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로렌 백작 부인이 뭐하는 귀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녀는 이엘리에게 장갑을 던졌다.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또한 그녀는, 날아온 장갑을 피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이엘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엘리는 황가에서 붙인 교육 담당 인 로렌 백작 부인과 독대했다. 그녀는 좋게 말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 잘난 맛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재수 없었다.
“반가워요, 레이디 블랑쳇.”
“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던 이엘리는 순간 미간을 살짝 구겼다. 뭐야, 저 사람 날 ‘레이디 블랑쳇’으로 부르 네?
비록 공작 성안에선 ‘아가씨’라는 애매모호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레이디 헤센바이츠’라는 호칭으로 불려야 했다.
저건 분명, 기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잘못 부르는 거다. 게다가 제가 윗사람이라는 양 행동하는 태도까지, 그녀는 기분이 저조해졌다.
“흠, 레이디 블랑쳇은 무척 아름다 운 분이시네요. 남부 특유의 연약함은 어쩔 수 없지만……”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긴 백작 부인 은 곧바로 이엘리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가 싶더니, 툭 감상평을 내뱉었다.
마치 진열대의 상품이 된 기분이 라,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 게 떴다.
“레이디 블랑쳇께서도 잘 알고 계 시는 사실이겠지만, 공작가에는 내 내 안주인이 부재했었지요. 그래서 레이디의 안목이 필요할 때면, 공작 각하께서는 언제나 제 조언을 구셨답니다.”
이 사람, 전대 공작 부인이 아예 처음부터 계시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네? 그리고 공작각하께서는 백작 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로 아는데, 조언을 구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남부에서 올라오신 레이디 블랑쳇 께서는 아직 공작가에 대해 잘 모르실테죠.”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는 백작 부 인을 바라보며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사실 이엘리가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공작은 백작 부인에게 의견을 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저만큼 이 공작가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요? 제 시누이가 이 성의 안주인이었으니까요.”
백작 부인이 자랑스레 말했다. 과 거 공작 부인이 살아있을 무렵, 백 작 부인은 자신의 시누이였던 공작 부인을 만날 때마다 조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퍼붓곤 했었다.
공작 부인은 그 잔소리를 귓등으로 도 듣지 않았음에도, 백작 부인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멋대로 조언을 했노라 착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레이디 곁에 꼭 붙어있을 테니까요. 말벗조차 없으실 레이디 블랑쳇을 배려하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잡아 제가 이렇게 몸소 방문하지 않았나요.”
“아하, 그러신가요. 감사한 일이네 요.”
그 위 배려는 필요 없는데. 넌 배 려해 주고 싶은 사람이 밥 먹고 있을 시간을 골라 찾아오니? 당장이라
도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엘리는 우선 사교용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블랑쳇에게, 공작가에 대 해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고 싶어요. 정말 유서가 깊거든요.”
“저, 혹시 로렌 백작 부인께서 저를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 이유가 따 로 있으신가요?”
이엘리는 버릇처럼 방긋 웃으며 말 했다. 굳이 해석하자면, ‘왜 이렇게 나대는 거니’란 말을 돌려 말한 것 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알아듣지 못했는지 로렌 백작 부인은 자부심 강한 미소만을 돌려줄 뿐이었다.
“그야 저는 소공작의 숙모이니까 요.”
“아아……”
“그러니 헤센바이츠는 제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일 수밖예요.”
아니, 고작 외척인 주제에 마음의 고향이라니, 너무 나간 거 아냐? 이엘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제 말, 들어 보세요. 겨울은 마수가 들끓는 계절입니다. 레이디 블랑쳇은 따스함에 절어있은 남부에서 올라오셨으니 잘 모르시겠지만, 겨울이 끝나 갈수록 마수는 마지막으로 발악하지요.”
그걸 누가 몰라? 이엘리도 거의 4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땅에서 살아왔다.
자카리가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수 없이 출전했던 것을 보았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마음 졸이며 기 도한 것도 그녀였고, 가끔씩 그가 다쳐 올 때마다 속상해했던 사람도 그녀였다. 근데 뭐라고?
“그래서 소공작께서 손수 마수들을 토벌하러 가신답니다. 연약한 남부 귀족들과는 다르죠.”
……저 말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다고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이엘리는 낯을 살짝 굳혔다.
“북부에는 이름 높은 가문이 많고, 별처럼 많은 레이디들이 소공작님을 흠모하고 있답니다.”
이엘리는 점점 혼란에 빠졌다. 아니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내 법적 남편이 인기가 엄청 많으니, 알아서 물러나라 이건가? 로렌 백작 부인은 이엘리를 관찰하 듯이 바라보았다.
“저는 휘하에 딸이 하나 있지요. 사실, 제 딸을 소공작께 보내고 싶었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엘리는 이제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진작 보내지 그랬니? 자카리가 괴물이라 매도당했던 건 모른 척했던 주제에, 뻔뻔하긴. 공작님에게 미움받았을 땐 불똥이 튈까봐 외면하고, 지금은 잘사는 것 같으니까 배가 아프니?
하지만 백작 부인의 입은 여전히 멈출 줄을 몰랐다.
“솔직히 저는 정말 레이디에 대한 걱정이 커요. 아무리 황제 폐하의 명으로 헤센바이츠 공작가와 혼사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레이디 블랑쳇은 아직 북부에 대해 전혀 모르시지 않나요?”
이엘리는 이 한심한 말들을 어디까지 들어줘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예 제도에 저택을 마련해 두고 가
뭄에 콩 나듯 북부에 내려오는 로렌 백작 부인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게다가, 블랑쳇 가문은 남부의 이름 없는 자작가라고 들었어요. 그런 데 레이디가 위대한 공작령의 안주 인으로 내정되다니, 아무래도 가문의 격이 차이가 나 부담스러우신 건 아니신지.”
“……네?”
순간 기가 막힌 이엘리가 백작 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당당하게 답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레이디 블랑쳇을 도와 드릴 생각이니까요.”
“……”
지금 내가 무엇을 들은 거지? 따스함에 절어있다는 말부터 시작해 서, 연약한 남부 귀족이라는 매도, 그리고 남부의 이름 없는 자작가문이라는 제 친정에 대한 모욕까지. 지금까진 자카리의 숙모라는 이유로 참았지만, 더는 못 참겠다.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니?
“로렌 백작 부인.”
“네, 말씀하세요.”
로렌 백작 부인의 얼굴에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남부 촌뜨기에게 북부에 대해 조언을 해 주었다’라는 뿌둣함만이 가득했다.
찻잔을 달칵 소리 나게 내려놓은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말씀까지 드릴 생각은 없었 지만, 참으로 주제넘으시네요.”
“……뭐라고요?!”
순간 로렌 백작 부인의 얼굴이 딱 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이엘리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긴 속눈썹을 풍성하게 내리뜨자, 사람들이 그렇게나 재수 없어 하던 표정이 완성됐다.
‘이 표정, 오랜만에 짓네.’
눈을 새치름히 뜨면, 예쁘면서도 사람 속 긁기에 딱 알맞은 눈빛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표정을 지었을 땐 황제의 대리인 앞이었는데, 여기서 또 사용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그대로 빈정거림을 시작했다.
“황가에서 직접 선정하신 귀부인이 시니,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주시려는 줄 알았는데.”
“레, 레이디 블랑쳇!”
“고작 자기 자랑, 그리고 알량한 지식을 전시하는 선생님 노릇을 하 실 줄은 몰랐네요.”
아, 이건 선생질이라고 해야 기분 나쁜 게 확 사는데. 레이디로서 최소한의 고상함은 지키려다 보니, 약 간 모자랐다. 하지만 로렌 백작 부 인은 이미 분을 못 이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타격감 좋네, 이 정도면 훌륭해.’
그녀의 입술이 우아한 호선을 그다. 그러게, 작은 이엘리를 건드리면 너도 귀찮아진다니까?
“그게 무슨 무례한 말씀이신가요, 저는 분명 조언을 위해서……!”
“그래요? 참 이상하네요, 제가 로 렌 백작 부인께 들은 말씀 중, 조언은 하나도 없었거든요.”
이엘리는 온기가 남아 있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단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홍차였지만, 이상하게 설 탕을 듬뿍 넣은 것처럼 다디달게 느껴진다. 이엘리는 그대로 생긋 눈웃음을 쳤다.
“따스함에 절어있은 남부, 그리고 연약한 남부 귀족이라는 매도. 아 참, 남부의 이름 없는 자작 가문이라는 말도 하셨네요. 부인의 입은 참 바쁘신 것 같군요, 이런 말을 끝없이 내뱉다니.”
이엘리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음에도, 백작 부인은 등골이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겨울이 끝나 갈수록 마수가 사나워진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건 상식이고.”
손가락까지 꼽아 가면서 이엘리는 하나하나 백작 부인이 했던 말을 되짚었다.
알량한 승리감에 취해 수는 말을 내뱉었던 백작 부인은, 방금 전 나불거리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또한 백작 부인께서 따님이 있으시니, 소공작께 보내고 싶다고 하셨죠?”
백작 부인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 가 되었다. 맞아, 내가 그런 말까지 했지. 확실히 소공작의 아내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이엘리는 어여쁘게 웃었지만,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런데 백작 부인. 제가 소공작의 아내라는 사실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셨나요?”
“저, 그, 그것이.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오라……”
“방금 하신 말씀은, 제가 자카리의 아내임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에나 나올 발언인데요.”
이엘리는 일부러 ‘소공작’이 아닌 ‘자카리’라는 본명을 불렀다. 자카리와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스로가 자카리의 이름을 허락받은 헤센바이츠의 일원임을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하신 말씀 중 어디에 저를 위한 조언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엘리는 과장된 동작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 속눈썹을 예쁘게 깜빡이며 그녀가 말했다.
“설마, 별처럼 많은 레이디들이 제 남편을 흠모하셨다는 말씀이 조언인가요?”
“……”
“참 이상하네요. 백작 부인께서는 법적으로 이미 혼인 관계인 남편의 이성에 관련한 소문을 아내에게 말 하는 게 조언이라고 말씀 하시는데, 제가 알고 있는 조언이란 그런 뜻이 아닌걸요.”
이제 백작 부인은 어쩔 줄 몰라 이엘리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이엘리는 침착하게 말했다.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전 로렌 백작 부인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어요.”
흠흠, 이엘리는 부러 목까지 가다듬었다. 그 이후 낭랑한 목소리로 백작 부인에게 말을 잇는다.
“‘레이디 블랑쳇은 헤센바이츠 소공작에게 한참 모자란 상대지만, 황제 폐하의 면도 있고 해서 관용을 베풀어 많은 레이디들을 거절하고 소공작의 아내로 들였다’란 뜻으로 해석했는데.”
갸웃, 고개를 예쁘게 기울인 이엘리가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 백작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건가요?”
“……다, 당연하죠. 어찜 그렇게 사람의 호의를 악의적으로!”
백작 부인이 되레 언성을 높였다. 이엘리는 그런 부인을 빤히 바라보더니, 되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있었던 일을, 자카리와 공작 각하께 말씀드려도 되나 요?”
“아, 안 돼요!"
깜짝 놀란 백작 부인이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이엘리는 턱을 괴며 백작 부인에게 웃어 보였다.
“참 이상하네요. 백작 부인께서 제게 악의 없이, 모욕적인 뜻이 없는 발언을 하셨다면.”
“제 남편과 시아버님의 귀에 들어 가도 상관없지 않겠어요?”
로렌 백작 부인은 다시 한 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은 이엘리가 한 말이 정곡이었으니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백작 부인은 황급히 찻잔을 들어 올렸고, 차로 목을 축이려 했지만.
“콜록콜록!”
너무 황급히 마시는 바람에 사레가 들렸다. 풋, 조그맣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기침을 하던 백작 부인의 얼굴 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얀 손수건을 내밀면서, 이엘리는 다정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