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96)

22 화

“넌 보고 또 봐도 모자라다고.”

“그게 뭐야.”

이엘리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연녹색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피곤하지? 공작님부터 만나 뵙고, 들어가서 쉬어.”

“……”

“자카리?”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부른다.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자카리는, 그제야 흠칫 놀라며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지그 시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다정함은 너무 달콤해서, 가끔씩 그녀와 그가 다른 온도로 서 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잊고 만다.

‘네가 날 남동생처럼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어.’

이엘리의 따스함이 이성을 향한 관심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럼에도 그녀를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녀는 제 삶의 단 하나뿐인 빛이자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카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때.

“소공작님, 레이디 헤센바이츠께서 저를 모욕하였습니다. 게다가 하녀 앞에서요!”

이때다 싶었는지 백작 부인이 자카리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표정까지 불쌍하게 꾸며 낸 채였다.

“아, 숙모님. 오랜만에 뵙네요.”

자카리는 그제야 로렌 백작 부인을 알아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백작 부인은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엘리를 볼 때의 다정한 미소는 간 데없이, 그의 표정은 무척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솔직히 반갑지는 않군요.”

“소, 소공작님?”

“이엔이 화내고 있었으니까요.”

“……”

백작 부인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짙푸른 시선은 마치, 그녀를 꿰 뚫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다.

“이엔은 쉬이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니, 분명 숙모님이 분명 어떤 잘 못을 저지르셨겠지요.”

“소공작님, 그게 아니오라.”

“그리고 아쉽게도 저도 숙모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말아서요.”

그때 자카리가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였다. 빙하처럼 싸늘한 푸른 눈동자. 조소만이 가득하다.

“아마, 겨울의 힘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으셨지요?”

자카리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쯤 은 백작 부인도 금세 눈치챘다. 자카리는 비뚜름하게 섰다.

“숙모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거의 빈정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그 말투가 사나운지, 백 작 부인의 낯이 새하얘졌다.

“골치 아픈 일을 모두 해결해 주는 만능 괴물. 그런 거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는지 설명이라도 해 보십시오.”

그 말에 백작 부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후, 어떻게든 변명을 끌어모아 주절댄다.

“저는, 저는 그저 소공작님께서 강력한 힘을 가지신 게 기뻐서 그랬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게 기쁘다고요?”

“그, 그럼요! 헤센바이츠의 그 힘 이 있기에 황가가 북부를 넘보지 못 하는 게 아닙니까?”

황가와 가장 친근한 북부 귀족인 주제에, 말만큼은 청산유수였다. 자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생각이 로렌 백작가 전체의 생각이라면…… 뭐, 좀 서글프긴 하군요.”

서글프다고 말하는 것과 별개로, 표정은 날카로웠다. 자카리는 백작 부인을 차게 내려다보았다.

“겨울의 힘이 그렇게 고귀한 힘이 라면, 어째서 전 지금껏 경멸받으며 살아왔겠습니까?”

“누가 감히 헤센바이츠의 후계자를 경멸한답니까?!”

“위로부터는 내 아버지, 아래로는 그대들 같은 북부의 귀족들까지.”

하지만 자카리의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인 자카리가 빙긋 미소했다.

“전 수없이 많은 경멸을 받으며 자라왔는데요. 아닙니까?”

“…!”

백작 부인은 다시 한 번 제 입술을 잘근 씹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없어 복잡한 낯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자카리가 나긋하게 말했다. 목소리만큼은 봄날처럼 다사롭다.

“이엘리 외의 그 누구도, 이 북부에서 절 경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 습니다.”

진심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는 시선들. 오직 이엘리 만이 자카리를 바라보며 웃어 주었다. 얼음으로 짜 올린 감옥 같았던 세계에서, 홀로 따사로웠던 아샤꽃 같은 소녀.

“그리고 오늘처럼 무례한 일이 있었고, 그 무례함을 제 눈으로 보았으니. 황가에서도 숙모님이 그만 백 작가로 돌아가셨으면 하는 제 의견을 받아들여 주시겠지요. 그렇지 않습이니까?”

“소공작님!”

“감히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 될 여자에게, 북부의 여인이 대들다니 요.”

백작 부인은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숙모께서는 이엔의 교육에 아무런 도움이 되시지 않는 것 같군요. 그 러니……”

짙푸른 눈동자가 백작 부인을 위아 래로 뜯어보았다. 이윽고 청년은 보 기 좋게 눈매를 휘었다.

“교육에서 물러나 잠시 쉬시는 편이 어떠하실는지?”

백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자카리의 외가의 안주인이고, 황가에서 직접 보낸 교육 담당이었다. 자존심이 꽤나 상했는지 절로 부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 저는 소공작님의 숙모입니다, 어찌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숙모보다는 아내가 훨씬 가까운 존재 아니겠습니까?”

자카리는 여상한 목소리로 백작 부 인의 말을 잘라 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숙모를 보았다.

“게다가 숙모께서는 참으로 안이하시군요.”

“저, 저는!”

“제 숙모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오만한 행동이 모두 받아들여질 거라 믿으시다니……”

거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자라왔던 친척인 주제에, 어머니인 양 행동하는 게 눈꼴 시렸었다.

“스스로의 위치부터 잘 자각해 보시길.”

그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은 공작가 와 백작가 사이의 위계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곤란합니 다, 공작 각하께 이번 일은 낱낱이 고할 겁니다!”

“그러시던지요. 그런 건 뭐,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백작 부인은 아득 이를 갈아붙였다. 이제 그녀는 할 말 못 할 말조차 가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오늘 이 일은 황제 폐하께서 불쾌 해하실 거예요!”

“아하. 황제?”

그 말이 자카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말았다. 백작 부인은 몸을 굳혔다. 그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폐하께서 불쾌해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다만.”

괴물. 백작 부인은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영영 녹지 않는 빙하처럼 새파란 눈동자. 은룡의 혈통 특유의 압박감에,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기사의 기세까지 모조리 겹쳐졌다.

백작 부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손을 들어 제 목을 있는 힘껏 조르는 것 같았다.

자카리는 웃었다.

“로렌 백작 부인. 백작 부인께서 살고 계신 이 땅이 어디인지 잊으신 모양입니다.”

“……억, 헉, 허억……”

“여기는 북부고, 북부의 군주는 헤센바이츠입니다.”

이제 백작 부인은 숨조차 쉬지 못 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며 그가 말을 잇는다.

“제 기억으로, 북부의 모든 귀족들은 헤센바이츠에게 충성 맹세를 바 치지요.”

자카리는 서늘하게 말했다.

윽, 큭, 크윽 ! 대답 대신 백작 부인은 목을 움켜쥐고 발버둥 쳤다.

“내 어머니가 그대의 가문 출신이 기에, 그대들의 오만함을 지금 참고 있는 것입니다.”

자카리는 한 걸음 나섰다. 겨울 달 같은 눈동자는 단 한 조각의 온기조차 품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요.”

기묘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백작 부인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북부는 언제든 황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숨이 탁 풀렸다. 백작 부인의 눈동자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헐떡인다.

“헉, 허억, 허억, 헉……!”

“돌아가시지요.”

“……”

백작 부인은 더 말하기보다는 황급히 몸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잽싸게 사라지는 그 뒷모습은, 이엘리에게 당당히을러댔던 평소와는 다르게 상당히 초라했다. 그녀는 황 망하게 중얼거렸다.

“자카리, 이런 식으로 황가의 수족을 쳐 내면……”

“아냐, 괜찮아.”

아까 백작 부인을 대할 때와는 딴 판이었다. 자카리는 다정한 목소리 로 이엘리를 향해 답했다.

“황가보다도 네가 백배는 더 소중해.”

“……”

“게다가, 어차피 이 정도로는 로렌 백작 부인을 완전히 잘라 내지는 못 할 테니까.”

로렌 백작가는 황가가 간신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둔 유일한 북부의 귀족이었다. 황가에서 이 정도로 포 기할 리 없었다.

이엘리는 순간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자카리가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뒤통수에 입술을 댄 채, 어리광을 부리듯 이 다정하게 소곤거린다.

“이엔.”

“응?”

“나, 졸려.”

“들어가서 자면 되잖아?”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대답했다. 그러자 자카리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나 재워 줘.”

“……뭐어?”

이엘리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고집을 꺾을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마수들이랑 엄청 많이 싸웠단 말 이야. 마수들 시체가 꿈에 나올 것 같아.”

“……”

순간 이엘리는 헛숨을 삼켰다. 그렇구나. 저렇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카리는 험난한 전투를 수 없이 치르고 그녀의 곁에 돌아온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뒤돌아선 그녀가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재워 주면 되는데?”

그 말을 들은 자카리가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작게 소곤댄다.

“글쎄, 이엔이 자장가를 불러 주면 잠이 잘올것 같아.”

“너,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어리광쟁이인지 모르겠어.”

이엘리는 뚱하니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양 뺨을 감싸고 시선을 맞추면서, 그는 웃었다.

“누구를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응?”

“누가 날 이렇게 어리광쟁이로 만들었는지는 알지.”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카리는 이엘리의 시선을 뻔뻔하게 마주 보았다. 그녀가 질문했다.

“……그거, 나 얘기하는 거야?”

“정답.”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가 이엘리의 이마에 이마를 톡 맞댔다. 이엘리는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지금 네가 하는 짓을 보니 그런 것 같네.”

“그래서 싫어?”

“아니, 뭐... 싫다고 하면 울 거잖아?”

장난스러운 대답에 자카리의 얼굴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엘리는 찔끔했다. 아니, 요샌 이 녀석의 멘탈도 꽤나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유리멘탈이야? 그녀가 조심스립게 말했다.

“저기, 농담이니까……”

“그럴지도.”

“응?”

아니 얘가 뭐라는 거야? 이엘리는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자카리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날 싫어하게 된다면, 사는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아.”

“음, 넌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데.”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건 당연하다며?”

“그게……”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피식 웃어 버렸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꼭 붙들며 입을 열었다.

“뭐라 말도 못 하겠네. 알았어, 방으로 들어가자.”

자카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주 잡은 자카리의 손이 생각보다도 커서 새삼스럽다. 마치 말 잘 듣는 맹수를 키 우고 있는 기분이라며, 이엘리는 살며시 웃었다.

자카리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엘리는 당장 남편의 등을 떠밀어 욕실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우선 씻고 와, 알았지?”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살펴보다가, 욕실 안으로 쏙 들 어갔다.

자카리의 방 안에 오도카니 앉은 채, 이엘리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세상에, 내 남편이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그때 욕실 너머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음, 이거 좀……”’

그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던 이엘리는 큼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이상 하게 뺨이 달아오른다.

‘……아니야, 자카리는 내 동생 같은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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