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런, 차 한 모금 마실 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답니다. 설명은 천천히 들어도 되는걸요.”
“……레이디 블랑쳇, 저는!”
로렌 백작 부인은 다소 급하게 입을 열었다. 따끈한 홍차는 분명 고소해야 할 텐데, 이엘리의 비웃음 섞인 말을 듣자마자 입 안에 쓴맛이 가득 괴인 탓이다. 이엘리는 눈매를 곱게 접었다.
“우선 호칭부터 정정 해야겠군요. 저는 레이디 블랑쳇이 아니라, 레이디 헤센바이츠 랍니다.”
제도에서도 미모로 유명했던 어여쁜 외양은, 조소를 흘리는 것에도 탁월한 효과를 자랑한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저는 오래전에 영광스러운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지 않았나요.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는 언제까지 저를 ‘레이디 블랑쳇’이라고 칭하실 작정이신지요?”
내 위세가 없으면 호랑이의 위세라도 끌어다 써야지. 이엘리는 ‘황제 폐하’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입술 위에 담았다.
백작 부인은 움찔했다. 황제를 등에 업고 강제로 공작가의 발을 들였 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곧바로 로렌 백작 부인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이엘리는 홀로 화사했다.
“설마…… 백작 부인께서 이런 사소한 호칭 문제마저 실수를 범하신 건 아니겠죠? 이런 자그마한 예법까지 틀려 버리다니, 이래서야 저에게 조언을 주시겠다는 좋은 의도마저 퇴색되겠어요.”
부드러운 말투를 구사하면서, 살살 속을 긁는 그 태도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로렌 백작 부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이엘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혹은 남부의 촌뜨기에게 ‘레이디 헤센바이츠’라고 부르기는 싫으셨던 것인지?”
사이 나쁜 공작과 소공작 사이에서 오랫동안 완충제 역할을 했던 건 단순히 보여 주기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어르고 달래는 와중, 그녀는 본의 아니게 처세술을 갈고 닦았다.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사람이 얌전히 있을 때, 적당히 잘난 척하고 넘어가지 그랬니.’
하지만 이왕 싸움을 시작하기로 한 것, 제대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사실 이엘리는 상대방을 작신작신 밟아 주는 성미였다.
최후의 전의마저 모조리 밟아 버린 이후에, 상대방이 바닥에 떨어뜨린 전의를 승리의 기념품으로 들고 갈 때의 기쁨이란.
“아 참, 아까 유서 깊은 공작가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고 싶다 고 하셨죠?”
“그, 그건, 그러니까.”
백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과 정을 이엘리는 흥미롭게 구경했다.
와우, 얼굴이 저렇게까지 새하얗게 질리네.
반대로 백작 부인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자신은 어째서 방금 전 그렇게 우쭐대며 말했던 것일까. 이엘리가 고작 자작 가문의 여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저도 모르게 승리감에 취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허세 부리지 말 걸!’
누군가가 심장을 손으로 꽉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잘난 척도 할 겸, 저 예쁘장한 계집아이의 기도 미리
꺾을 겸 아무렇게나 떠벌린 말을 저렇게 꼬투리를 잡아 말할 줄이야.
“정말 대단하세요. 아무리 친척 관 계라고 해도, 공작가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아시다니요.”
이엘리는 생긋 웃었다.
백작 부인은 또다시 제 위가 비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애초 공작가와는 그리 왕래도 잦지 않았다. 그저 남부 촌뜨기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이리 꼬이다니!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다소 무례한 것 같긴 합니다만……”
도대체 무슨 말을 또 하려고 저래? 로렌 백작 부인은 반사적으로 긴장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공작가의 이름도 갖지 않은 일개 친척 여인이신 로렌 백작 부인께서, 위대한 공작가의 내정에 관여하시는 게 과연 옳은 처사인지 의문이 드는 군요. 비록 친척이실지언정 선은 지켜야지요.”
뭐라고? 백작 부인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이엘리는 우아한 태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로렌 백작 부인께서는 헤센 바이츠의 이름을 가진 절 배제하시고, 공작가의 내정을 움직이시려 하는 것 같은데. 그런 행동을 제가 공작님이나 소공작께 말씀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나긋한 목소리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엘리는 봄 꽃처럼 아리땁게 웃었다.
“게다가, 저는 이미 법적으로 소공작의 단 하나뿐인 아내예요. 부부는 몸과 마음이 같은 존재죠. 절 이렇
게 대우한다는 건 제 남편이신 소공작님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아까 전에는 황제 폐하였다면, 이번에는 헤센바이츠 공작 부자다. 제가 필요한 때마다 시의적절하게 호 랑이의 이름을 끌어오는 이엘리를 보며, 백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한 가문의 안주인이신 백작 부인께서는, 저에 대한 처사가 올바르다 여기시는 지요?”
“……아닙니다.”
쥐어짜 내는 것 같은 목소리가 고 소하기만 하다. 드디어 등장한 패배 선언에, 이엘리가 답했다.
“다행이예요, 백작 부인과 제 생각이 같아서. 그렇다면 저, 백작 부인의 도움을 얻고 싶은데요.”
“제 도움이라니, 그게 무슨……”?”
“백작 부인께서는 제게 공작가의 내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 하지요? 그러니까.”
이엘리는 고운 눈매를 곱게 접었다. 분홍색 아샤꽃잎인 양, 긴 속 눈썹이 화려하게 팔랑였다.
“공작가의 내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저고, 부인은 곁에서 도와주시는 것에 동의하시겠지요?”
로렌 백작 부인은 움찔했다. 내심 공작가에 관여할 욕심이 만만했는 데, 그녀가 욕심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이왕 승리를 움켜쥐었으면 확실하게 굳혀야지. 그건 이엘리의 평소 지론이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 헤센바이츠.”
패배감에 고개를 떨어뜨리는 백작 부인을 앞에 둔 채, 그녀는 고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이엘리는 공작과 마주 쳤다. 공작은 두 사람의 기세 싸움을 이미 전해 들었던 것 같다.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공작이 설핏 웃었다. 그녀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훌륭한 솜씨였다, 이엘리.”
“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공작에게 마주 인사했다. 미소를 남긴 공작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엘리는 로렌 백작 부인과 한껏 신경전을 벌였다. 백작 부인은 어떻게든 공작가의 내정에 참견하려 노력했으나, 뜻 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백작 부인은 사용인들 에게 꽤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거의 화풀이 수준이었다.
“이 방문을 당장 열어!”
이른 아침부터 백작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하녀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백작 부인 앞에서 있었다. 백작 부인의 요구는 일개 하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방은 전대 공작 부인께 서 사용하신 방입니다. 출입이 금지 되어있어요.”
“난 레이디 헤센바이츠의 교육 담 당이야! 당장 열지 못해!?”
하지만 백작 부인은 하녀에게 열쇠를 빼앗아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일그러진 자존심과 이엘리에게 된통 당했던 기억이 백작 부인을 막무가내로 행동하게 했다.
덜컹 소리와 함께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 부인의 눈동자에 희 열이 서렸다. 내 마음대로 공작 성
을 움직일 수 있어!
‘그래, 난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아 공작 성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도록 권한을 받았어!’
백작 부인은 즐거운 얼굴로 방 안을 살펴보았다.
한때 그녀의 시누이였던 공작 부인 이 머물렀던 방. 햇빛이 들지않도 록 두꺼운 커튼을 내려 둔 방 안쪽 에는, 쓸쓸한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아델은 시집을 잘 가서 공작 부인이 된 것뿐이야. 나도 결혼만 잘했다면 좋았을 텐데.’
백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북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칭송받았고, 끝내 공작 부인의 자리를 얻은 아델라이데.
아쉽게도 백작 부인은 그녀를 질투하는 쪽이었다. 이렇게라도 아델라이데를 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백 작 부인의 눈동자가 욕망에 가득 차 사납게 반짝거렸다.
'죽기 직전까지 그림이나 끄적거리 며 살았나보군.’
방 안에는 군데군데 이젤과 스케치 북 따위가 천으로 가려진 채 흩어져 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거의 없었다. 팔자 도 좋지. 그렇게 속으로 빈정거리던 백작 부인은 기세 좋게 목소리를 놓였다.
“그리고, 바닥의 러그들을 모두 새 제품으로 교체해 두라고 했잖아, 왜 명대로 하질 않아!”
때마침 이엘리는 메리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지?”
“아무래도 로렌 백작 부인이신 것 같은데요……”
메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엘리에게 소곤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백 작 부인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려 퍼지니 그럴 만했다.
질책을 받고 있는 하녀는 다소 불편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쨌거나 로렌 백작 부인은 소공작의 숙모 던 것이다.
“러그, 교체할 거야 말 거야!?”
“알겠습니다, 로렌 백작 부인. 아가씨께 여쭤 보고 교체하겠습니다.”
“내 명령은 명령 같지 않아? 어째서 당장 처리하지 않고……!”
“하지만 장차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 되실 분은, 백작 부인이 아닌 이엘리 아가씨 아닙니까.”
하녀의 목소리에도 약간이나마 반항기가 서렸다. 명백히 이엘리만을 안주인으로 대하는 태도에, 로렌 백 작 부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엘리는 계단참에 선 채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아니, 저렇게까지 사용인들을 무례하게 대할 필요가 있나?’
이엘리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실 백작 부인이 질책하는 방식에는 무례한 구석이 있었다.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으로 내정된 이엘리도 저렇게 고함을 지르며 사 용인들을 대하지 않는데, 백작 부인 은 당연하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녀는 맞는 말을 한 것뿐이다.
‘어쨌거나 공작 성의 물건을 들이 고 내보내는 데에는 내 허락이 필요 한데.’
백작 부인은 엄연히 이엘리에게 교 육을 해 주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녀에게 먼저 허 락부터 구해야 한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그런 과정은 모두 생략한 채, 자기 마음대로 공작성을 휘두르려 들었다.
하녀의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의 눈 매가 서슬 퍼렇게 일그러진다.
“미천한 계집이 감히 내게 말대답을 하려 들어!?”
찰싹! 백작 부인은 하녀에게 망설 임 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이엘리는 와락 목소리를 높였다.
“로렌 백작 부인!”
“……”
백작 부인은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녀가 이엘리를 돌아본다.
“아, 아가씨.”
“이게 무슨 일인가요?”
그렇게 질문하며, 이엘리는 메리에게 눈짓을 했다. 메리는 황급히 달려가 하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엘리가 싸늘한 표정을 백작 부인을 마주 보았고, 그녀는 이를 갈아 붙이며 대답했다.
“그저 버릇없는 계집에게 가르침을 내렸을 뿐입니다.”
“아하. 그런가요?”
이엘리가 비뚜름한 비웃음을 지었다. 하녀의 상태를 살펴보던 이엘리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넌 이만 물러가렴.”
“……네, 아가씨.”
눈치를 살피던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백작 부인은 당장 하녀의 머리채를 잡고자 하는 얼굴이었이지만, 이엘리가 가로막았다. 성큼성큼 백작 부인 앞으로 걸어간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사용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고상한 귀부인께서 하실 만한 짓이 아니네요.”
“아랫것들을 너무 오냐오냐해서는 안 됩니다, 기강을 확실히 잡아야지요.”
기강이라.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공작가의 안주인도 아니고, 한낱 그녀의 교육 담당으로써 들어온 사람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이엘리의 권리를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백작 부인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우습네요.”
“뭐라고요!?”
“오히려 제가 지금까지 백작 부인을 유하게 봐 드리고 있었던 것. 잘 알고 계실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