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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96)

14화

“전 더 이상,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고요한 집무실 안, 자카리의 목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엘리는 소년을 빤히 보았다.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은, 이엘리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때 자카리가 흘끗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제가 아버님의 폭력을 감내하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공작이 눈썹을 밀어 올렸다. 명백 히 불쾌하다는 표정임에도, 자카리는 침착하게 말을 맺었다.

“왜냐하면 이엔이 슬퍼할테니까요.”

이엘리를 바라보며 자카리가 씩 웃어 보였다.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뭔가 생각 이 많은 듯한 표정. 잠시 후, 공작이 마땅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카리 헤센바이츠.”

“예.”

“네가 저지른 이번 일의 처벌로, 일주일간의 근신을 명한다.”

냉랭한 목소리를 듣던 자카리가 살짝 눈을 치켜떴다.

생각보다는 약한 처벌이었다. 채찍에 맞는다거나, 며칠 정도는 굶는다 거나 하는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 데. 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아버님.”

“……두 사람 모두 물러나라.”

복잡한 얼굴로 공작이 명령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두말없이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매달렸다. 하얀 얼굴은 금세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 자카리. 이게 다 나 때문 이야.”

이엘리는 눈가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꺾은 채,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네가 마법을 쓸 필요도, 공작님께 맞을 필요도 없었는데.”

“아니, 그런 건 다 괜찮아.”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손이 이엘리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보다 너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카리.”

이엘리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눈물로 그렁그렁하는 연녹색 눈 동자를 보던 그가 속삭였다.

“있잖아, 이엔.”

“응?”

“다시 한 번, 고마워.”

도대체 뭐가 고맙다고. 이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 때문에 네가 지금 이렇게 맞았잖아. 이렇게 아플 필요도 없었는데.

그때, 자카리는 그녀의 어깨에 툭 고개를 기댔다.

“넌 처음으로 내 편이 되어 준 사람이야.”

“너 덕분에 아버님께 내가 괴물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어. 그러니까……”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한 숨에는 열은 안도의 기색이 서려 있어, 이엘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 신 그녀는 양손을 들어 올려,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그는 다시 웃었다.

“……잊지 마. 넌 네 삶의 기적이 고, 구원이야.”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바보. 꾹꾹 울음을 눌러 참던 이엘리는 결 국 웃으면서 울어 버렸다.

자카리는 일주일간의 근신에 처해졌다. 평소 자카리를 대하던 공작의 태도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처벌이었다.

식사도 주어졌기에, 그녀는 내심 안도했다.

그녀는 매일매일 자카리가 갇힌 방으로 찾아갔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종알거렸다.

“있잖아, 자카리. 영지의 불량배들이 모두 정리됐대.”

“그래? 잘됐네, 사실 근신이 풀리면 내가 처리하려고 했었는데.”

소년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엘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방문에 등을 기대앉았다.

“넌 좀 쉬어야 할 필요가 있어. 일 중독자도 아니고, 그게 뭐니?”

“하지만 그들은 널 상처 입혔잖아.”

“음, 그래도.”

“영지의 치안을 위해서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는 잠시 잠잠해졌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녀를 싫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 런 생각이 들었다.

이엘리도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자카리가 소곤거렸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왜?”

“시간이 흐르면...”

시간이 흘러서 어른이 되면. 작위를 이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너를 더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을 테니

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소녀가 툴툴댈 것을 알아, 자카리는 그냥 조용히 웃었다.

3. 너와 나의 거리는 어느새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올해 겨울이 지나면 이엘리는 열일곱 살, 자카리는 열아홉 살이 된다. 위태로운 평 화가 이어졌다.

자카리는 몇 번인가 전장에 나갔 고, 무사히 되돌아왔다. 그녀는 내심 자카리가 다칠까 가슴을 졸였지만, 그는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앗, 자카리다.’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에 들어서던 이엘리가 멈칫 그 자리에  섰다.

자카리는 한창 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다. 예전엔 괴물 취급을 받던 그였지만, 이제 그는 훌륭한 실력을 가진 동료이자 주군이었다.

첫손에 꼽히는 검술 실력 또한 그를 증명한다. 챙강! 챙! 카드득! 진검과 똑같이 무게를 맞춰 둔 연습용 검들이 부딪치며 햇빛을 반사해냈 다. 땀방울이 허공에 튕겨 반짝거린다.

‘와, 엄청난데.’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카리는 허리를 낮게 숙이며 기회를 노렸다.

순식간에 아래를 빼앗긴 기사가 휘청거린다. 퉁! 몸을 튕기며 자리에  서 일어난 그가 커다랗게 검을 휘뒤른다.

기사의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로 날아올랐다. 챙그랑! 검이 바닥에 세게 부딪친다.

“후우.”

자카리가 길게 숨을 뱉으며 검을 내렸다. 함께 대련하던 기사가 정중 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소공작님.”

“수고했네, 포덴경.”

그때 이엘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수건을 자카리에게 건네며,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친다.

“수고했어.”

“이엔?”

자카리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생긋 웃은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기사 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기사님들?”

“아, 오셨습니까?”

기사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엘리는 작게 소포장한 초콜릿이며 사탕들을 나눠 주었다.

간식을 받아 든 몇몇의 얼굴에 홍 조가 서려 있었기에, 자카리는 순간 굉장히 불만스러워졌다.

“날씨도 쌀쌀한데, 뭐하러 여기까지 나왔어?”

“내 남편 내조하러 나왔다, 왜?”

이엘리는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자카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내 남편. 가슴속이 깃털로 문지르는 것처럼 간지럽다. 근처의 기사들이 획휙 휘파람을 불어 댔다.

“소공작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만?”

“설마 수줍음 타시는 겁니까?”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전사가, 이렇게 쉽게 얼굴을 붉히다니요!”

“다들 시끄러!”

자카리가 귓바퀴까지 빨갛게 물들 인 채 소리를 질렀다. 기사들이 와그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가자, 이엔.”

입술을 꾹 다문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연무장을 돌아서, 기사단 숙소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쪽에는 자그마한 산책 로와 벤치들이 마련되어있었다.

“자카리.”

“자- 카- 리이.”

일부러 목소리를 늘여 자카리를 불 러 봤지만, 무엇에 그리 단단히 토라졌는지 그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벤치에 제 손수건을 깔 아 주는 행동만큼은 능숙하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곁에 앉은 그를 보던 이엘리가 초콜릿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왜 또 토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거 먹고 기분 풀어.”

“아- 해.”

다소 수줍어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카리는 입을 벌렸다.

그녀는 그의 입 안에 초콜릿을 쏙 밀어 넣었다. 달콤한 맛이 확 퍼지 자, 청년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녀가 사르르 웃었다.

“어때. 맛있지?”

대답 대신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득 그녀의 손에 들린 초콜릿 포장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다시 속이 뒤틀린다. 실은, 이엘리는 기사들에게 꽤나 인기 좋은 레이디였다.

아샤꽃처럼 화사한 미모, 상냥한 말씨, 환한 미소. 게다가 그녀가 올 때마다 뿌리는 달콤한 간식까지. 상

당한 인기를 구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카리는 그것이 싫었다. 그가 물었다.

“……왜 자꾸 기사들까지 간식을 챙겨 주는 거야?”

한 입 얌전히 받아먹고 하는 말이 고작이거다. 이엘리는 미간을 잔뜩 구기면서 인상을 썼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그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자카리는 뚱하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렇긴하다. 그녀가 공작가의 기사들과 잘 지내는 건, 그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문제다. 그런데도 마음이 술렁거린다.

“내가 기사들한테 잘해야, 기사들도 너한테 잘할 거 아냐!”

내조 몰라? 그녀는 콧바람을 불었다.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무어라 대답하려다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러니까…..”

넌 내게만 잘해 줬으면 해.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는 애꿎은 화살을 기사들에게 돌렸다.

“하지만 기사들, 가끔 널 음흉한 눈으로 본다고.”

“뭐어?”

“아까 톰슨, 얼굴이 빨개진 거 못 봤어? 그리고 펠레일도……”

자카리는 주절주절 기사의 이름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그를 이엘리가 묘한 미소로 응시했다.

“자카리. 이젠 기사들과도 꽤나 사이가 좋아졌네?”

“……별로 안 친해.”

“그으래?”

말꼬리를 늘이며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자, 자카리가 밉지않게 그녀를 흘겨보았다.

이엘리는 흡족한 얼굴로 남편을 마 주 보았다. 한참의 눈싸움 끝에,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그였다.

‘그래도 말이지, 예전보다 훨씬 나은걸.’

무표정한 얼굴로 공작이 내리는 명령만 수행하던 자카리. 표정이 풍부 해지고 자기 의견을 확실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자카리. 이엘리는 단연 후자가 더 좋았다. 그래, 애는 무릇 저래야지.

‘게다가…… 이렇게 훌쩍 자랄 줄 은 몰랐지. 남자애들은 참 빨리 커.’

예전의 팔다리가 가늘었던 소년은 간데없이, 그는 키가 훌쩍 자라고 몸이 단단해졌다.

그녀보다도 머리 하나만큼은 더 커 서, 나란히 서서 대화하려면 살짝 올려다봐야 할 정도다.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얀 은발, 그리 고 짙푸른 눈동자. 심혈을 기울여 깎은 조각 같은 외모.

미세하게 남은 앳된 티만 벗어내 면, 분명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청년이 될 터다. 그녀는 입가를 매만졌다.

‘음, 나 설마…… 침을 흘린 건 아니지?’

다행이다, 침을 흘리진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조그맣게 제 어깨를 떨었다.

“추워?”

“음, 그게.”

자카리가 기민하게 물어 왔다.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조금 쌀쌀 하긴 했다.

하지만 맑은 공기가 좋았기에, 벌써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알록달록하게 물든 단풍은 꽤나 어여뻤고, 찌륵찌륵 곤충 소리도 듣기 좋았다.

한숨을 내쉰 자카리가 재킷을 벗어주려다 말고, 몸을 굳혔다.

‘땀 냄새가 나면 어쩌지?’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 그녀가 감기 걸리는 것도 좀 그런데. 그는 힐끗 이엘리를 곁눈질했다.

“자카리. 옷 벗어 주려고 그래?”

“그게, 그러려고 했는데.”

눈치 빠른 그녀가 잽싸게 묻자, 머뭇거리던 자카리가 대답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살랑거렸다.

“줘, 재킷.”

“하지만, 땀 냄새가.”

“어차피 오늘 저녁은 공작님과 함께 저녁 식사할 거잖아.”

이엘리는 어깨를 으쏙해 보였다. 말간 연녹색 눈동자가 그를 제 안에 담고는, 빙그레 웃는다.

“그때 옷 갈아입으면서 다시 씻을 거니까 괜찮아.”

자카리는 결국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엘리는 옷을 추스르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땀 냄새 같은건 나지 않았다. 대신, 자카리 특유의 차분한 체향이 고였다.

“기분 좋다.”

“뭐가?”

“너랑 이렇게 있는 거.”

제가 하는 말이 자카리를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는 전연 모르는 그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자카리의 목 뒤가 화르륵 붉어졌다.

아쉽게도 이엘리는 저 멀리 장대하 게 펼쳐진 공작 성을 바라보느라,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발을 뻗으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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