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녀는 지금껏 이런 험한 광경 따위, 본 적 도 없었을 텐데. 나 때문에. 나 때 문에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뭐가 고마워.”
그래서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엘리는 젖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답한다.
“네가 날 구해 줬잖아.”
“널 놓고 가지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그건 내가 기다리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래도 내가 널 좀 더 생각했어야 했어.”
자카리의 목소리가 좀 더 격해졌 다.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환멸이 온몸을 집어삼킨다. 만약 이대로 너
를 보지 못하게 됐다면? 그때 소녀 가 타박타박 걸어왔다. 그녀가 설핏 웃어 보인다.
“자카리.”
“돌아가자.”
순간 자카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짙푸른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 순간, 바람 닿은 물결처럼 흔들린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 전혀 몰랐다.
그는 괴물이었다. 이렇게 쉽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두려워하며 도망친다 해도 붙잡을 자격 따위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같이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이엘리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뺨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툭, 투둑. 그는 숨조차 죽이고, 소 리 없이, 오래오래 울었다.
비처럼 흐르는 눈물이 뜨거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엘리가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순간,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어린아이를 달래듯 이엘리가 자카리의 등을 도닥거렸다.
자카리는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한참 동안 숨을 멈췄다. 오랫동안 삼켰던 절망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따뜻했다.
모든 일이 끝나니, 이엘리는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이다. 무리 지어 핀 아샤꽃향기가
진했다. 그 와중에 피 내음까지 섞이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이엔, 괜찮아?”
당황한 자카리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녀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 멀리 멀어졌던 시야가 깜빡이며 자리로 돌아온다.
등 뒤로는 조각난 시신들, 바닥에는 피에 엉킨 아샤꽃잎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풍경을 보며, 이엘리는 두 눈을 꽉 내리감았다. 그때 자카리가 속삭였다.
“이엔.”
“응?”
“실례 좀 할게.”
그와 동시에 자카리가 그녀를 답삭 안아 올렸다.
반사적으로 내려 달라고 말하려던 이엘리는, 그냥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기대기로 했다.
머리도 어지러웠거니와, 닿아 오는 체온이 기분 좋았다. 사실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도 했
다. 걸음을 옮기며 자카리가 소곤거렸다.
“그거 알아?”
“뭐?”
“너에게서는 아샤꽃향기가 나.”
순간 이엘리는 어이없는 낯이 되었다. 이렇게 아샤꽃이 활짝 피었는 데,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거야 아샤꽃이 이렇게 무리 지 어 피었으니까. 꽃향기가 나는 건 당연하지.”
“아냐, 너에게서 나는 향기야.”
“음, 그냥 네 착각 아닐까?”
“착각 아니야.”
자카리는 드물게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샤향기. 아샤꽃을 닮은 소녀.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폭주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전투 중 몇 번 폭주했던 경험이 있었던 그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질 일이었다.
왜냐하면 폭주한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뭐, 네가 향기가 난다면 그런 거겠지.”
별로 따질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그러려니했다. 그러던 중 희고 차가운 것이 뺨에 닿았다.
“어라.”
이엘리는 두 눈을 깜빡였다. 새싹 처럼 말간 눈동자가 까만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허공을 수놓는 아샤꽃잎 사이로, 새하얗고 포슬포슬한 무언가가 춤을 추듯 흩날린다. 그녀가 소곤거렸다.
“……눈이 와.”
“아.”
이엘리를 따라 자카리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의 힘은 날씨에도 영향을 주는구나.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긴 속 눈썹 위에 뿌려진 달빛 가루, 팔랑 팔랑 쏟아지는 눈송이의 창백한 그림자.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시야가 닿는 세상은 모두, 아샤꽃향기로 가 득 찬 것 같다.
“예쁘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는 또다시 이름 모를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냐,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건 바로 너야. 난 네 모든 것을 갖고 싶어.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자카리는 눈 동자를 돌렸다.
* * *
공작 성에 돌아가자마자 두 사람이 마주한 사람은 바로, 헤센바이츠 공작이었다.
화창한 봄날에 아샤꽃잎과 뒤섞여 내리는 눈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그 눈 자체가 괴물이 일으킨 마법의 영 향이라는 것을 공작이 모를 리 없었다.
공작이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알고 있었다.”
공작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 구두 굽 소 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가 괴물이라는 것도 알고.”
새파란 시선이 자카리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온기라고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칼날 같은 눈동자.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곁에 서 있던 이엘리가, 힘을 주어 손을 마주 잡는다.
“지극히 한심하고 모자란 성정을 가졌다는 것도 안다.”
공작의 목소리는 일견 평온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서린 감 정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이라
도 자카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처럼, 격렬한 분노와 증오가 억눌려 있는 목소리.
“하지만…… 네가 지금 저지른 일.”
그 말에 자카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공작의 집요한 시선이 자카리를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네가 정녕 제정신이냐?”
공작은 비뚜름하게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차디찬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네가 괴물이라는 것을, 이따위 방식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었나?”
괴물. 그 단어에 숨이 턱 막혔다. 그 단어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먹었음에도, 오랫동안 그를 얽어매던 그 단어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공작은 날카로운 목소리 로 물었다.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내’ 라는 계집아이 곁에서?”
공작은 자카리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어김없이 찔러 들었다.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혼 자라면 이런 힐난을 받아도 괜찮다. 모욕도, 감정을 죽이는 일도 모두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이엘리.’
그의 곁에는 이제 그녀가 있었다. 아샤꽃을 닮은, 세상에서 가장 소 중한 제 아내가 함께한다.
‘너는 괴물이 아니야.’
깊은 고독과 절망에서 그를 건져내 준 이엘리. 그녀가 그렇게 말한 다면 정말로 그럴 것이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해줬어.’
자카리는 그녀의 앞에서 겨울의 마법을 보였다.
분명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도 가 끔 스스로가 무서워지곤 하니까. 하 지만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인 그를 보면서도, 이엘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내게 함께 돌아가자고,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해 줬 어.’
자카리의 눈동자에 새파랗게 날이 돋았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도 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진 겨울의 마법, 괴물이라는 이름, 그가 가진 원죄. 모든 것 과 맞서 싸우리라 결심했다.
“예전이라면 아버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자카리는 차분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고요한 그 시선. 평소 아들이 보이 던 불안정한 눈빛과 전혀 달랐다. 지금 자카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있었다.
“제 실수는 인정합니다.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하겠습니다.”
“반성? 고작 반성 따위로 지금 일 이 덮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공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소년은 기죽지 않았다. 그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하나, 아버님께서 제게 가하시는 지금 이 힐난은 부당하십니다.”
“반성을 입에 담으면서도, ‘힐난이 부당하다’라.”
공작이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자카리는 흔들리는 대신, 공작을 차가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사실 공작의 질책은 과한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공작 령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 늦은 눈이 짧게 내리기는 했지 만, 북부는 본디 겨울이 긴 영지였다.
“고작이 정도 눈이 내린다 하여 북부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습니다.”
“괴물이 폭주할지도 모르는 감정 상태를 겪었음에도, 감히 네가 그리 지껄여 대나?”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사죄를 표합니다. 하지만.”
자카리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그 동작은 자신의 아비인 공작과도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어째서 저만 이 모든 것을 감내해 야 합니까?”
자카리는 처음으로 그들 관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물었다.
공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소년의 얼굴엔 감정이라곤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작을 향하는 건 순 수한 의문이었다.
“……당연한 물음을 묻는구나. 그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렇군요. 저는 죄를 지었고, 또한 괴물로 태어났으니까요.”
자카리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입술 끝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서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죄 갚음을 위해 이렇게 감내해 야 한다면, 그는 참겠습니다. 하나.”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 그럼 에도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던 말. 태어난 순간부터 괴물이라는 원죄를 가졌다.
그 원죄 때문에 저질렀던 죄가 생생히 살아서 항상 목을 졸랐다. 그래도.
“제가 괴물로 태어난 건……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헤센바이츠의 핏줄 때문 아닙니까?”
“자카리!”
처음으로 공작의 오만한 얼굴이 무너졌다.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공작 앞에서, 그는 웃었다.
“아마 아버님께서는 스스로가 괴물 이 아니라는 이유를 드시겠지요.”
“......”
순간,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자카리는 공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선언했다.
“아버지, 세상에 괴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작은 말문이 막혔고, 다음 순간 격렬한 증오를 느꼈다. 새하얀 분노 가 머릿속을 불태운다.
“어찌 감히 네가 그런 말을 해!”
홀로 고고한 존재처럼 언제나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공작.
그러나 공작은 지금 이때,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작의 눈동자에 새파랗게 날이 섰
다. 공작이 악을 썼다.
“너 때문에, 내가 누구를 잃었는 데!”
공작이 성큼 다가섰다. 비록 키는 컸으되, 나이에 비해 다소 마른 소년이었다. 소년의 마른 몸이 아비의 그림자 아래에 남김없이 가려진다.
설마. 이엘리의 연녹색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자, 자카리!”
이엘리가 비명처럼 제 남편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퍽! 공작은 자카리의 배 위로 망설 임 없이 발길질을 했다.
콰당탕! 어찌나 세게 발길질을 한 건지, 자카리는 벽면에 거침없이 부딪쳤다.
“콜록!”
자카리가 고통스러운 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공작은 소맷단을 끌러 접어 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의 공작은 반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빙하 같은 두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공작은 망설임 없이 아들의 멱살을 쥐었다. 끌려오는 소년의 뺨으로 주 먹이 날아왔다. 픽!
“자카리, 안 돼!”
소년의 고개가 옆으로 꺾임과 동시에, 이엘리는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일방적이며 잔혹한 폭력. 지금의 공작은 마 치 그를 완전히 부수어 놓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카리의 목을 틀어쥔 채, 공작이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올렸다. 새파 란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네가, 감히!”
공작은 다시 손을 휘둘렀다. 퍽! 하지만 이번에는 공작의 뜻대로 되 지 않았다.
자카리가 공격을 막아선 거였다. 소년의 손아귀가 공작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어찌나 그 힘이 강한지, 붙잡힌 공작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까드득. 공작의 입술 사이로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팽팽 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눈을 사납 게 뜬 채 공작이 으르렁댔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여기까지입니다.”
“뭐?, ,
“제가 아버님의 폭력을 감내하는 건, 여기까지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