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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96)

10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 후에도, 계속……”

자카리가 작게 더듬거렸다. 흰 뺨 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작게 속삭인다.

“할 수만 있다면, 너와 이 축제를 함께 보내고 싶어.”

“물론이지.”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미 소를 보며, 자카리는 오늘 하루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빌었다.

아샤 축제는 어느새 끝물로 접어들 고 있었다.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들은, 꽤나 구경할 만한 풍 경이었다. 화사하게 치장한 여인들의 치마가 꽃잎처럼 부푼다.

여인의 손을 잡은 사내들 또한, 시종일관 즐거운 얼굴이었다.

어둠 속을 밝히는 오색의 등불은 땅에 별이 뜬 것처럼 아름다웠고, 우수수 쏟아지는 분홍색 아샤꽃잎들은 우아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우리 다음에 축제에 나올 땐, 같이 춤도 추자.”

춤추는 사람들을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던 이엘리가 말했다. 아직 그들 은 성년이 아니었기에, 축제에서 춤을 출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카라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아얏.”

그녀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깜 짝 놀란 자카리가 이엘리를 돌아보 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니, 그게.”

이엘리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이런,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계속 걸음을 절뚝거리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이엘리를 안아 들었다.

“까악!”

화들짝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자카리의 목을 끌어안았다. 소년의 눈 이 그녀의 발에 닿았다.

“너, 발이..?”

“괜찮아.”

그녀가 황급히 대답했다. 실은 아 까 전부터 발이 아프긴 했다. 새로 신고 나온 구두 탓이었다.

하지만 자카리가 워낙 즐거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처럼 밝아진 분위 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발이 온통 상처투성이잖아.”

자카리가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말 했다. 솔직히 상처투성이는 과장된 말로, 발뒤꿈치가 약간 까진 것에 불과했다.

이 정도는 그냥 연고나 바르면 되는이데……. 이엘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세상에.’

자카리가 수선을 피우는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으와, 창피해. 그녀는 소년의 품에 고개를 쏙 묻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의사에게 향할 기세였다.

“저기, 나 좀 내려 줄래?”

“안 돼, 의사에게 보여야 해.”

“무슨 이런 상처 가지고 의사야? 그리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이엘리가 낮은 목소리로 자카리에게 쏘아붙였다. 창피한 건 둘째 치고, 그는 공작령의 후계자였다. 사람 들의 시선이 달가울 리 없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그녀를 벤 치 위에 앉혀 주었다.

“그렇다면 약이라도 사 올게.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눈동자가 불만스럽게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그녀가 홀로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위를 데려올걸. 하지만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혼자 있을 수 있어.”

자카리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어쩐지 그녀를 안고 약국까지 갈 기세여서, 그녀는 질겁했다.

“저기, 자카리. 설마 나 안고 약국까지 갈 생각은 아니지?”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 데.”

“안 돼. 그러면 사람들 눈에 너무 띄잖아.”

이엘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쨌 든 자카리는 소공작이었고, 사람들 눈에 띄는 게 불편한 입장이었다.

자카리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 불퉁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이엘리가 재차 말했다.

“그러니까 얼른 다녀와. 알았지?”

못내 걱정스럽다는 양 뒤를 돌아보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이엘리는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카리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약국에서 이런저런 약들을 사다 보니 돌아가는 게 좀 늦어졌다.

지혈제며 소독약이며 붕대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들어서, 약사가 황망 하게 ‘그 정도로 약이 필요한 상처 라면, 차라리 병원에 가시는 게 나을 텐데요?’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대답 대신 소년은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이엘리.’

사실 자카리도 자신이 예민하게 굴 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그녀의 상처가 큰 상처 가 아니라는 것도, 당장 이렇게 약 국에서 온갖 약을 한아름 살 필요 없다는 것도. 하지만.

‘네가 아픈 건 싫어.’

그녀의 몸에 작은 상처 하나가 남는 것조차 싫었다. 그녀가 아까 미간을 찡그릴 때, 심장이 툭 내려앉

는 것만 같던 그 기분. 그때를 상기하던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한시바삐 그녀의 발뒤꿈치를 치료해 주고 싶었다.

이제 소년은 숨이 턱에 닿도록 달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엘리!”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상하다. ‘벌써 왔어?’라며 대답해 줘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엘리?”

뭔가 불길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이엘리가 앉아 있던 벤치 쪽으로 다가갔다.

짙푸른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없었다.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던 소녀는 흔적 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얼어붙었다. 얼음물을 머리부터 맞은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엘…… 리?”

그가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여전히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그를 향해 미소 짓던 연녹색 눈등자도, 분홍색 머리카락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숨이 턱 막혔다. 자카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엘리!”

흡사 비명 같은 목소리였다.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소년은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소년이 미 친 듯이 주변을 헤집기 시작했다. 축제의 끝, 쓸쓸하게 흩날리는 색종이 조각에 뒤섞인 꽃잎만이 발에 채

였다. 어느 샌가 소년은 다시 달리 고 있었다.

차라리 자카리를 따라갈걸. 이엘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홀로 보냈 던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고 있었다.

고작 약국에 다녀오는 짧은 시간이 다. 그 정도는 혼자 있어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당신들 뭐예요?”

껄렁해 보이는 사내들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히죽 웃어 보였다.

“꼬마 아가씨, 길이라도 잃었어?”

“집에 데려다줄까?”

아, 젠장. 축제를 틈타 사람들의 돈푼이나 갈취하는 불량배들이었다. 이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일행이 있거든 요.”

그냥 좀 가라.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불량배들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기분 나쁜 웃음을 실실 흘리는가 싶더니, 한 사내가 그녀의 팔을 왁살스레 잡았다.

“건드리지 마세요!”

이엘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하지만 사내들은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길 뿐이다. 그들이 낮게 속삭였다.

“이봐, 아가씨. 얌전히 있는 게 좋을걸?”

“이 손 놔요!”

하지만 축제의 소음 속에서 그녀의 몸부림치는 소리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질질 끌려가다 보니 어느새

골목의 뒤편이었다. 깜깜한 어둠. 이런 곳이 있었던가. 이엘리의 숨이 턱 막혔다.

‘안 돼, 자카리가 걱정할 텐데.’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약국으로 향 하던 소년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차마 그녀를 놓고 가지 못해서, 머뭇거리던 그 얼굴도. 분명히 그녀를 찾고 있을 터였다. 이엘리의 눈동자에 날이 섰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엘리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그 와중에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날아가 버렸다.

구두를 주울 새도 없이, 신경질적 인 손길이 이엘리의 입을 턱 틀어막았다. 험악한 목소리가 으르렁댄다.

“조용히 해!”

“읍, 으음!”

거친 손길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 부림쳤지만, 자그마한 몸집이 제압 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귀한 댁 아가씨 같지 않아?”

“그래, 몸값 좀 비싸게 받을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

쩝, 사내 중 한 명이 입맛을 다셨 다. 이엘리는 머리가 아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헤센바이츠 공작령은 제국에서도 손꼽히게 치안이 좋은 곳이다. 그랬 기에, 이런 납치 사건에 휘말릴 곳 이 아니라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축제 기간에는 뜨내기들이 드나들 수도 있다는 걸 예상치 못했다.

‘다리 사이를 차 버리고 도망치면? 아냐, 사람이 너무 많아.’

최소 다섯 명의 사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가 무술을 익힌 것도 아니니, 여기서 그런 방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자카리. 이엘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엔. 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달리던 자카리는 초조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어딜 가 봐도 이엘리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대중없이 붙들 고 물어보았다.

“혹시 분홍 머리 여자애를 보지 못 했나요? 눈은 연녹색이고, 키는 이 정도……!”

“아니, 모르겠는데.”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자카리는 점차 초조해졌다. 축제는 끝났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 헤매던 중, 자카리가 퍼뜩 그 리에 멈춰 섰다.

“저건……”

구두였다. 오늘 이엘리가 신고 왔 던 에나멜 구두.

하루 종일 돌아다녔음에도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구두코가 자카리를 놀리듯 반짝이고 있다. 자카리는 떨리는 손으로 구두를 집어 들었다.

“……이엔?”

새파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도무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안 돼. 그는 구두를 꽉 움켜쥐었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격렬한 감정은 괴물의 힘, 겨울의 마법을 폭주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야 해. 그녀와 만나야 해. 그러려면……”’

폭주 같은 것은 해서는 안 된다. 전장에서 겨울의 힘을 보일 때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떠올랐다.

그 힘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패배했을 텐데도, ‘괴물’이라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기사들.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겨울의 힘 때문에 그를 경멸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두가 떨어진 곳 앞에는 어둠이 낮게 깔린 골목이 엎드려 있었다.

어금니를 지그시 문 채 자카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양손에는 구두 가 소중히 들려 있었다.

“으읍, 읍, 으으음……!”

이엘리는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이 가득한 더러운 뒷골목. 하수구의 악취가 났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안 되는데, 자카리를 만나야 하는 데. 그 애가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어린 소녀의 몸은 이럴 때 아무런 쓸모도 없다.

사내들의 거친 손은 마치 족쇄처럼 그녀를 단단히 움켜쥐고 묶었다. 그나마 그녀의 입성이 꽤나 말끔한 것을 보고, 돈푼깨나 있는 집안의 아 가씨라고 생각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몹쓸 짓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요 아가씨를 가둬 놓고 생각 하자고.”

“크, 어디서 이런 돈주머니가 굴러 왔지?”

“몸값은 어느 정도로 받아야 좋을 까?”

사내들은 제멋대로 떠들었다. 이엘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할 텐데. 하지 만 상황이 너무 불리했다. 지리조차 모르는 그녀와, 이곳에 오래 머물렀을 다섯 명의 건달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환생했으면 뭘 하나. 어른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나. 지 금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 력한 입장이었다.

두려움보다도 분함이 앞섰다. 눈물 이 차을라 지그시 숨을 삼키던 때.

저벅.

“……뭐지?”

발소리가 들렸다. 사내들 중 하나가 의아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순간 이엘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백은발, 바다처럼 짙푸른 눈동자.

마치 우아한 어린 맹수인 양 한 걸음을 내디뎌, 그들 앞에 멈춰 선 소년.

‘자카리!’

막힌 입술 안쪽으로 이엘리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더듬었다.

“……이엘리.”

이윽고 자카리가 이엘리를 불렀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보았다. 까드득 이를 악문 그가 차분한 목소리 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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