게 웃어 준다. 하지만 넌 내 어머니에 대하여 들은 이후에도 똑같이 웃어 줄까? 자신이 없다. 자카리는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엔, 난 언젠가 네가 날 경멸하 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어.”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내가 널 경멸할 리가 없잖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진지한 낯이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끝이 이엘리의 뺨을 더듬었다. 차마 눈을 마주 볼 용기 가 없어 시선을 피한다.

“내가 아버지께 '괴물’이라 불렸던 이유는…… 역시 너도 알아야겠지.”

“……저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로 이 얘기를 해도 될까. 봄빛처럼 연연한 연녹색 눈동자가 저를 경멸할까, 혹은 공포에 젖을까.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신뢰 없는 관계는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과 같은 것. 너무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했다. 이엘리는 알 권리가 있다. 그는 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

“내가 아니었더라면, 어머니께서는 지금까지 살아 계셨을 거야.”

이엘리가 침묵하는 찰나의 순간이 영원 같았다.

자카리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 다.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 그 선택의 원인은 명백히 자카리에게 있었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였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이 그렇게나 공포스러웠던 거다.

‘그저 나를 낳다가 돌아가신 거라 면 차라리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자카리는 쓰게 미소했다. 두 눈을 감고 오래된 악몽을 떠올린다. 절망에 차 만인을 저주하는 어머니의 모

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어머니.’

광기에 찬 어머니의 눈동자가 눈앞에 선연했다. 선명한 증오에 물든 신록의 눈동자는 언제나 악몽 속에 서만 만날 수 있었다.

자카리를 똑바로 쏘아보며 미소 짓는다.

저주처럼 내뱉는 말.

‘네가 날 죽였어.’

어머니의 차디찬 손가락이 뺨을 더듬는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 적 없던 어머니.

‘너만 아니었더라면…… 난 이렇게 되지 않았어. ’

어머니의 말이 족쇄처럼 자카리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건 바로 나였으니까.’

이엘리 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입 밖에 낸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 또한. 무섭다. 차라리 도망치고 싶다. 자카리는 사형선고를 받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그리신 그 그림은 폭 주할 때의 내 모습이야.”

“……자카리.”

“난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조차…… 내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괴물이니까.”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이엘리를 처음 만났던 그해, 몰래 아샤 축제에 놀러 갔던 그때.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녀 앞에서 폭주했다. 어머니 앞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그 당시에도 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어.”

자카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자카리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결국 어머니께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말았지.”

“자카리, 그건……”

“그런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큰 충 격을 받으셨어. 아마 인정하실 수 없었겠지.”

목소리는 조금씩 더 낮아졌다. 고개를 푹 수그린 그는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뇌까리고 있었다.

“날 낳기 위해 목숨까지 거셨는데, 그렇게 태어난 자식이 괴물이라는 것은……”

새파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가던 자카리는 덜컥 말을 멈췄다.

“역시 견딜 수 없으셨을 거야.”

“그, 하지만.”

“게다가 내 끔찍한 모습도 보셨지. 결국 어머니를 죽음에 몰아넣은 사람은 바로 나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자카리는 다시 한 번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어머니는 끝까지 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태어남과 동시에 누군가를 절망하 게 하고, 그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다니.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공허한 시선이 이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를 증오하시는 것도…… 사실 이해할 수는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카리는 숨을 죽인 채, 저를 응시하는 이엘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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