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이엘리는 잔뜩 인상을 썼다. 소녀의 자그마한 손에서부터 온기가 번져와, 삽시간에 온몸을 데운다.
이런 따스함은 거의 처음 느껴 보는 감촉이었기에, 자카리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상한 녀석.’
내내 온몸을 지배했던 긴장감이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 처음이었다.
“야, 잠깐만……!”
이엘리가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 다. 어딘가 당황한 목소리였다. 자카리는 힘을 주어서 눈을 감았다 떴 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걱정이 가득한 연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조금은 궁금해졌다.
‘넌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얼어붙은 마음 위로 톡, 미세한 금이 갔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순식간에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안 돼, 지금 정신을 잃고 싶지는 않은데.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아냐, 쉽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자카리는 흐려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시 다잡았다. 지금껏 모두가 그랬었다. 자신이 가진 지위, 반반한 외 모 따위에 다가왔다가 금방 그를 경 멸했다. 아무도 소년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네가 뭔데?”
자카리는 냉정한 태도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녀에게 내뱉듯 말한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 하잖아?”
그런 자카리를 보며 이엘리는 묘한 감상을 느꼈다. 너무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작은 아이.
내가 상상한 소공작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몇 가지는 알지.”
“함부로 말하지 마!”
자카리는 발끈했다. 이엘리는 팔짱을 끼며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기울여 답한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애.”
“……뭐?”
당연하게 튀어나오는 대답에 오히려 자카리가 놀라 버렸다. 이엘리는 어깨를 으쏙여보인다.
“그리고 상처가 심해서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어린애고.”
“그게 무슨……!”
“아, 성격이 비비 꼬인 어린애이기도 하네.”
지나치게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자카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엘리는 방긋 웃어 보였다.
“게다가 이것만큼은 확실하지.”
“뭐, 뭐가?”
“내 눈에 보이는 넌, 절대로 괴물 이 아니라는 것.”
그 말에 자카리는 이름 모를 감정 이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저 아이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다만 저 말이 진심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네가 정말로 날 괴물로 생각하지 않는지, 궁금해.’
천천히 긴장이 풀려 나갔다. 자카리는 긴 숨을 내뱉었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그를 불렀다.
“저기, 자카리?!”
정신을 차리게 할 속셈인지, 이엘리가 다시 한 번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 댔다.
하지만 그 감각조차도,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것처럼 현실성이 없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시야가 깜깜해지고, 작은 온기만이 남았다. 자카리는 까무룩 정신을 잃어 버렸다.
자카리는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 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너 때문에 죽었어.’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카리 앞에 나섰다. 아름다운 얼굴 위 엔 증오만이 넘실거렸다.
‘넌 어미까지 잡아먹고 살아가는 괴물이다.’
공작이 말했다. 그를 쏘아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맹수처럼 번뜩였다. 미움에 가득 찬 그 시선.
‘공작 부인께서는 역시, 소공 때문에 돌아가신 거지요.’
수많은 그림자들이 소곤거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적의가 쌓여 자카리의 목을 졸랐다.
소년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던 그는 어느새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혀끝에서 피 맛이 돈다.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싫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달리고 달리면서, 소년은 시시각각 절망했다.
태어나기부터 괴물로 태어났다. 최선을 다해 사랑받으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걸. 죽으면 좀 편해질 까? 비틀린 욕구에 사로잡히던 때.
‘너, 괴물 아니라니까?’
시큰둥한 목소리가 자카리를 새카만 절망 속에서 건져 올렸다. 연분 홍색 아샤꽃을 닮은 소녀가 그를 홱 돌아보았다.
꽃잎처럼 향기로운 분홍색 머리카락 아래,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야이, 이 진상아. 약 먹어야 하니까 이제 그만 눈 좀 뜰래?”
“헉!”
자카리는 두 눈을 치켜떴다. 차가 운 물속에 갇혀 있다 빠져나온 것처럼 호흡이 터졌다.
벌떡 일어난 소년이 한껏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이는 그를 바라보던 이엘리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 뭐야. 자는데 너무 험하게 깨웠나?”
음, 진상이라고 했던 건 너무했나? 연녹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던 그녀는 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어때.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간병해 줬는데 그 정도 불평은 할 수 있는 거 아냐?
“……너.”
입술을 열던 자카리가 문득 멈칫했 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소년의 쉰 목소리를 듣던 이엘리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찬물이 가득 담긴 유리컵을 그의 입술 위로 대주었다.
“자, 물 마셔.”
자카리는 그녀의 손에서 유리컵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이엘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기껏 친절을 베풀어 줬더니, 까칠하기는.”
차가운 물이 목으로 넘어가자 좀 살 것 같았다. 물을 남김없이 마신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신 좀 들어?”
유리컵을 받아든 이엘리가 다시 한 번 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동그란 환약을 들어 자카리에게 내민다.
“그럼 이제 약 먹어.”
“…..약?”
“그래, 약. 왜, 쓴 거 못 먹니?”
그는 눈을 굴렸다. 증오 섞인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그였기에, 보살핌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다.
“보기보다 아기 입맛이구나?”
이엘리가 샐샐 웃으며 그를 놀렸다. 새싹 같은 눈동자가 보드랍게 그를 바라본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자카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말문을 잃고 말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왜, 입에 약까지 넣어 줘야 하니?”
“……됐어.”
미간을 구긴 자카리가 그녀의 손에 서 환약을 빼앗아 들었다. 물과 환 약을 함께 넘기자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그때, 이엘리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의 입 안에 사탕 하나를 쏙 밀어 넣었다.
“자, 사탕.”
달큼한 오렌지 향이 입 안을 가득메웠다. 자카리는 조심스럽게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려 보았다.
사탕은 너무 달다. 마치 이엘리가 처음 맛보여 준 온기와 보살핌처럼.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혼절했다니.’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금껏 이를 악물고 버텨 왔던 자카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소녀 곁에 있을 때면, 자꾸만 경계심이 무너지고 만다. 그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있어?”
“네가 다른 사람들 부르지 말래서 남아 있던 건데?”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그녀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자카리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혼절하기 전 그런 말을 지껄였던 것도 같다. 도대체 내 가 무슨 망발을.
황망한 얼굴이 된 그를 바라보던 이엘리가 대충 손을 휘저어 보였다.
그녀가 뚱하니 말했다.
“어떻게 환자를 혼자 둬?”
“뭐?”
“의사를 부르기는 했지만, 치료가 끝나자마자 나가라고했어.”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팔짱을 낀 채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후,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그러니까, 네 병간호는 내가 전담했다 이거야.”
“누가 병간호를 하라고 시키기라도 했..”
“너 성격 엄청나게 꼬였구나? 그냥 고맙다고 한 마디 하면 안 되니?”
자카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렇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고맙다고 말하면 되는 거구나.
남의 호의라는 거, 나에게도 베풀어지는 거였구나. 무언가 전혀 다른 세계를 엿보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알았어, 고마워. 그럼 이만 나가줄래?”
괴물 곁에 있는 건 여러모로 불쾌할 테니까. 뒷말을 꿀꺽 삼킨 그가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엘리는 어쩐지 굉장히 기분이 저조해진 것 같았다. 그녀가 답했다.
“싫은데? 내가 왜?”
“……넌 내 곁에 있는 게 싫지 않아?”
그렇게 물은 자카리가 반사적으로 이엘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아니, 오히려 네 곁에 붙어있는게 나은데?”
“어째서?”
“그래야 네가 좀 더 빨리 완쾌할 테니까.”
“내가 완쾌하는 게, 너에게 있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순간, 이엘리의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그야 넌, 내 미래의 안전한 생활을 보장해 줄 동아줄이니까 그렇지.”
자카리는 황망해졌다. 그의 곁에 붙어 앉은 이엘리가 검지를 곧게 치켜들고는 설명을 이었다.
“넌 내 법적인 남편이잖아. 그렇지?”
“그게…… 음.”
자카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제 아비인 공작이 스치듯이 말했던 것도 같다. 황가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위해 여자아이 하나가 네 부인으로 들어올 거라고.
사실 자카리는 그것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금껏 제 삶은 공작의 의지를 대행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차피 난 황가에서 진 빚 때문에 황녀님 대신 시집온 거고, 당장 물러날 곳도 없어.”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설명했다. 소녀의 연녹색 눈동자는 생기있게 빛난다.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공작님께서는 황가에서 왔다는 이유로 날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단 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아들과 얽힌 건 모두 부정적으로 보았다.
게다가 저 아이는 공작가와 사이가 나쁜 황가에서 뽑아 보냈다 했다. 그런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게 신 기했다.
“만약에 네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혹은 내가 이혼이라도 당한다 면……”
그녀는 끔찍한 상상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 이엘리는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전생의 속담에 비유하자면, 끈 떨어진 뒤웅박 혹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다.
“결론을 말하자면, 너 외에는 공작 성에서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지.”
이엘리가 당당하게 말했다. 조그마 한 손을 불끈 움켜쥔 채, 빙그르르 돌아 자카리를 마주 본다.
“난 최선을 다해 네 편이 될 거야. 왜냐하면 내게 넌 필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네게 필요하다고?”
“물론이지. 또한 너도 내가 필요하 게 될 걸?”
자신만만하게 말한 이엘리가 활짝 웃었다. 눈앞의 소녀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아, 자카리는 그녀에게 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괴물이 아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 그 말 한 마디가 얼어붙었던 가슴속을 천천히 녹이고 있었다.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쨌든, 넌 내게 있어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앞으로 자기 비하는 하지마.”
“……자기 비하?”
“부담스럽다든지,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느니, 네가 괴물이라느니 하는 말들 말이야.”
마치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그녀의 말에, 자카리는 두 눈을 깜빡였다.
“알았지?”
이엘리가 힘주어 물었다. 저를 바라보는 연녹색 눈동자가 어찌나 진지한지, 자카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그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또 보 자.”
“내일……”
자카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함께 다음을 기약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일 또 찾아와 줄 거야?”
“당연하지. 어쨌거나 우리는 법적 부부이자, 공작성의 동지잖아?”
마지막으로 생긋 눈웃음을 친 이엘리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방문을 닫았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자리에 어색하게 굳어있이던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이엘리 블랑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