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96)

24화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보통 숙녀들은 그림과 수예, 악기 따위를 교양으로 익힌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흠을 잡히기 싫어했고, 제 신분이 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녀는 스케치북 대신 잘 마른 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리 와, 머리 다 젖었잖아.”

자카리는 순순히 머리를 갖다 댔다. 그녀는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눈 냄새가 나.”

“그건 어떤 냄새야?”

“음, 차갑고, 서늘하고…… 뭐 그런 냄새?”

“차갑고 서늘한 건 냄새라기보다는 촉감 아니야?”

자카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엘리의 손길이 기분 좋다는 것처럼, 자카리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마치 은빛 대형견을 돌보는 것 같다. 그녀는 열심히 자카리의 몸에 묻은 눈을 털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자카리는 그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림이라.”

솔직히 별생각 없이 질문한 것이었다. 자카리는 비스듬히 눈썹을 꺾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솔직히 좀 별로야.”

“그, 그래?”

그녀는 좀 머쓱해졌다. 평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면 웬만해서는 ‘좋다’라고 말해주던 자카리였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 이 다소 씁쓸해 보였기에, 그녀는 더 묻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전대 공작 부인께서 그림에 취미가 있으셨지.’

혹시 그에 관련하여 뭔가 사연이 있었던 건가?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난 잘 모르긴 하지만, 굉장히 서글퍼 보이는데…….

다소 알쏭달쏭한 기분이 된 채, 이엘리는 수건을 치웠다. 그러자 자카리가 그녀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 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는 이엘리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자카리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참. 밖에 선물 있어.”

”선물?”

“응.”

고개를 끄덕인 자카리가 그녀를 창 밖이 보이는 쪽으로 이끌었다. 이엘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와, 눈사람이잖아?”

성인의 가슴께까지 닿는 크기의 어마어마한 눈사람이었다. 동그란 갈색 열매를 박아 눈을 만들고, 까만 숯으로 웃는 입을 그려 두었다. 빨 간 털실 목도리까지 둘러, 본격적인 모양새였다.

“눈이 많이 왔기에 만들어 뒀어.”

“저 정도 크기면, 만드는 데 무척 힘들었을 것 같은데.”

“남부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서 눈 놀이를 못 한다고, 네가 몇 번 아쉬 워했잖아?”

그런 말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녀는 그의 품에 파묻힌 채,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우리 자카리. 어린 동생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훌쩍 자랐는지 모르겠네.”

“……”동생 아니야.”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어쩐지 어린 동생이 훌쩍 자란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환하게 웃는 이엘리의 모습에 자카리는 그녀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동생 아닌데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눈은 그쳤지만 날 씨가 차가웠기에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영지를 시찰하러 나섰다.

이엘리는 불만 반, 만족스러움 반으로 자카리를 배웅했다.

‘공작님이 자카리를 인정하시는 건 좋지만, 너무 굴린단 말이지.’

공작이 자카리를 제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애초 영지의 대소사를 맡길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작은 그를 다소 험하게 대하곤 했기에, 이엘리는 그 부분이 다소 불만

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이젤에서 손을 뗐다. 눈사람 스케치가 끝나 있었다.

“어머나, 눈사람인가요?”

“응. 어때?”

“엄청 잘 그리셨어요! 색만 칠하면 더 괜찮을 것 같은데.”

마침 곁에 있던 메리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물감을 손에 잡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흠, 본격적으로 화구를 좀 구매해볼까.”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무심결에 답했다.

“들어와.”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녀장이었다. 아니, 공사다망하신 하녀장이 왜 여 기까지 온 거지? 의아한 얼굴이 된 이엘리 앞에서, 하녀장이 깊숙이 고개를 숙인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초상화 방’에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어.”

공작이 ‘초상화 방’에 조만간 부르 겠다고 하더니, 자카리가 없을 때 부를 줄은 몰랐다.

마른침을 삼킨 이엘리가 몸을 일으 켰다. 하녀장은 한 걸음 비켜서서 이엘리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럼 메리는 이제 볼일을 보도록 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메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긴장한 채, 그녀는 하녀장을 따 라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초상화 방은 너른 공작 성안에서도 가장 고즈넉한 장소에 있었다. 공작 과 고위 사용인만이 간신히 드나드는 조용한 방.

이엘리가 방 문고리를 쥐자, 하녀 장은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초상화 방 안에 들어갔다. 그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낮은 조도를 유지한 방 안에는 갖가지 크기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초상화는 바로.

“이분이 아마도……”

처음 본 순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름다운 아델라이데.’ 자카리의 어머니이자, 공작의 아내.

“……무척 아름다운 분이시네.”

초상화 속 여인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마도 여름을 형상화한 여인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부드럽게 굽이치는 다갈색 머리카락 안쪽, 신록처럼 짙은 녹색 눈동자가 이엘리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슴처럼 기다란 목과 가녀린 체구까지 완벽했다.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자카리와 닮았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카리는 어머니를 쏙 빼닮은 외양을 가지 고 있다. 이엘리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러고 보니, 자카리는 단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어째서일까?’

이엘리는 꼼꼼하게 그림을 뜯어 보았다. 미소 한 점조차 짓지 않고 있는 초상화 속의 여자. 그 외양은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무표정한 얼굴은 싸늘하고 슬퍼 보였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그림은 내 아내를 그린 그림이다.”

“아, 공작님……”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니지! 이엘리는 애써 놀란 얼굴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생각을 알아볼 수 없는 눈 동자로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묻는다.

“그래, 내 아내의 초상화를 본 소 감은 어떤가?”

“전대 공작 부인께서는 무척 아름 다운 분이시네요. 자카리가 어머니를 닮았나 봅니다.”

이엘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공작은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자카리의 외모는 아델에게 서 대부분 물려받았으니까.”

“……”

뚜벅뚜벅 걸어온 공작이 이엘리의 곁에 섰다. 이엘리는 바짝 긴장하여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공작의 관심사는 그녀에게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초상화를 향해 있었다.

”아델라이데 로렌.”

분노하거나, 혹은 권태로움에 찬 평소의 말투와는 달랐다. 그저 바람 잦아든 호수처럼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아델라이데 헤센바이츠이기도 하지.”

공작은 말없이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자카리를 바라볼 때와는 다르게 상냥했다.

“내 아내는 이 공작 성에서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말했었어.”

“……”

공작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빙해처럼 써늘한 시선.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그럼 공작님과 소공, 그리고 공작 부인께서 함께 그려진 그림은..? ”

“이런, 너도 참 어리석구나. 그런 그림이 있을 거라고 보이나?”

공작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말해 놓고서도 바보 같은 말이라 여겼기에 이엘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공작은 다시 한 번 그림을 올려 다보았다. 새파란 시선이 여자의 모습을 훑는다.

“아름답고 선량한 여자였지. 비록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공작 각하.”

“그녀를 죽인 것은 결국 우리 부자 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해.”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차마 묻지는 못하고, 이엘리는 눈동자 만을 굴렸다. 공작의 눈동자는 초상 화 속의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애정에 굶주려 서글퍼 하는 그 시선.

그 눈동자는 예전 자카리의 눈동자 와 꼭 닮았다.

“……아마 난 지금, 죗값을 치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지.”

공작의 목소리라 믿을 수 없을 만 치 서글픈 목소리였다. 당황한 이엘리가 공작을 돌아보았다.

“그렇다 해서, 겨우 이 정도로 내 아내가 만족할지는 잘 모르겠지 만……”

“저, 공작님?”

한숨처럼 중얼거리던 말을 듣던 그녀가 물었다. 금세 표정을 가다듬은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실언했군. 아무것도 아니다.”

“……”

무언가 더 캐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작을 휘감은 쓸쓸한 분위기는 서럽기만 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시선이 방구석으로 향했다. 새카만 천으로 덮여 있는 그림.

초상화를 본 이후에 천을 들춰 보려 했는데, 공작과 마주치는 바람에 확인하지 못했다. 그때 공작이 나직 하게 물었다.

“그 그림이 궁금한가?”

“예?”

“정 궁금하다면 봐도 좋다.”

정말로 봐도 되는 걸까. 이엘리는 공작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얼굴에 찰나 보였던 서글픈 감정들은 사 라진지 오래였다.

권태로운 얼굴을 흘끗 바라보던 이엘리는 마음을 정했다. 종종걸음으로 그림 앞에 다가서서, 검은 천을 들춰 보았다. 순간 연녹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이건.”

기묘한 그림이었다. 새하얗게 일어 나는 눈보라 사이로 어린 소년이 등을 돌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새하얀 설원처럼 흩날리는 은발 아래, 짙푸른 눈동자에는 광기가 가득 서린 채였다.

붉은 핏줄기가 길게 뻗어 나가는 모습만이 온통 희고 새파란 그림 속에서도 홀로 색채를 가졌다.

“자카리?”

이엘리는 황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비록 그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어 리고 작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작은 소년은 자카리였다.

공작이 피식 미소했다.

“그 그림은, 내 아내가 직접 그린 그림이지. 모델은 아내가 목격한 괴물이야.”

“……예?”

이엘리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공작 부인께서 목격한 괴물이라고? 하 지만 저 그림의 주인공은 아무리 봐 도 그녀의 남편이다.

그렇다면 공작 부인께서도 자카리를 괴물로 생각하셨다는 건가?

“내 아내가 왜 죽었는지 궁금한 가?”

공작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절망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때, 저벅대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버지.”

화들짝 놀란 이엘리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공작만이 태 연한 낯을 하고 있었다.

“이엔에게 그림을 보여 주기 전에 제게도 한 번만 물어봐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얼음을 갈아 만들어 낸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성큼

다가선 자카리가 손을 뻗어 천을 내려 버렸다. 그림은 검은 천 안쪽에 삽시간에 가려졌다. 그의 태도엔 날 이 서 있었다.

“이엔, 여기서 뭐해?”

“응? 음, 그러니까.”

“네가 왜 초상화 방에 있는 거야?"

자카리의 푸른 눈동자가 싸늘하게 번뜩였다. 봄날 하늘처럼 따스했던 시선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녀도 가문의 일원이니, 초상화 방에 들어올 자격은 충분하지 않나.”

“……아버지.”

공작의 느긋한 말에 자카리가 나지 막이 으르렁거렸다. 공작은 여유로 운 얼굴로 그런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 안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해묵은 증오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보다 가문의 후계 랍시고 아비를 대하는 예의가 많이 없어졌구나.”

“다른 분도 아닌 아버지께서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카리의 대답에 공작은 묘한 얼굴을 했다. 자카리는 그런 공작을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스스로 자식을 대하는 태도부터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 아버지의 생각은 어떠신지.”

자카리가 빈정거렸다. 그 말을 들 은 공작의 눈매가 우아하게 휘었다. 공작이 나긋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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