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96)

11화

“미안, 내가 늦었지.”

“조그만 꼬맹이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사내들이 우중우중 일어나며 사납 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카리가 비스듬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는 좀 이상했다. 그녀가 어떻게든 일어나려 할 때.

“그러니까…… 잠시만 눈 감고 있어.”

순간, 이엘리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인간이 가졌다고는 도무지 믿어지 지 않는 거대한 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 말에 따랐다.

그 순간,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바 람이 몰아닥쳤다. 잘 갈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아아악!”

그 바람이 노리고 있던 건 바로, 가장 앞에서 건들거리던 한 남자였다.

끔찍한 단말마가 들리는가 싶더니, 뜨거운 액체들이 후드득 그녀 위로 쏟아져 내린다.

투둑, 투두둑. 철퍽.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인간의 잘린 파편. 비릿한 피 냄새가 순식간에 주변을 덮쳤다.

“뭐, 뭐야!?”

“저거…… 괴물이야!”

혼란과 공포가 삽시간에 주변을 뒤 덮었다. 사내들은 두려움에 차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카리는 알고 있었다. 아주 혹시 라도 자신이 여기서 폭주한다면, 최 소공작령은 반파될 것이다.

‘이성을 잃으면 안 돼.’

그는 스스로에게 절박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자꾸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대다니.’

아주 만약 그녀를 잃어버렸다면? 그 가정에, 분노로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데 그때.

“다, 다가오지 마!”

이엘리를 붙든 사내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사내는 새파랗 게 날이 선 칼을 들어, 이엘리의 목

을 꾹 누르고 있었다. 목이 따끔하 다 싶더니 가느다란 핏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괴물! 가까이 오기만 해 봐, 이 계집을 죽여 버릴 거야!”

그녀를 결박한 남자의 목소리는 다 급했다. 생리적인 공포에, 이엘리는 손끝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카리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자카리가 나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기묘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 겨울 달빛처럼 서늘한 미소.

“네가 죽을 거야.”

광! 바로 그때, 짧은 봄날과는 어 울리지 않는 겨울바람이 폭발했다.

순간 이엘리를 붙들고 있던 손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목을 겨누고 있던 칼날이 떨어지는 것도 물론 이었다.

챙강! 칼날이 땅을 구르는 소리는 귀를 세게 두드린다.

조각 조각난 시체들은 제멋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찬바람이 주변을 휩쓸었다. 바닥에 흐르던 피조차 삽시간에 붉은 얼음으로 얼어붙었다.

눈을 감은 와중에도 냉기가 주변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이엘리는 빳빳하게 굳었다.

‘……자, 자카리?’

헤센바이츠의 후계자가 물려받은 은룡의 힘은, 만물을 씹어 삼키는 겨울의 힘이다. 그리고 자카리는 지금껏 태어난 모든 공작가의 혈통을 통틀어 가장 순수한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히, 히익……”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셋 에 남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사내가 엉덩이로 바닥을 긁으며 뒤로 물러났다.

소년은 느른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감정 한 톨도 남지 않은 것처럼 냉정한 얼굴.

“……사, 살려……”

“살려 달라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오만한 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본다.

새하얀 악귀처럼 자카리가 미소를 지었다.

얼음과 바람, 서리와 눈으로 쌓아 올린 세계. 지금 이 순간, 자카리는 그 세계의 단 하나뿐인 군주이며 지 배자였다. 소년은 나른한 어조로 되 물었다.

“그 문제는 이미, 끝난 거 아닌 가?”

“자, 잘못했습니다! 저희는……!”

“잘못했다는 말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카리는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손끝을 튕기자 바람이 휘몰아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그 목소리는 좀 서글프게 들렸다. 소년이 가진 원죄. 그 원죄로 저지 른 새로운 죄. 수없이 잘못했다 빌

어도 영영 괴물로 남아야 했던 그. 서리 악마, 겨울의 괴물, 푸른 피가 흐르는 은룡.

“너희는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어.”

내가 과거 그랬던 것처럼. 소년은 처음으로 제 아버지를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아버지가 그를 열렬히 증오하는 이 유, 평생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자의 단 하나뿐인 역린, 사랑하는 여자.

“그러니까 죽어.”

싸늘한 선고가 떨어졌다. 마음껏 힘을 사역하는 자카리는 ‘서리 악마’라는 악명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오로지 파괴를 위해 탄생한 것 같은 겨울의 신. 새하얗게 일어나는 서리와 얼음, 냉기의 마법.

사내들의 얼굴에 본능적인 공포가 서렸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히이익,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인간의 몸으로 용의 피를 짊어진 자카리였다.

한번 폭주할 때면 피아를 가리지 못하고 주변을 학살한다. 그래, 난 괴물이야.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소년의 입가가 자기 파괴적인 기쁨으로 비틀렸다.

이성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당장이 라도 끊어질 것 같다. 안 돼, 이대 로라면.

‘이 도시는 사라질지도 몰라.’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용이 가진 본능, 파괴의 힘이 소년의 온몸을 쥐고 마구 뒤흔들었다.

콰쾅, 과과광! 다시 한 번 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순간,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자카리."

입을 막은 천이 풀어진 게 천운이었다. 그녀는 간절하게 자카리를 불렀다. 눈은 감은 채였다.

그는 아마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확신이 들어서였다.

“……자카리, 내 목소리 들려?”

순간 자카리는 멈칫했다.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훅 밀려드는 달콤한 향기. 그는 숨을 삼켰다.

‘아샤 향기.’

고작 그 목소리를 들었다고, 분노에 가득 찼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 앉는다.

몸속에서 용트림을 치던 힘들도 잠 잠해졌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만 진정해. 응?”

기나긴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역사 속에서도, 그 피를 가장 짙게 물려 받아 태어난 소년.

그 말은 곧, 그에게 겨울의 마법에 대해 가르쳐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힘을 다루는 법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깨우쳐야 했기에, 자카리는 아마도 자신의 힘을 다루는 게 미숙 할 터.

“……이엘…… 리.”

자카리가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불렸다. 이엘리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눈동자가 크게 벌어진다. 그는 가만히 양손을 내려다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흐으윽.”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가 헐떡였다.

“미안, 미안해, 미안, 이엔, 이엘리, 

저, 정말로 미안해……”

공작가의 선조, 겨울의 은룡 헤센 바이츠. 그 힘을 물려받아 은룡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자신.

그녀는 그를 보며 ‘넌 괴물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그 말에 구원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힘을 사역하는 난…… 과연 인간일까?”

“자카리."

“괴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말에 이엘리가 몸을 움칫 떨었다. 내리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카리, 어째서 그런 말을 해.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눈을 감고 있음에도 자카리가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느껴졌다. 흐득흐득 흐느껴 우는 소리가 심장을 쥐어뜯는 것 같다.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울 지 마. 네 잘못만이 아니잖아. 그리 고 네 잘못이라 해도 괜찮아, 난 끝 까지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괴물 아니야.”

“……이, 이엔.”

“너처럼 잘생긴 괴물이 어디 있어?”

날뛰던 힘은 이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절망에 빠진 와중에도 그 사실이 생경했다.

지금껏 그를 괴롭혀 왔던 은통의 힘, 이렇게 쉽게 가라앉는 힘이었던 가.

하지만 그녀는, 그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지 않았 나. 그는 숨을 삼켰다. 어떻게든 진

정하려고 노력했다.

“윽…”

자카리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아직 울 때가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사내들은 도망친 지 오래, 사 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윽고 소년은 차분한 목소리를 꾸며 내어 이엘리에게 말했다.

“눈은 아직 뜨지 마.”

폭주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나직한 목소리. 그는 이제 평소처럼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이제 진정한 거야?”

“응, 대충은.”

자카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마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 그녀가 바르르 떤다. 그가 물었다.

“……내가 무서워?”

“아니.”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으 니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 이엘리는 다시 한 번, 단호 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무서운 게 아니야. 그냥…… 익숙하지 않은 거야.”

흑 끼치는 피비린내. 쇳내와도 비 숫한 그 역한 냄새를 맡는 이때. 현실감이 와르르 덮쳐 온다.

“미안해.”

“자카리.”

“너에게는…… 이런 광경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자카리는 손을 들어 피가 된 제 뺨을 문질렀다. 그대로 그녀의 눈을 손으로 부드럽게 가렸다.

따스한 손바닥이 젖은 눈 위를 덮어 준다. 이엘리는 몸의 떨림이 더 욱 커져 가는 것을 느꼈다.

“넌 이런 건, 몰라도 상관없는데……”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 만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 의지대로 호흡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이엘리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칼날이 목에 닿아 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목을 손으로 감 쌌다.

‘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이엘리는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과호흡 증상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자카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전장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 전투에 나간 병사들이 가끔 저런 증상을 겪곤 한다. 그도 그랬었다. 미간을 좁힌 소년이 그녀의 어 깨를 쥐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이엔.”

“하아, 학, 하악...”

헐떡이는 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분명 그녀는 물 밖에 서 있는 데, 느닷없이 물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숨이 막혀 어지러웠다.

“이엔, 괜찮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어 봐.”

“아, 안 돼, 수, 숨이……”

꼭 감은 눈 아래로 그렁하게 눈물 이 맺혔다. 그 순간 그는,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함을 느꼈다.

“……미안. 잠깐 실례할게.”

속삭인 자카리가 곧바로 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을 삼키는 따스한 입술. 이엘리는 입술 사이로 밀려들어 오는 숨을 갈급하게 삼켰다.

거칠었던 호흡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흐옷, 하아, 하……”

이엘리의 숨이 느리게나마 안정을 찾는다. 자카리는 그녀가 진정할 때 까지, 그녀의 입술로 제 숨을 나눠 주었다.

이윽고 이엘리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자카리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

눈을 꼭 감은 채, 이엘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쓰게 웃은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을 잡았다.

“이리 와. 아직은 눈 뜨지 말고.”

이엘리는 자카리를 따라 종종걸음을 쳤다. 그녀의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서, 그는 숨을 삼켰다.

“발 조심해.”

조각 조각난 시체를 지났다. 얼어붙은 피가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가 말했다.

“이제 눈 떠도 돼. 하지만 뒤는 돌아보지마.”

그의 말을 들은 이엘리가 조심스레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달빛 아래 드러나는 연녹색 눈동자는 아직도 촉촉하게 젖은 채였다.

……그녀를 울리고 말았다. 그는 치솟는 분노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구해 줘서 고마워, 자카리.”

이엘리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바로 이 말이었다.

연녹색 눈동자는 오로지 자카리의 얼굴에 고정되어있었다. 일부러 뒤는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티가 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