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96)

5 화

아샤꽃잎처럼 화사한 분홍색 머리카락, 그리고 새싹을 닮은 연녹색 눈동자.

조그마한 체구와 오밀조밀한 이목 구비를 가진, 오늘 처음 만난 소녀.

이 넓은 공작 성안에서 유일하게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제게  ‘넌 내게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날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이엘리는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 동등한 눈높이를 가진 '사람’으로 대해 줄 뿐.

“내일 다시 만나자고……”

작게 중얼거리던 자카리는 화르륵 뺨을 붉혔다. 양손을 들어 눈앞을 가려 본다.

하지만 눈앞에는 여전히 소녀의 웃는 얼굴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 어쩌지.

“……내 아내.”

언제나 공작 성의 괴물로 살아온 소년에게는 다정함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그는 숨을 삼켰다. 혀끝에 손톱만큼 남아 있는 사탕보다도, 살포시 눈웃음을 치던 이엘리가 훨씬 더 달콤했다.

적어도 그녀의 말 중 하나는 현실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자카리는 이미 그녀가 필요했다.

* * *

이엘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달이 이울어, 새벽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침대에 무너지듯 드러누웠다.

오늘 있던 일을 떠올린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양 뺨을 찰싹찰싹 쳤다.

“미쳤어, 미쳤어. 이엔, 너 정말 돌았니?”

그녀는 복잡한 세상을 편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편한 삶은 이미 반쯤 그른 것 같다.

자신의 남편인 자카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작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년을 감싸고 돈 데 다가, 눈을 똑바로 뜬 채 공작을 향 해 따박따박 말대꾸까지 해 버린 거 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할 수 있을까.

그 애는 얼음으로 짜 올린 까마득한 탑 위에 홀로 버려진 소년 같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거라 믿지 않는 서늘한 시선이 생각났다.

‘헤센바이츠의 단 하나뿐인 후계라 기에, 듬뿍 사랑을 받고 자랐을 줄 알았는데.’

하나 현실은 달랐다. 공작 성에 처 음 온 그녀보다도, 오히려 그가 훨씬 외로워 보였던 것이다.

‘……어째서 다들 그 애를 괴물이 라 말하는 거지?’

인간으로서 받는 사소한 배려마저 도 익숙하지 못했던 것 같은 소년. 상처투성이가 되고도 제 고통을 억 누르기만 하던 소년.

너무 고통에 익숙해져서, 제가 왜 아픈지도 모르는 것만 같던.

“근데 우습네. 고작 자작 가문의 여식이, 황가와 비견하는 공작가의 후계자를 동정하다니.”

이엘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내일 다시 그 애와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은 자야 했다. 그녀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피로감이 전신을 짓눌러, 그녀는 까무룩 잠 속에 빠져들었다.

공작 성의 사람들에게 있어, 소공작의 방은 지금껏 불가침 영역에 가까웠다.

사실 소공작은 성에 붙어있은 시 간 자체가 드물었다.

공작의 명령하에 수없는 전투를 치렸기 때문이었다.

하녀들만이 소공작이 자리를 비울 때 재빨리 청소를 할 뿐, 소공작의 방은 보통 쓸쓸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요새, 그 방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드는 분홍 머리 소녀가 하나 있었다.

“좋은 아침!”

방에 쏙 들어온 이엘리가 발랄하게 외쳤다. 곧바로 커튼부터 걷는다. 새하얀 햇살이 쏟아졌다.

“아직도 자니? 이 늦잠꾸러기야.”

흘끗 뒤를 돌아본 이엘리가 미간을 좁혔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자카리는 늦잠을 즐기곤 한다.

도롱이처럼 이불을 돌돌 감고 침대에 웅크린 자카리를 보던 이엘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저런 모습은 좀 어린애 같네.’

작게 웅얼거리던 자카리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이불을 확 걷어 내자, 그가 눈썹을 찡그린다.

“야이, 언제까지 잘 거야? 일어나!”

“……이엔.”

처음 만났을 때의 서늘한 눈빛은 간데없이, 졸음에 취한 자카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언제 왔어?”

“방금. ”

 잠긴 목소리로 묻던 소년이 다시 한 번 꾸벅꾸벅 졸았다. 제 나이다 운 모습을 보이는 지금이 훨씬 더

보기 좋긴 하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등을 팡팡 쳤 다.

“잠 좀 깨, 정말!”

“아냐, 깼어…… 진짜야.”

애써 눈을 비비던 소년이 눈에 힘을 준 채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피식 웃은 그녀가 연고와 붕대를 집어 들었다.

사람을 꺼리는 소년을 위해, 그녀는 아침부터 의사를 만나고 온 참이었다.

“주치의가 오늘부터는 이 연고를 바르래. 약초의 비율을 바꿨다나?”

“아, 그래?”

자카리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처음 만났을 적, 날카로운 경계심이 가득하던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

앳된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새삼 소년이 고작 열다섯 살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세상 다 산 얼굴 하고 말이야.’

이엘리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비록 제 나이는 자카리보다 두 살이 나 어리긴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그녀에게 자카리는 한참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늘 붕대를 갈아야 하니까, 내가 새로 발라 줄게.”

“괜찮아, 연고는 내가 바를 수 있......”

“쓸데없는 고집 좀 부리지 마. 허리에 있는 상처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단 한 마디 말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타박타박 걸어온 그녀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연고와 붕대를 제 무릎 위에 늘어놓은 이엘리가 양손을 뻗었다.

“팔부터 하자.”

“으응.”

자카리는 순순히 팔을 내밀어 주었다. 가위를 집어 든 그녀가 신중한 얼굴로 붕대를 잘라 냈다.

“……아파?”

“괜찮아, 참을 만해.”

“참을 만하다니 그게 뭐야……”

이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 켰다. 흉하게 갈라진 상처는 딱 보기에도 아파 보였다. 보통의 아이라 면 혼절하고도 남을 상처.

그런 상처를 온몸에 덕지덕지,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다.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새 연고를 발라 주었다. 잠시 후.

“……어라, 이렇게 감는 게 아닌가?”

이엘리는 난처한 얼굴을 했고, 자카리는 웃음을 참느라 볼을 씰룩거렸다.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붕대들이 제멋대로 흐늘거리며 팔 아래로 늘어졌다. 결국 소년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 붕대 되게 못 감는다.”

“시끄러. 사람이 못하는 것도 있어야 인간미가 있지.”

뚱하니 대답한 그녀가 붕대를 꽉 잡아당겼다. 이번엔 좀 아팠는지 그 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악!”

“사람 놀린 벌이야.”

“알았어, 미안해. 붕대는 잠깐 줘 봐.”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에서 붕대를 받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나 싶어 지켜보고 있었더니, 그는 능숙하게 붕대의 매듭을 짓는다. 그녀는 가슴이 시 거리는 것을 느꼈다.

‘혼자서 붕대를 얼마나 많이 감아 봤으면.’

어째 얘는 살아온 인생 하나하나가 불쌍하기만 한 건지.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뒤돌아봐.”

그 말을 들은 자카리는 순순히 뒤 로 돌아앉았다. 흉터가 가득한 허리 위로, 새로이 마수의 손톱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상처 위로 치덕치덕 연고를 바르 자, 아픈 와중에도 간지러운지 소년 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얼마나 전투에 많이 나섰으면 이렇게 흉이 많을 까, 생각하던 그때.

“……자카리. 이 흉터는 뭐야?”

순간 이엘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등 전체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던 것이다.

마수가 낸 상처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이 칼을 휘두른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흉터였다.

내내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자카리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안 돼, 그 흉터는…….

“보지 마!”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자카리가 이엘리를 밀쳤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자카리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황망한 얼굴을 한 이엘리를 바라보던 소년은,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의 낯이 붉어졌다.

“미, 미안. 그게……”

“자카리?”

“……아무것도 아니야.”

자카리는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황급히 셔츠를 내리고 뒤로 물러난다.

뭐야,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이엘리가 당황하여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를 진정시키려 손부터 뻗어 본다.

“음,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

“미안해. 하지만 이건……”

자카리는 자리에  빳빳하게 얼어붙은 채로도 필사적으로 이엘리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그 행동에 이엘리는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더듬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이 흉터에 대해 설명하면, 이엘리는 분명 그를 혐오하는 눈빛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아버지인 공

작이 그래 왔듯이.

절망에 찬 짙푸른 눈동자가 먼 과 거를 되짚었다.

이 흉터는 그가 괴물이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였고, 아비의 끝없는 증오와 원망을 받아 내야만 하는 원죄였다.

“저기.”

“나, 나는.”

이제 자카리는 숫제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엘리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응?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자카리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연히 이 흉터에 대해서 추궁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녀가 낭랑한 어조로 말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들춰내기 싫은 과거가 있을 수도 있지.”

“……이엘리.”

“그러니까 말하기 싫으면 그냥 말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하지만.”

혼란스러운 표정의 자카리를 바라보던 이엘리가, 붕대를 길게 풀어냈 다. 이후 말을 덧붙인다.

“허리에 붕대는 마저 감아야 해.”

“그러니까 돌아앉아 줄래? 셔츠는 허리까지만 올려 줘도 되니까.”

주춤거리던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느다란 허리에 붕대를 감으면서, 

이엘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자카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했을까.

‘흉터들이 셀 수 없이 많아. 치료도 변변찮았을 텐데, 얼마나 아팠을까.’

차라리 아들이 죽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제 아들을 방치하는 공작. 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고요한 공작성.

어떤 심정으로 지금껏 살아왔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쪽 사람들은 미성년자를 착취하는 게 취미인가 봐?”

아차, 실수했다. 진심이 거름망을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와 버렸다. 게다가 명백히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래서는 안 됐는데. 자책을 담아 이엘리는 제 혀 끝을 깨물었다.

그때, 자카리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녀를 향 해 묻는다.

“저, 이엘리. 넌 왜 화를 내는 거 야?”

이엘리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카리와 눈을 맞췄다.

그래도 며칠 동안 얼굴을 보며 부 대꼈다고, 그는 그녀의 표정을 조금 읽어 낼 수 있었다. 지금의 표정은 ‘이거 바보 아냐?’란 뜻이다.

“아니, 사람들이 위험한 일에 널 이용하고 있잖아? 이건 청소년 학대라고!”

“……청소년 학대?”

“그래! 목숨이 간당간당한 전투에 널 밀어 넣다니, 이건 화를 내는 게 당연한 거야!”

한참 동안 성질을 내던 그녀가 문 득 자카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보다, 자카리 넌 화도 안 나?”

“글쎄……”

버릇처럼 ‘난 괴물이니까’라고 대 답하려던 자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을 꺼내면, 그녀가 팔팔 될것임을 본능적으로 예측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넌 내 법적 남편이라고! 나라도 네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

법적 남편. 네 편. 그 말에 소년이 멈칫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럼 너…… 날 가족으로 생각해 주는 거야?”

“법적으로는 가족 맞잖아?”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자카리는 말 문이 막혔다. 붕대를 갈아주던 그녀는 곧 눈동자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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