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96)

13화

새파란 눈동자가 공작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자카리는 수많은 폭력을 감내했었다. 그건 그가 공작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였다.

자신이 공작에게 저지른 죄를 알고 있었기에, 비록 스스로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공작이 아팠을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참고 견뎠다.

‘이엘리.’

자카리에게 있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은 이엘리인 것처럼, 공작에게 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자카리 때문에 공작은 그런 사람을 잃었다. 자카리는 공작의 마음을 이해했다.

증오하고 증오하여,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랄 터다. 입장이 바뀐다면, 만약 그가 이엘리를 잃어 버린다면…… 아마 자신도 그랬을 테니까. 자카리를 보던 공작의 눈이 홱 뒤집혔다. 숫제 악을 지른다.

“내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너를 참고 있는지 알고나 그러는 거냐!”

“그만, 그만하세요!”

보다 못한 이엘리가 공작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쌔근거리던 공작이 순간 멈칫했다.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공작은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뭐지. 그녀가 바짝 긴장하던 그때.

“..아델?”

공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연녹색 눈동자가 공작을 응시하자, 공작은 숨을 삼켰다.

연연한 새싹 같은 눈. 좀 더 자라 고 그 빛이 짙어지면, 녹음처럼 푸르른 눈이 되겠지.

그 눈은 공작이 열렬히 사랑했으되, 단 한 번도 상대방의 사랑을 얻지 못했던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공작 각하, 소공께서 그런 일을 벌이신 이유는 절 구하기 위함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 이엘리가 고개를 깊이 조아린다. 작은 목소리 끝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탓하시려거든 저를 탓하십시오.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이엔, 도대체 네가 왜 그런 말을 해!”

고개를 가로저은 자카리가 이엘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어째서 네가 나 대

신 사과하나,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엘리는 소년의 팔뚝을 토닥였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그 목소리를 들은 자카리가 멈칫했다. 반쯤 이성을 잃었던 소년의 눈 동자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자카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그녀를 등 뒤로 숨겼다. 으르렁거리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이엔.”

“자카리.”

“이건 네 탓이 아니야.”

자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하 나의 구명줄인 것처럼 그녀를 포옹 한 자카리가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네가 벌을 받을 필요도, 사죄할 필요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새파란 눈등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

제 어미를 꼭 빼닮은 아름다운 얼굴이 공작을 노려보았다. 마치 죽은 그녀가 되살아와 저를 원망하는 것

같다.

‘아델.’

공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 톱이 손안을 아프게 찔렀지만, 그 통증조차 느낄 수 없었다.

‘……너의 그림자는 도대체, 어디 까지.’

그래서 더 자카리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저 아이 자체가 공작을 질책하던 아델라이데를 닮아서. 저 아이 때문에 잃어버린 그녀를 자꾸 떠 오르게 해서.

비록 그녀는 자신을 평생 사랑하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소년의 존재는, 그녀가 영영 제 곁을 떠났다는 것을 항상 느끼게 했다.

“자카리, 이거 놓아줘.”

“이엔.”

“난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해?”

자카리를 달래 준 그녀가 그를 살짝 밀어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엘리는 허리를 곧게 편 채 공작 앞에 섰다. 공작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카리가 다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공작 각하,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저희는..”

“……각하?”

하지만 공작은 내내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의아해진 그녀가 공작을 다시 한 번 불렀다.

그의 눈동자가 이엘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진실로 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먼 과거로 달음박질치는 기억들. 공작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테론.’

짙은 밤색 머리카락, 빛을 머금은 신록처럼 우아하게 빛나던 눈동자. 한 그루 나무처럼 싱그러운 미모를 가졌던 여자.

그 여자가 탐이 났고, 그래서 억지 로 곁에 붙여 두었다.

그녀가 천천히 시들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외면해 버렸다.

결국 그녀는 영영 미소를 잃어버렸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차가운 목소리. 적의 가득한 시선. 가까이 머무르는 것조차 질색하여 외면하고 거부해 버린다.

‘제가 평생 당신을 사랑할 리 없다는 것이요. ’

이 땅에 발 딛고 머무르는 것조차 진저리가 난다는 양, 망설임 없이 세상마저 저버리고 떠난.

“……아델라이데.”

공작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의 앞에서는 한 번도 웃어 준 적 없었던 냉랭한 초록색 눈동자.

하지만 그녀와 꼭 닮은 눈동자를 한 저 아이는 달랐다. 온 힘을 다해 자카리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데도, 테론 자신도 외면했었던 저 아이. 그들을 절망하게 한 어린 괴물을.

“아버지.”

그때 자카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고요한 목소리와 반대로, 짙푸른 눈동자 안쪽에는 불길이 일 렁거리고 있었다.

이엘리 곁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온 소년이 공작을 똑바로 보았다.

“모든 건 제 잘못이니, 이엔을 함 부로 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지금 그깟 계집 때문에 내게 대드는 게냐?”

아델라이데를 닮아 아름다운 아들의 얼굴은, 언제나 공작을 경멸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공작은 애써 사나운 목소리를 꾸며 냈다. 그러자 소년은 입술 끝을 비 틀어 올렸다. 그가 비뚜름하게 말했다.

“그깟 계집이라니요. 이엘리는 제게 있어, 어머니보다도 중합니다.”

“어딜 감히 그 입으로 아델을 이야기해!”

공작은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카리는 이엘리를 눈 안에 담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불사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현명한 분이시니.”

짙푸른 눈동자는 새파란 빙하 같다. 제 아들의 차가운 목소리는 생경하기만 했다. 지금껏 죽은 듯이, 공작에게 순종했던 소년은 자리에  없었다. 자카리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라 믿습니다.”

“감히 네가 날 협박하는 건가?”

“아뇨, 지금은 부탁입니다. 하지만.”

자카리는 웃었다. 공작을 꼭 빼닮 은 비웃음이다.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이며 그가 말을 잇는다.

“……아버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에 따라, 협박이 될 수도 있겠지요.”

“뭐라고?”

공작이 기가 막힌 얼굴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는 더 물러 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이엘리를 지켜야 했다. 지켜 야 할 사람이 있는 자는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버님께서 ‘괴물’이라 이야기하시는 힘이 제게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카리!”

“그러니까 전, 이제부터 제게 주어진 이 힘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입니다.”

짙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비스듬히 미소를 지은 자카리가 공작을 향해 말을 뱉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 제 의지를 관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공작이 제게 퍼붓던 폭력을 항상 홀로 감내하던 소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힐난을 어느새인가 소년은 거부하고 있었다.

소년은 처음으로 스스로의 의견을 말했다.

공작이 요구하는 말도 안 되는 일 에, ‘불합리하다’라고 주장한다. 굴종하지 않고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그리고 전, 온전히 제 의지로 이엘리를 지킬 것입니다.”

……저 아이가 곁에 있어서겠지. 공작의 냉랭한 시선이 이엘리에게로 향했다. 아들 곁에 선 작은 소녀는 연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공작을 마주 보았다.

아샤꽃처럼 가녀린 소녀. 저 소녀의 무엇이 그리 특별하기에, 지금껏 골방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죽이던 어린 괴물을 살렸나.

“그를 위해서라면…… 전 무엇이든 지 다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소년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여름날 햇살처럼 맑고 투명했다. 태생부터 따라왔던 외로움은 흔적조차 없었다.

자카리. 이엘리는 입 안으로 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발현했던 겨울의 힘은 온전 히 제가 물려받은 핏줄의 문제입니다.”

“그녀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은 공작이 말없이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이성을 잃고 날뛰었던 모습은 말끔 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제 공작은 잠잠하게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자카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압니다. 아버님이 저 때문에 누구를 잃었는지."

그 말에 공작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자카리는 문득 먼 과거를 더듬었다.

공작이 잃었던 ‘아델.’

자식도, 남편도 단 한 번도 사랑했 던 적 없던, 아니 사랑할 수 없었던 어머니. 자신의 죄.

“그렇기에 전, 앞으로도 제가 할 의무를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피가 말라붙은 뺨, 파리한 얼굴. 그럼에도 지금 눈앞의 소년은 무척이나 당당했다.

공작의 냉랭한 눈동자가 자카리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작게 웃었다.

“예전에는 그 죄책감 때문에 아버 님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담담한 목소리. 소년은 더 이상 긴 장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차분 히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제가 그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이제 달라졌습니다.”

“그래, 그 잘난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공작이 되물었다. 자카리는 이엘리와 함께 구경했던 축제를 떠올렸다.

“저는 오늘 밖으로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새파란 하늘, 무리 지어 피어난 연 분홍색 아샤꽃송이들, 따스한 공기. 카페의 예쁘장한 케이크들과, 처음

맛보았던 길거리 음식.

손에 손을 잡고 환하게 미소 짓던 사람들. 꽃잎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던 여인들의 치맛자락, 큰 소리로 웃던 아이들.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흐르던 갖가지 색깔의 등불들은 어떠했던가. 그리고 모든 풍경을 아름답게 해 주던 너. 나의 유일한 구원.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모든 풍경들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영지민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려 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는 괴물이 아니며 누군가가 그를 필 요로 한다는 것 또한, 모두 그녀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이엘리를 통해 알게 되었 습니다. 그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언 제나 두려워했던, 그리고 깊은 죄책 감을 느꼈던 아버지.

죄책감은 남았으되 두려움은 사라 졌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니까. 자카리는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이 영지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그저 아비에 대한 죄책감으로 수 없는 전투에 나섰다.

피투성이가 되어 승리해 돌아오면, 괴물이라며 손가락질하던 주변 사람 들의 시선. 그 시간, 고통과 외로움 만이 가장 절친한 벗이었다.

“그러나 전 이제부터 '괴물’로 살지 않겠습니다.”

자카리는 똑바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으로 움츠러들던, 소극적인 모습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제가 가진 건 그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일 뿐입니다.”

“그러니 전, 제가 살아갈 방향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공작은 가만히 자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열 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제 삶의 방향은, 북부의 차기 주인이자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는 소공작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통해 책임감을 배웠 다. 괴물이기에, 죄책감 때문에 억지 로 영지민들을 지키는 건 이제 싫었다. 자카리는 흘끗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카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소중한 아내를 지키기로 결심한 남편입니다.”

자카리. 이엘리는 숨을 삼키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짙푸른 눈동자 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치르는 수 없는 전투는 이제, 아버님에게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나서는 게 아닙니다.”

평소라면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말을 끊을 공작은, 드물게 소년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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