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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196)

16화

아마 그들은 황녀 대신 고작 자작 영애를 소공작의 반려로 밀어 넣으면서, 사이 나쁜 공작과 그 후계자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날 것을 노리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부자의 사이에서 완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로 인해 공작님과 자카리 사이가 그나마 괜찮아지니까……”’

이런 식으로 공작가를 흔들어 놓고 자 하는 건가.

외부에서는 적어도, 사이 나빴던 부자 관계가 좀 더 견고해진 것처럼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것은 황가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황가에 보이기 위한 성의 표시를 하라 이겁니까?”

탁. 자카리는 소리 나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편이 나중에 네가 작위를 잇는 데도 좀 더 수월하겠지.”

적어도 공작은, 지금은 자카리가 작위를 잇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 도를 보이고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 라며, 이엘리는 불만스러운 와중에도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나 자카리는 차갑게 되묻는다.

“작위를 잇는 건 헤센바이츠의 권리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황가의 눈치를 보았습니까?”

“물론 공작가는 언제든 황위를 되찾을 수 있는 가문이야.”

그렇게 대답한 공작이 물이 든 잔을 집어 들었다. 입술을 축인 공작이 느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자는 가끔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다.”

그 말에 자카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켜야 할 사람.’ 그는 반사적으로 이엘리를 곁눈질했다.

이엘리 또한 공작의 말을 모조리 이해했다.

공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미한 신분의 자작 영애. 하지만 그녀로 인하여 공작가의 관계는 견고해졌다.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내가 공작가의 걸림돌이 되기를 바랐을 텐데, 그 반대가 되어 버렸 지.’

황가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각은 명확하다. 자카리는 그녀를 소중히 여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끔 누 군가의 약점이 된다.

공작의 말은, 황가가 그녀에게 꼬투리를 잡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황가의 비위를 일정 부분 맞춰 줘야 한다는 거다. 바늘로 찌른 양 가슴 이 따끔거린다.

“그 말씀은 역시 저를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이엘리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여 공작이 상당 히 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식으로 대화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을 테니까.

“상황 파악이 빨라서 좋군.”

“……죄송합니다.”

그녀가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카리가 이엘리를 돌아보더니, 커다랗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자카리의 말이 맞다. 네가 저지른 잘못은 아니지.”

드물게 공작이 자카리의 말을 긍정했다.

이엘리는 사금파리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강대한 헤센바이츠 공작가에게 있어 그녀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 처음 자카리와 결혼한 것 자체가, 황가의 필요에 의해 떠밀리듯 한 거였으니 오죽할까.

그때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황가에서 직접 언급할 정 도라면, 야만족 정리는 필요하겠군요.”

“자카리.”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자카리는 지금껏에 매달려 왔다. 이 그를 토벌에

미웠던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토벌 그런데 그녀 자신 밀어 넣는 이유가 될 줄은 몰랐다.

“이엔, 고개 들어.”

“그래도, 나 때문에 네가.”

그녀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돌을 삼킨 양 마음이 무겁다.

“이엘리, 스스로의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때 공작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엘리는 시선을 내리깔았고, 자카리는 공작을 노려보았다.

“고작 너 같은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가문의 후계자를 야만족 토벌에 직접 내보내겠나?”

경쾌하리 만치 가벼운 목소리로 공작은 말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고, 노래하듯 말을 잇는다.

“황가는 언제나 헤센바이츠를 경계하고, 북부가 세를 불릴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공작가의 사이 나쁜 두 부자가 평화로이 작위를 승계하는 거지.”

“아버지."

“왜냐하면 어떻게든 두 부자가 서 로를 물어뜯어야, 황가가 끼어들 여지가 많아질 테니까.”

공작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 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이엘리를 뜯어보고는, 차게 미소했다.

“거기에 야만족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겹친 것뿐이다. 네 문제가 끼친 영향력은 아주 미미해.”

말투는 오만하고 눈빛 또한 냉랭하 지만, 그 말 자체는 이엘리를 감싸는 내용이었다.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도 자카리는 지금 여기선 공작의 말에 동의해야 함을 눈치챘다. 그가 말했다.

“아버님 말씀이 맞아.”

“그러니까 마음의 부담 같은 건 갖지 마.”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 해서 그 말을 완전히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영민한 그녀였으니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자카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 켰다. 후식으로는 이엘리가 그토록 기대하던 캐러멜을 곁들인 초콜릿 에클레어가 나왔다.

평소라면 디저트를 깔끔하게 비웠을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손도 대지 않고 접시를 물렸다. 자카리의 수심이 깊어졌다.

그날 저녁,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친 이엘리는 산책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찬바람이라도 쐬면 약간이나마 정돈이 될까 생각 한 것이다.

메리가 그녀에게 숄을 건네주었다.

“아가씨, 숄이라도 가져가세요.”

“아냐, 괜찮아.”

어차피 조금만 거닐다 들어올 거 고, 찬 공기를 직접 맞고 싶은 마음 도 있었다. 고개를 저은 이엘리가 훌쩍 밖으로 나섰다.

메리는 한숨을 삼켰다. 평소라면 억지로 숄을 걸쳐 주었을 테지만, 지금의 이엘리는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분위기만 봐서는 함부로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날씨가 꽤나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저러 시나. 메리는 미간을 좁혔다.

잠시 후, 자카리가 그녀의 방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비 운 상태로, 메리만이 숄을 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메리. 이엘리는 어디 있지?”

“방금 전 정원으로 나가셨습니다.”

“지금 시간에?”

자카리는 잘생긴 눈썹을 슬쩍 구겼 다. 기분이 저조해진 모양이다. 그 모습에, 메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 록 작은 주인은 예전에 비해 꽤나 상냥해졌다지만, 그건 아내 한정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냉정하고 건조한 사람이었고, 그를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이엘리뿐이었다.

“……설마 숄조차 걸치지 않고 나 간 건가?”

“예. 그것이…… 찬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셔서.”

메리가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동동거렸다. 짧게 혀를 찬 자카리가 그 숄을 받아 들었다.

“내가 갖다 줄 테니, 메리는 가서 일 보도록 해.”

“감사합니다, 작은 주인님.”

한시름 놓았다며, 화색이 된 메리 가 자카리에게 숄을 건넸다. 보드라운 숄의 감촉이 손바닥에 감긴다. 쓸데없이 우울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카리는 걱정을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남청색 밤하늘 안쪽에는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별들이 총총했다.

이엘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찬 공기는 아직 까진 기분 좋은 수준이었다. 마음만 무겁지 않다면 참 좋을 텐데.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폐부에 차가운 공기가 와르르 밀려든다.

“자카리."

이엘리는 제 남편의 이름을 작게 불러 보았다.

처음 만났을 적,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홀로 서 있던 소년이 떠오른 다. 오랫동안 상처받아 날을 세우던 작은 소년. 마치 동생처럼 사랑스럽던.

“네게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적어도 나 때문에 피해를 받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하여 결혼한 건 아니었다. 얼굴조차 모르고 시작된, 정략결혼에 가까운 관계. 그래도 어린 네가 귀여웠다. 도와주고 싶었 고,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지.

“나, 자카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되잖아.”

이엘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땅을 파고 있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니.

우울한 기분을 애써 떨쳐 내려 그녀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렇게 돌아

서던 중,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뻑, 삐익, 뻑.

응? 이 소리는 도대체?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법한, 조그마 한 소리였다.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그녀가 문득 제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새잖아?”

그녀는 황망한 얼굴로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환한 달빛 아래, 깃도 나지 않은 조그마한 새가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낙엽이 지는 나뭇가지 안쪽으로 조그마한 등지가 보였다. 그녀는 우선 급한 대로 양 손을 모아서 새를 담아 올렸다.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이런 늦가을에 어린 새가 있다고?”

그러고 보니 북부에만 살고 있는 새가 있다고 들었다. 먹이가 풍족한 가을에 새끼를 낳고, 성장시킨 이후 남부로 내려가 겨울은 난다고.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 저 정도 높이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정원사들은 보통 아침 일찍 정원을 정리했기에, 정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녀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서 새를 올려 주는 것이 빠르다.

‘금방 다녀오면 되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합리화를 한 그녀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난꾸러기 소녀처럼 씨익 웃는다.

“기다려 봐, 내가 둥지에 안전하게 넣어 줄 테니까.”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린 이엘리는 곧장 나무에 달라붙었다.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밖으로 훤히 드러나긴 했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떠랴 싶었다. 그녀는 잽싸 게 나무 위에 올랐다.

“웃차.”

그녀가 조심조심 가지 위로 나아갔다. 튼튼한 나뭇가지는 그녀의 가벼운 체중 정도는 거뜬하게 지탱해 주었다.

이윽고 새 둥지에 가까이 다가간 그녀가 새끼 새를 조심스럽게 넣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렴.”

그녀가 방긋 눈웃음을 쳤다. 포르르 날아온 어미 새가 새끼를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게 다리를 늘어뜨린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야가 높아지니, 좀 더 먼 곳에 자리한 풍경이 보였다.

“헤센바이츠 공작령.”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원 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도시는 잘 정돈 되어있다.

황금색과 주홍색, 그리고 끄트머리 로 남청색이 뒤섞이는 황혼 속에 머 무른 도시는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자카리.

남동생 같았던 아이. 어느새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수줍게 웃던 소년 은 지금은 청년이 되었고, 뭐든지 혼자 할 수 있는 완벽한 소공작이 되었다. 그에게 내가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닐까.

“이, 이엔?!”

그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정원에 나온 건지, 숄까지 떨어뜨린 그가 새하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라, 자카리. 언제 왔어?”

“지금 방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위험하잖아, 도대체 거기는 어떻게!”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대답을 해 주 던 자카리는, 미간을 구긴 채 목소리를 높였다.

배시시 눈웃음을 친 그녀가 가지 안쪽으로 꼼질꼼질 몸을 옮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쏙 내민 채 조심스레 묻는다.

“아, 알았어. 내려갈게. 지금 내려가면 되지?”

“아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내 가 데리러 갈 테니까……!”

고개를 저으며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 혼나기는 싫었던 이엘리의 행동이 좀 더 빨랐고, 그 행동은 실수를 불러왔다. 가지에서 비틀대던 그녀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앗!”

짧은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휘청 균형이 무너지고, 그녀는 속절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엔!”

이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스럽게도 높은 나무는 아니니,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 같다.

“…..?”

그런데 통증은 전혀 없었다. 이엘리는 꼭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고, 순간 기겁했다.

자카리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를 빤히 노려보던 자카리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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