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96)

6 화

“하긴. 그렇다 해서, 당장 ‘우리는 가족입니다"하고 땅땅 못을 박는 건 좀 어려우려나?”

그 말에 자카리는 어쩔 줄 몰라 헛숨을 삼켰다.

그런 게 아니야. 사실은 너와 가족이 되고 싶어. 처음으로 닿아 본 온 기가 너무나 다정해서, 어디까지 그녀에게 기대해도 좋을지 몰라 두려웠다.

만약 욕심을 부렸다가, 내게서 네가 멀어진다면…….

그때 이엘리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친구부터 하지 뭐.”

“……친구?”

“그래, 친구.”

이엘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답을 듣자마자, 그녀가 처음으로 맛보여 준 사탕보다도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괴였다. 하지만 그 달콤함에 취할 새도 없이, 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네가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으실 거야.”

네가 나를 멀리하지 않았으면 좋겠 어. 날 향해 웃어 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입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러나 이엘리는 어이없다는 낯을 했다.

“무슨 상관이야? 내 남편은 공작님이 아니라 너잖아?”

순간 그는 눈을 깜빡였다. 이엘리 외에, 저에게 저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 설마 내가 싫어서 그렇게 말 하는 건……”?”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라!”

이엘리는 의심스러운 눈을 한 채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당황한 소년이 자리에 서 펄쩍 뛰었다.

“진짜야! 난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해. 정말로 네가 좋아. 그 말 만큼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이엘리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믿어 줄 테니까, 너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이엘리가 자카리를 입지 않게 흘겨보았다. 쟨 아무튼 입이 방정이라니까. 그녀가 핀잔을 줬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의심을 사니?”

“……응, 고마워.”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던 소년은 이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거참, 잘 생긴 녀석이 저렇게 웃으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잖아?

이엘리는 흐뭇한 얼굴로 자카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렇게 웃으니까 더 잘생겨 보이네.”

내친김에 이엘리는 칭찬의 의미를 듬뿍 담아 자카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대답 대신 살며시 뺨을 붉혔 다. 처음이었다, 저런 칭찬을 들어 본 것은.

“앞으로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도 그렇게 웃어 주는 거야. 알았 지?”

“……내가 웃으면 다들 날 혐오스워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 있어? 네 웃는 얼굴이 얼마나 멋있는데.”

자카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는 웃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아버지는 차가운 경멸로 그를 응시 했었으니까.

그 싸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쟁쟁했다.

‘어미를 잡아먹은 괴물이 즐거워하 기도 하는구나. ’

하지만 네가 좋아해 준다면 난 무엇이든 괜찮아. 자카리는 흘끔 이엘리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눈이 마주 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준다.

네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도 좋아. 자카리는 보기 좋게 웃을 수 있도록, 연습을 할 것을 결심했다.

근래 공작 성의 하녀들은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을 놀라게 한 사람은 바로 헤센바이츠 소공작, 즉 그들이 모시는 어린 주인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하녀들은 소곤소곤 대 화를 나눴다.

“있잖아,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요새 작은 주인님의 태도가 예전 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대.”

"거짓말. 그 작은 주인님이?”

하녀 하나가 질색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하는 갈색 머리 하녀의 목소리는 진지하기만 했다.

“미나가 말하기를, 어제 청소를 하려고 작은 주인님의 방에 들어갔다 고 했거든.”

“그런데?”

“청소 시간을 잘못 알아서, 작은 주인님과 아가씨를 마주치고 말았 대.”

하녀들이 말하는 아가씨란 이엘리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공작이 그녀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을 꺼낸 적이 없었기에, 애매한 호 칭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떡해…… 이번에도 잔뜩 화를 내진않으셨어?”

“아니, 전혀! 오히려 웃어 주셨다는데?”

“그게 진짜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에,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색 머리 쪽 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너에게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니?”

“하긴, 그렇긴하지만……”

미심쩍은 목소리로 나마 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긍정했다.

하녀들의 입술과 입술 사이로 자카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담이 퍼져 나 갔다.

작은 주인께서는 이제 화를 내지 않고, 예민하게 행동하지도 않으시며, 그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소문이다. 또한 그를 변화시킨 사람

“역시 아가씨 덕택일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가씨께서는 작은 주인님의 방을 마음껏 드나드시잖아.”

“심지어 메리의 말로는, 아가씨와 작은 주인님께서는 말까지 놓고 지 내시는 모양이야.”

“세상에나!”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리는 말에 하녀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소문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근처에 다가갈 수 없었던 어린 주인은, 새로이 들어온 아내와는 가까이 지내는 모습

을 보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어, 어머나. 공작 각하!”

그때, 하녀 한 명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워낙 대화에 심취해 있었던 탓에, 공작이 모습을 드러낸 것조차 조금 늦게 눈치를 첸 탓이다. 깜짝 놀란 하녀들이 줄줄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감히 작은 주 인님의 이야기를……!”

“아니, 그건 괜찮아."

뚜벅뚜벅 걸어온 공작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짝 흐트러진 짙은 남색 머리카락 아래, 제 아들에게도 물려준 새파란 눈동자가 빛난다. 마른침을 삼키는 하녀들에게 공작이 물었다.

“그보다 아까 나눴던 대화에 대해 좀 듣고 싶은데.”

“이, 이야기라 하오시면……”

“자카리가 요새,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하녀들이 힐끔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개중 용기 있는 하녀가 공작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가끔은 저희에게 웃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가.”

묘한 표정이 된 공작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짙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그리고 다음날. 이엘리는 공작과의 조찬에 초대받았다. 자카리 또한 합석하는 자리였다.

공작과의 조찬이 있는 날 아침. 이엘리는 일찍 자리에 서 일어났다.

하지만 상쾌함과는 거리가 먼 아침이었다. 공작의 초대장을 받은 이래 로 계속 긴장한 바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곤해. 결국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

머리가 무겁다. 두 눈을 멍하니 깜빡이던 그녀는 이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공작과 자카리가 합

석하는 조찬이라니. 지옥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인데. 이엘리는 힐끔 시간을 살폈다.

‘이제 슬슬 메리가 올 시간인가?’

최근 이엘리는 메리와 꽤나 가까워졌다. 메리는 생각보다 살가운 성격이었고, 그녀 또한 공작성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메리와 친해져서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마당발인 메리는 성안의 소문 따위를 가끔 물어다 주었으니까. 때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 메리가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가씨?”

“으응. 잘 잤어?”

“네. 오늘은 무척 일찍 일어나셨네 요.”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어색함 때문에 존대를 했지만, 지금은 말을 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메리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몸단장을 했다. 머리를 빗질해 주던 메리가 씩웃었다.

“오늘 조찬 자리에는 공작님과 소공작님, 두 분 모두 오신다면서요?”

“응, 맞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축하를 건넸다.

“어머나, 축하드려요! 드디어 새로 운 가족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게 되셨네요!”

과연 축하할 일일까. 이엘리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공작이 날 가 족으로 생각한다고 믿느니, 차라리 공작과 자카리가 당장 화해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그럼 예쁘게 입고 가셔야겠네요?”

“뭐, 그래도 정식 만찬에 가까우니 차려입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예요. 아가씨 덕택에 공작님과 소공작께서 식사도 같이하시고.”

메리의 목소리에는 잔뜩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엘리는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렸다.

아무래도 메리는 이번 기회에 냉랭 한 공작 부자의 관계가 개선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히려 싸움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이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지그시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리는 착실히 아가씨를 단장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 색을 닮은 가벼운 연두색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길게 늘어뜨린 분홍색 머리카락 위 로 에메랄드 머리핀을 꽂아 장식할 때쯤,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어리둥절한 얼굴이 된 그녀가 방문을 열었다. 방 밖에 자카리가 단정 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엘리., “

“세상에, 자카리. 나 마중 나온 거야?”

이엘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인의 부축을 받기보다는 홀로 목 발을 짚은 모습이 자카리다웠다.

그래도 비틀대지는 않아서 다행인 데, 뭔가 좀 이상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카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엘리가 질문을 던졌다.

“아직 몸도 다 안 나았잖아. 나 데리러 와도 돼?”

“자카리?”

이름을 부르며 한 발자국 다가서 자, 그제야 소년이 눈을 깜빡였다. 흰 뺨이 화르륵 붉어진다.

“아, 음, 괘, 괜찮아.”

“별로 괜찮은 것 같지가 않은데.”

대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 이엘리가 손을 뻗었다. 그대로 이마를 짚 자, 자카리는 얼어붙었다.

“너 얼굴 엄청 빨개. 열 있는 거 아냐?”

“아니야!”

“그래, 열은 없는 것 같다. 근데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니?”

손을 내려놓은 그녀가 두 눈을 가 늘게 떴다.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나 가벼운 실내복 차림을 하고 있던 그녀였다. 저런 드레스 차림은 처음 본다. 이건 마치…….

‘전설에나 나오는 아샤 요정 같잖아.’

어떡하지. 너무 예뻐서 바라볼 수 가 없어. 자카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런 그를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엘리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을 어루만진다.

“입술 그렇게 깨물면 피난다.”

자카리는 순간 헛숨을 삼켰다. 지금 나, 엄청나게 바보 같아 보일 텐 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자카리는 멋대로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 오늘 엄청……”

“엄청?”

“……엄청나게 예뻐.”

아차.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자카리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물이 올랐다.

“고마워, 너도 오늘 진짜 잘 생겼어.”

다행스럽게도 이엘리는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 넘긴 듯했다. 쿡쿡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잠시 제 어린 남편을 관찰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소년은 또다시 뺨을 붉혔다.

그녀의 시선에 스민 흡족함을 보 자,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직접 옷들을 살펴 가며 몸단장을 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널 데리러 오고 싶었던 거였어.”

“응?”

“그러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 자카리의 귀가 붉다. 어린 동생이 다 자란 척, 어깨에 힘을 준 것 같았다.

‘만약 내게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보았다.

아직 미성숙한 몸을 감싼 회색 정장, 깔끔하게 목에 맨 크라바트. 잘 빗어 넘긴 은발 아래로, 새파란 눈 동자는 이엘리에게 고정되어있다.

‘누구 남편인지 원, 엄청 잘 생겼네.’

이엘리는 사뿐사뿐 걸어 소년 곁에 다가섰다. 목에 맨 크라바트를 매만져 모양을 고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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