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96)

9 화

이엘리의 웃는 얼굴 하나에, 밤새 가게를 찾고 동선을 짰던 고생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가 그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카리는 웃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도착한 카페 로 랑은 번화가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카페였다.

고상하면서도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푹신한 소파, 낮은 테이블과 고급 찻잔을 보며, 그녀는 무척 행복해했다.

“와, 진짜 이거……”

테이블 위로 차곡차곡 차려지는 음식을 보던 이엘리의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삼단 트롤리에 층층이 쌓인 케이크와 스콘, 마카롱과 샌드위치는 그녀의 넋을 쏙 빼 놓기에 충분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어? 자카리, 정말 대단해!”

“마음에 들어?”

“응! 최고야.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이엘리는 자카리를 마음껏 칭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난했던 그녀는 이런 가게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는 프랜차이즈 카페는 자주 갔지만, 이런 본격적인 전문점은 아니었으니까.

“나 먹어도 돼?”

“물론이지, 다 널 위해 시킨 거야.”

그녀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자카리였다. 그는 고민하는 대신, 모든 디저트를 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홀린 것처럼 포크를 집어 든 그녀는 케이크를 크게 한쪽 잘라 냈다.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밀크티를 홀짝 마신 후 감탄을 토해 낸다.

“아, 이거 진짜 맛있다.”

설탕을 듬뿍 넣은 밀크티까지 이엘리의 취향에 꼭 맞았다. 이엘리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너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게는 못 와 봤겠지. 정말 고마워.”

그 말을 듣자, 다시 주책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감촉마저 기꺼워 자카리는 뺨을 붉혔다.

“넌 안 먹어?”

“그게, 난 단 음식은 별로라서.”

그렇다면 날 위해 일부러 이 카페를 골랐단 말인가. 자카리에 대한 호감도가 다시 한 번 상승했다.

이엘리는 피칸 파이를 조각냈다. 한 조각을 그의 입에 갖다 대며 그녀는 짓궂게 웃었다.

“자, 아 해.”

“……이엔?”

“얼른, 팔 아프다니까.”

그녀는 살랑살랑 팔을 흔들었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간 얼굴이 된 자카리가 입으로 파이를 받아먹었다. 와, 오늘 엄청 귀엽잖아? 흐 뭇하게 그를 보던 그녀는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흠, 이런 걸 생각하면…… 의외로 결혼도 할 만하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도 할 만하다? 그렇다면 처음 에는 결혼 생각이 없었단 말인가? 한껏 들떴던 기분이 바닥 깊은 곳 까지 추락해 버렸다.

자카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엘리는 황가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그와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마음은…….

“그야, 난 처음엔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었거든.”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카리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 그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

“물론이지, 결혼해 봐야 피곤하기만 한걸.”

여성이 사회에 나서는 게 당연시되 던 전생의 기억이 남아서일까, 사실 이엘리는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데, 어째서 결혼을 해야 하지? 이런 생각이었지만.

‘뭐, 자카리와의 결혼은 나쁘진 않지.’

잘생겼지, 친절하지, 엄청 부자지. 비록 시아버지가 재수 없긴 하지만, 남편이 예쁘니 다 괜찮다. 비록 어 린 동생을 돌보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정도는 뭐. 그때 자카리가 다급 하게 물었다.

“그럼,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해?”

“으응? 아니, 뭐.

얘가 또 왜 이러나.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든 자카리를 달래려 입을 열어 본다.

“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 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 만약에, 그 어쩔 수 없는 상 황이 없었다면……”

자카리의 눈동자가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자카리가 한숨처럼 되물었다.

“……넌 나와 결혼하지 않았겠지?”

……고심했던 대답은 아무래도 역 효과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당황한 이엘리가 굳어 버렸다.

“어, 음..”

굳이 따지자면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다면, 자카리는 진짜로 울어 버릴지도 몰라.

“그, 그게. 그러니까……”

하지만 이미 자카리는 충격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고개를 푹 수 그렸던 그가 대답했다.

“……아니야. 네가 그렇게 생각해 도 내가 할 말은 없지.”

아, 저 유리멘탈. 이엘리는 황망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때 자카리가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대신, 네가 만족할 수 있도록 내 가 최선을 다할게.”

“응? 으응……”

그래, 네가 그걸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뭐, 아예 결혼 안 할 생각은 아니었어. 조건이 맞으면 해도 상관 없지.”

“정말? 그 조건이 뭐였는데?”

순간, 자카리의 눈동자에서 불이 튕기는 것 같다. 이엘리는 약간 짓 궂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으음…… 내 취향을 완전히 저격하는 미모는 기본에, 몸매 좋고, 성격 좋고, 엄청 부자인 거?”

저런 조건, 내가 정말로 맞출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 자, 그녀가 한숨을 쉰다.

“저거, 너잖아.”

“……뭐?”

“너 잘생겼고, 다정하고, 엄청 부자 잖아.”

자카리의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 찼 다. 왜냐하면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한 마디 말로 자카리를 혼란 속에 빠뜨린 이엘리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

“……이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의 표정이 순간 결연해졌다. 그는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너는 내게 있어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야.”

“자카리?”

“너를 존중하고 아끼는, 좋은 남편 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러니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절박한 그 표정. 그런 그가 안쓰럽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내가 먼저 널 놓는 일은 없을 거야.”

자카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별생각 없이 그녀가 하는 말, 행동. 그 모든 것이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아마 이엘리는 전혀 모를 것이 다.

그때, 이엘리가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 고, 축제나 구경하러 가자.”

그녀는 손을 감아 쥐었다. 언제나 그렇듯 따뜻하다. 연녹색 눈동자가 그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넌 언제나 너무 잔걱정이 많아.”

이엘리의 다음 목표는 간식거리 노점상이었다. 그녀는 노점상 속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역시 인생의 진리는 단짠이지. 단 케이크들을 실컷 먹었으니, 이제 짠 것 차례야.’

전생에서부터 마음에 새겼던 진리를 되새기며, 이엘리는 매의 시선으로 간식거리들을 살폈다.

“앗, 닭꼬치!”

"닭꼬치 하나 어때, 아가씨?”

이엘리와 눈이 마주친 노점상 주인 은 수더분한 미소를 지으며 양념을 바르던 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홀린 듯이 닭꼬치가 익어 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숯불 위로 타닥거리며 떨어지는 기름, 불 위에서 돌돌 말리며 익어 가는 기름진 닭 껍질, 그리고 야들야들해 보이는 닭고기들!

“두 개…… 아니, 네 개 주세요!”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통 크게 먹어 보겠어? 이엘리는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네 개라고? 배 안 불러?”

오히려 자카리가 놀라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원래 달콤한 간식 배랑, 다른 음 식이 들어갈 배는 따로 있는 거야.”

“그, 그런 거야?”

“당연하지. 너랑 나랑 두 개씩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뭐. 그녀만 즐거워하면 되니까. 주인이 물었다.

“소금구이랑 양념을 발라 구운 쪽 이 있는데, 어느 쪽으로 먹겠어?”

“하나는 소금구이, 하나는 양념구이요. 얘도 그렇게 주세요.”

“역시 아가씨가 뭘 아는구먼.”

싱글싱글 웃은 노점상 주인이 이엘리의 손에 닭꼬치를 들려 주었다. 짭짜름한 양념을 바른 닭꼬치를 입 에 문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연녹색 눈동자엔 호기심이 가득 차 있 다. 바로 그때.

“아가씨, 이것도 좀 사 가!”

양념구이 하나를 말끔히 먹어 치운 이엘리에게, 노점상이 손까지 흔들면서 외쳤다. 커다란 철판을 달구어 버터를 듬뿍 얹고, 통감자를 달달 볶던 노점상이었다.

버터 특유의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이엘리는 홀린 듯이 노점상 앞에 섰다. 주인은 현란하게 감자를 볶으며 말을 건다.

“이거 진짜 맛있거든. 내가 많이 줄 테니까, 한 컵 먹어 봐. 응?” 

“네, 그럼 제일 작은 걸로 주세요.”

노점상은 이엘리의 손바닥만 한 종이컵을 들고는, 통감자를 수북이 쌓았다. 흘러넘칠 것 같았다.

“원래는 이렇게 많이 안 주는데, 아가씨가 예뻐서 주는 거야. 알았 지?”

나무로 만든 이쑤시개를 쿡 찍어 준 주인이 살갑게 말했다. 이엘리도 주인에게 생긋 미소했다.

“아, 감사합니다.”

“축제 재밌게 보내고!”

결국 이엘리는 한 손에는 소금구이 닭꼬치를, 반대편 손에는 버터 통감 자가 든 종이컵을 야무지게 쥐고, 

축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어때, 맛있지?”

“그러네.”

자카리는 순순히 긍정했다. 양손에 음식들을 바리바리 든 채, 그녀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공작가의 후계자이시니까 이런 음식은 못 먹을 줄 알았는 데.”

“그야 전투식량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 대답에 이엘리는 숙연해져 버렸다. 자카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통감자를 찍어 올렸다.

“후아, 이렇게 구경하는 것만 해도 진짜 재밌네."

이엘리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내내 즐거운 낯이었고, 자카리는 그게 무척 기뻤다.

“예쁘다. 아샤꽃도, 반짝거리는 불 빛도, 노점상도……”

카페 로랑에서도 시간을 꽤 보냈 고, 길거리 음식 또한 하나하나 맛 봤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황 금색과 붉은색 비단 위로 남청색 물감을 칠하는 것처럼, 하늘 위로 온갖 색들이 뒤섞이고 있었다.

어둠 아래로 하나둘씩 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땅 아래에 뜬 별 같았다.

“……신기해.”

자카리가 중얼거렸다. 바다 표면에 서 일렁이는 새파란 빛처럼, 그의 눈에서 감정이 일렁였다.

“뭐가?”

“저주받은 소공작이 다스리게 될 도시에 살고 있는데도…… 다들 행 복해 보인다는 게.”

그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그의 세계는 써늘한 공작성이었다. 공작의 차가운 말이 귀에 맴돈다.

‘넌 영지민들에게 빚을 진 거다. 그들은 괴물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

그랬기에 일부러 단 한 번도 나와 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경멸할 까 두려워서. 하지만 사람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흥겨운 음악 속에서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축제의 저녁을 즐긴다.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꼭 쥐고는 소곤거렸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너 덕분에 저렇게 즐거워할 수 있는 거야.”

“……덕분에?”

“그래. 네가 저 사람들을 지켜 주 고 있으니까.”

아샤꽃처럼 해사한 미모를 가진 소녀는, 제 눈매를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긴 분홍색 속눈썹이 곱게 접히고, 하얀 눈가 위로 옅은 그림 자가 진다. 그 순간, 소년은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아샤꽃향기……”’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아샤꽃향기. 소녀에게서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 향기는, 소년이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향기였다. 제 혈통 속 마법의 주인, 은룡이 오래 사랑했던.

‘누군가와 날을 세우지 않고,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

그건 오로지 이엘리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연녹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너에 대해 말하는 헛소리는 모두 잊어버려. 내 말만 믿으면 돼.”

“……이엔.”

“넌 괴물 같은 거 아냐.”

이엘리가 힘을 주어 말했다. 자카리가 스스로를 ‘저주받았다’, ‘괴물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 짙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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