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96)

8 화

“보잘것없는 자작가의 여식이 날 가르치려 드는구나.”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 같군. 게다가 보잘것없는 자작가의 여식이라니, 이건 너무 무례하잖아? 이엘리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공작의 기분 자체는 양호해 보인다는 거다. 푸른 눈동자에 스며들어있은 감정은 미 세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엔.”

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엘리가 살짝 곁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자카리였다.

“고마워, 날 위해 그렇게 말해 줘 서.”

희미한 미소가 머무른 짙푸른 눈동자. 공작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봄

하늘처럼 맑고 청명하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게.”

“……자카리.”

이엘리를 향해 살짝 미소 지은 자카리가 고개를 곧게 세웠다. 소년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녀를 존중해 주십시오.”

그건 자카리가 공작에게 한 최초의 반항이었다. 공작은 얼음 같은 눈등자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이엘리를 대할 때의 희미한 온기조차 모조리 사라진 모습.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엘리는 제 아내입니다.”

“아내의 기준을 참으로 낮게 두는 구나.”

바짝 날을 세운 자신의 아들을 향 해, 공작이 느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바로 말을 잇는다.

“필요에 의해서 들인 것뿐이다. 헤센바이츠의 반려가 되기에는 상당히 모자란 아이 아니냐.”

“아니요, 제 아내입니다. 오히려 제가 그녀의 반려가 되기에 모자라지요.”

“황가에서 붙인 꼬리인데, 어떻게 바로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느냐?”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자카리는 얼음처럼 차가운 낯을 했다. 소년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저를 괴물이라 부르시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엘리를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시는 건, 안 됩니다.”

빙하 같은 눈동자가 공작을 쏘아보았다. 자카리는 오만하리만치 차가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헤센바이츠의 후계자인 제 가족입니다. 그것도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헤센바이츠의 후계자라. 그 이름을 누가 주었는지는 기억하고 있나?”

“아버님께서 주셨지요. 하지만 저 외에, 그 이름을 이을 수 있는 자 그 누가 있습니까?”

팽팽한 접전이었다. 자카리는 흔들림 없이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괴물’이라고 불리는 그 이유, 겨울의 마법.

헤센바이츠의 혈통에서만 태어나곤 하는 서리 악마의 힘. 역설적이게도 그가 '괴물’이기에, 그 누구도 자카리가 헤센바이츠의 가장 순수한 혈 통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지켜보지.”

공작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대로 자리에 서 일어난 공작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탁. 식당 문이 닫혔다. 허리를 곧 게 세우고 앉아, 공작을 노려보던 그는 그대로 의자에 무너져 내렸다.

“자카리, 너 괜찮아?”

놀란 이엘리가 자리에 서 벌떡 일어 났다. 의자를 밀어낸 채, 곧장 자카리의 곁에 붙어 앉는다.

“왜 공작님과 싸우고 그래, 난 괜찮은데!”

의자에 느슨하게 기댄 채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뻗어 온 손이 잠깐 머뭇거리다 말고, 이엘리의 손을 맞잡았다.

손끝에서부터 온기가 번진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응?”

그 물음에 이엘리가 두 눈을 깜빡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이엘리를 바라보고는, 설핏 휘어진다.

“너도 나 때문에 아버지와 싸워 줬잖아.”

순간 이엘리는 말문이 막혔다. 자카리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작게 소곤댄다.

“그러니까 나도 널 위해 싸우는 건 당연한 거야.”

“그, 그건.”

“넌 내 아내야. 그렇다면 난, 네가 존중받고 살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어.”

아내. 자기 입으로는 멋대로 떠들어댔던 그 단어가, 자카리의 입에서 들려오자 이상하게 간지럽게 들린다.

그녀는 멍하니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수줍었는지 자카리는 시선을 피했다.

“난 네가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켜 주고 싶어.”

자카리는 그대로 눈웃음을 쳤다. 그 표정이 햇살처럼 밝다.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그, 그렇게 말할 거면…… 빨리 회복이나 해.”

“응?”

“날 지켜 줘야 한다며?”

새침한 표정으로 이엘리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누나같던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엘리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자카리가 귀 끝을 붉히며 웃었다. 그녀 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기분이다. 제발, 넌 날 싫어하지 말아 줘. 소년은 간절히 빌었다.

2. 아샤 축제

그날 이후, 그녀의 생활엔 한 가지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손님방에서 벗어나 안채의 방으로 옮긴 것이다.

새로이 옮긴 방은 응접실과 화장 실, 작은 집무실까지 딸린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좋은 방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이엘리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어때, 방은 마음에 들어?”

“응, 고마워. 근데 너무 좋은 방이 라서 좀 부담스러운데.”

“아냐. 사실은 더 좋은 방을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는 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엘리는 단호하게 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도 충분히 과분해."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가구들, 금사가 섞여 우아한 무늬를 그리는 벽지, 하늘대는 레이스 캐노피, 생화 가 가득 담긴 꽃병까지.

솔직히 자카리가 쓰고 있는 방보다 도 더 좋은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아샤꽃도 다 피겠 네.”

이엘리는 창문을 살짝 밀어 열었다. 창문 너머로 연분홍색 꽃가지가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오밀조밀한 꽃봉오리만이 맺혀 있지만, 아마 일주일 내로 활짝 피어날 것이다.

“빨리 피었으면 좋겠다.”

“네가 아샤꽃을 좋아하는지는 몰 탔네.”

“응. 제일 좋아하는 꽃인데…… 넌 싫어해?”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슬쩍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소년 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음…… 글쎄.”

굳이 따지자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에 가까웠다.

공작가에 일말의 애정도 없었으니, 공작가의 상징인 아샤꽃 따위는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엘리가 저 꽃을 좋아한다면.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을 볼 수 있으니, 싫지 않다. 그때, 그녀가 아쉬 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샤 축제도 한 번쯤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리펜베르크 황가, 그리고 제국 유일의 공작가인 헤센바이츠. 제국의 가장 강력하고 유서 깊은 두 가문은 아쉽게도 사이가 나빴다.

두 가문은 그들의 상징화인 아샤꽃이 필 때마다, 세력을 과시하듯 제도와 공작령에서 축제를 열곤 한다. 특히 공작령의 축제는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북부의 겨울은 무척 기니까, 봄을 기리는 축제를 성대하게 치른다고 했었어.’

하지만 공작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는 신세니, 축제 구경은 어렵겠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갈래?”

“응?”

그때 자카리가 질문을 던졌다. 여 상한 물음에, 애써 마음을 달래던 그녀가 되레 놀라 버렸다.

“뭐? 하지만 공작님께서 허락해 주 시지 않을 것 같은데.”

“이엔, 아무리 내가 공작님께 미움을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카리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손가락을 뻗어,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아내가 원하는 축제 구경 정도는 시켜 줄 수 있어.”

“그, 하지만……”

“혹시 가기 싫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정말 가고 싶었다.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그녀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가는 걸로 하자.”

아니, 이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문제야? 공작님 허락은 안 받아도 되나? 이엘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자카리는 마음을 바꿀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를 바라보던 이엘리가 환 하게 웃었다.

“그래, 고마워. 정말 기대된다.”

작은 속삭임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 았다.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자카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엘리와 헤어져 방 밖으로 나오는 길, 자카리는 메리와 마주쳤다. 흠칫 한 메리가 고개를 수그렸다. 비록

근래의 작은 주인님은 예전에 비해 꽤나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건 아가씨에게 한정된 대우다.

메리는 그대로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메리라 했나?”

메리는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도 아닌 작은 주인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마, 맞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그 말에 메리는 또다시 고개를 조 아렸다. 자카리는 뺨을 살짝 긁적이더니, 나직하게 질문했다.

“혹시, 이번 아샤 축제에서…… 여자들이 즐길 만한 가게나 간식, 뭐 그런 거 있나?”

“예?”

지금 뭐라고? 메리는 제 귀를의 심했다. 자카리는 다소 겸연쩍은 얼 굴로 메리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이엔이 좋아하는 음식도 말해 주면 고맙겠구나.”

“……그게.”

설마, 아가씨를 위해 저러시는 건 가. 왠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메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엘리 아가씨께서는 단 음식을 좋아하십니다.”

“단 음식?”

“예. 간식 종류는 가리지 않으시지 만, 특히 케이크 종류를 즐기시지 요.”

“그렇군. 카페 같은 곳을 미리 찾아 둬야 하나.”

자카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필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에, 메리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주변 하녀들에 게도 물어보고 좀 더 정보를 모아 오겠습니다.”

“그래, 언제든지 내 방으로 찾아오게.”

소년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즐거운 얼굴이 된 그가 메리를 지나쳐 가려다, 뒤를 돌아본다.

“……고맙군.”

의외의 말에 메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주인님에게 처음으로 들은 감사 인사였다.

‘세상에. 저분이 정말로 작은 주인님이 맞으신가?’

민망한 얼굴이 된 자카리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던 메 리는 결국 웃어 버렸다.

어느새 축제 당일이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분홍색 아샤꽃이 가득 히 피어났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꽃

송이가 눈부시게 예쁘다.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 밖으로 나섰다.

호위는 붙이지 않았다. 자카리 혼자서도 이엘리를 지킬 수 있기에,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와, 아샤 축제를 구경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엘리는 홀린 것처럼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따라, 흘끗 창밖을 응시했다.

“엄청 화려하게 꾸며 두었네? 아무리 축제 기간이라지만, 정말 대단해.”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노점상들에서는 잡다한 장신구들이며 수많은 간 식거리를 팔았다.

그 위로 분홍색 아샤꽃잎이 화사 하게 흩날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아샤꽃의 별명 이 ‘봄맞이꽃’ 인건 알아?”

“아니, 몰랐어.”

“그래도 공작가의 상징인데 너무 무관심한 거 아냐?”

코끝을 찡그리며 웃는 이엘리를 보며, 자카리가 따라 웃었다. 관심이 없었던 건 맞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관심이 생길 것 같아.”

“그래? 왜?”

“그건……”

너를 닮은 꽃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자카리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된 그녀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밀려드는 바람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 들렸다.

“나중엔 벚꽃과 아샤꽃을 구분하는 방법도 가르쳐 줄게.”

“그런 게 있어?”

“응. 벚꽃보다 아샤꽃이 꽃송이가 훨씬 크고, 향기도 진해. 그리고….”

이엘리는 종알종알 떠들어 댔다. 내내 연장자처럼 어른스럽게 행동하 던 그녀였으므로, 그 모습은 조금은 생경했다.

하지만, 귀엽다.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자카리는 차분하게 말 했다.

“우선 카페부터 들러 좀 쉬다가, 축제를 돌아보도록 하자.”

“카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새싹처럼 말간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응.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 뒀거든.”

“와, 진짜? 고마워, 신경 많이 썼구나."

“아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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