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96)

3 화

이엘리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소공작은 어째서 사과하는 거 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웠으면서.

울면서 화를 내도 마땅한 상황 아냐? 게다가 사지 멀쩡하게 귀환한 저 기사들은 왜, 자신들의 전우이기 도 한 어린 소공작에 대한 폭거를 묵인하는 거야?

“저, 고, 공작 각하!”

이엘리는 거의 본능적인 충동에 휩싸여 입을 열었다.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멋 대로 움직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 소년이 가여워서였을까?

“위대하신 북부의 군주, 헤센바이츠의 공작님을 처음 뵙습니다. 이엘리 블랑쳇입니다.”

적어도 공작이 그녀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기에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헤센바이츠 대신 블랑쳇의 성을 대자, 공작은 두 눈을 가볍게 뜨고는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아아. 황가에서 붙여 둔 작은 괴물의 아내로군.”

우아한 미소 끝에는 모욕적인 언사 가 뒤따랐다. 이엘리의 얼굴색이 확 붉어졌으나, 공작은 빈정거리는 그 태도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느른한 시선이 이엘리를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그런데 그대가 여기 왜 나와 있나? 첫 만남은 내일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공께서 오늘 귀택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소공의 아내 된 자로서, 마땅히 나와야지요.”

“소공의 아내 된 자라…… 신기하 군.”

뭐가 신기하냐? 아직 열다섯살짜 리 소년을 마수와의 전투에 내보내는 네 머릿속이 훨씬 신기하다!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채, 이엘리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 황가에서 붙인 소녀라지만, 저 괴물의 아내임을 직접 주장하다니.”

“폐하께서 저를 보내신 건 사실이 지만, 소공을 남편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다행히도 말 자체는 매끄럽게 나왔다.

그녀는 흘끗 소공작을 돌아보았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보이는 큰 부상.

하지만 소공작은 비틀거리기는 커녕,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면서 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부러지기 직전의 칼날처럼 위태롭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소공작께서는 지금 몸이 많이 불편하신 듯 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묻기라도 하 듯, 공작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당장 소공을 안으로 모 셔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괴물에게는 치료 따위 필요 없다.”

순간 공작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 앉았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그 모습을 보며, 이엘리는 숨을 삼 켰다.

공작의 태도는 아까 전부터 계속, 그녀의 신경을 묘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저 사람, 제 아들을 보며 괴 물이라고 일컫는데.

그렇다면 그 아들을 이용하고 있는 당신은 뭐지?

“그렇지 않아요.”

이엘리는 공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답했다. 공작의 푸른 시선이, 그녀를 향해 가늘어진다.

“소공께서는 괴물이 아니십니다.”

“저 녀석이 괴물이 아니라고…… 아하하!”

그 말을 듣자, 공작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한 복도 위로 낭랑한 웃음소리 가 퍼져 나갔다. 짓눌릴 것 같은 고요에 뒤섞여, 그 웃음소리는 어딘가 기괴하게 들렸다.

“……재미있군. 그래, 자카리.”

공작이 엄중한 시선을 피투성이 소년 위로 떨어뜨렸다. 웃음이 섞여 있되, 목소리는 차갑다.

“넌 네 아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설마 네 주군이자 아비인 내 말을 무시할 생각인가?”

목소리 끝에는 날카로운 날이 서 있었다. 소공작은 제 아비를 가만히 응시하다, 입술을 뗐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마땅히 괴물일 것입니다.”

열다섯 소년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무기력한 말투로, 소공작은 그렇게 대답했다.

잘 갈린 칼날처럼 시리게 빛나던 시선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겨울 하늘에 뜬 달처럼 새파란 눈동자.

속눈썹 그늘 아래로 반나마 모습을 감추는 그 눈동자를 이엘리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래, 무릇 괴물이라면 주제 파악이라도 잘해야지.”

공작이 픽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턱을 치켜든 공작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기사들 전원, 모두 수고했다. 다들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물론 자신의 아들에 대한 치하의 말은 없었다. 공작이 홱 돌아섰다. 길게 펼쳐진 대리석 계단을 올라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간다.

마지막까지 소공작을 외면하던 푸 른 눈동자가, 계단 위에 붙박인 듯 서 있는 이엘리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긴장감으로 입술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들어가십시오.”

이엘리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묘한 눈빛을 한 공작이 그대로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났다.

뚜벅뚜벅 구두 굽 소리가 계단 위 로 사라지자, 이엘리는 곧장 몸을 돌려 소공작에게 향했다.

“저, 저기요……!”

“……가까이 오지 마.”

공작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사이로, 소공작은 금세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엘리를 본 소공작은, 곧장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거부했다.

“넌 뭐지?”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이엘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이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아, 그녀는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는 한숨을 삼 키며 답했다.

“저요? 당신 아내요.”

“……뭐? 내 아내?”

그녀의 대답에 소년은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뺨을 얻어맞고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무표정했던 얼굴이 처음으로 허물어졌다.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에게 아내가 생겼다는 것조차 금시초문인 것 같은데.

그녀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내게 언제부터 아내가 생겼지?”

“당신이 마수 토벌을 나간 사이에 생겼답니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소공작, 자카리 곁에 다가섰다. 이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부 사이는 평등한 건데, 왜 나만 존대하고 넌 계속 반말이예요?”

까칠한 녀석, 이래 쾌도 내 정신연령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이엘리가 자카리를 뚱하니 흘겨보았다. 존대와 반말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엘리의 말을 듣던 자카리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그럼 지금부터 나도 반말합니다. 알았지?”

“……”마음대로 해라.”

한숨을 삼키던 자카리는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비틀거리는 소년을 소녀가 잽싸게 부축했다.

“이것 놔.”

“글쎄, 정말로 손을 놓아도 되나?”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꽤나 능글맞은 성격인 것 같았다. 이엘리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법적 남편께서는, 지금 딱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태 같은데.”

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기에, 대답 할 말을 잃은 자카리가 이엘리를 려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엘리는 자카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가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 다.

“야, 너 방 어디야?”

자카리는 잔뜩 경계심을 품은 눈빛을 빛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어디 보자. 저 애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까 공작은 소년의 이름을 ‘자카리’라 불렀다. 그리고 결혼 서약서에 쓰여 있던 이름도…….

“자카리? 너 이름, 자카리 맞지?”

대답이 없는 그를 그녀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하지만 혼미한 정신 때문인지, 자카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옅게 나는 꽃향기에 자카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샤 향기?’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연분홍색 꽃. 그러고 보니, 눈앞의 소녀는 아샤 꽃과 무척 닮았다.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 그리고 새 싹처럼 맑은 연녹색 눈동자. 이엘리가 소년을 향해 투덜거렸다.

“으으, 얘야. 대답은 좀 해 주겠니? 네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하긴, 저 가느다란 체구로 그의 몸을 온전히 부축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터.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 고자, 자카리는 애써 몸에 힘을 주 어 그녀를 밀어냈다. 그가 작게 속 삭인다.

“너, 어째서…… 내 곁에, 오는, ……”거야?”

“뭐?”

이엘리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인상썼다. 자카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눈앞이 자꾸 흐려진다.

“다른 사람들…… 은, 다, 날 피하는데.”

“그것참 우스운 질문이네. 내가 왜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 데?”

양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가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묘한 낯이 된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싫지…… 않아?”

“너 정말 웃긴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났어. 싫고 말고 할 것이 있긴 해?”

한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카리는 이엘리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걸어갈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었다. 물론 방에 들어서자마자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지만.

그녀는 당황하여 자카리를 흔들었다.

“너 괜찮아?”

다급하게 물어보면서도, 그녀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잖아!

“……괜찮, 아. 그러니까, 흔들지 마…… 머리 울리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던 자카리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작게 옹송그린 여윈 어깨가 지나치게 가늘어 보여서, 이엘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자카리가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한 안색.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야, 자지 마. 너 치료해야 해!”

대경실색한 이엘리가 자카리를 와락 붙들었다. 이, 이건 잠든 게 아닌가? 차라리 기절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딱 보기에도 피를 많이 흘렸다. 제 정신을 유지한 채 방에 돌아온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로. 연녹색 눈등자가 얼어붙었다.

‘이 애…… 이러다 정말로 죽을지 도 몰라.’

그녀는 벌떡 자리에 서 일어나 황급히 문고리를 잡았다. 방문을 연 그녀가 목소리를 높인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

“부르지 마.”

그때 이엘리의 옷자락을 붙드는 손 끝이 있었다.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 로 자카리가 속삭였다.

“너 미쳤어?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잔뜩 성이 난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자카리는 완강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옷 깃을 붙든다. 새파란 눈동자가 절박 한 빛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르지, ……마.”

“자카리!”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도대체 왜? 당장 숨이 꼴깍 넘어 가게 생겼는데 아직까지도 자존심 지키니? 그렇게 묻고 싶었다.

대신에 이엘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소년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운 얼굴로 그녀를 제 눈에 담았다.

이엘리는 멍하니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난……”

무감정했던 짙푸른 눈동자 위로 적나라하게 감정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자카리는 감정을 죽인 게 아니었다. 그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꾹꾹 억눌렀을 뿐이다.

“난 괴물이니까……”

자카리의 입술이 달싹였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그마한 음성.

소년의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겁먹어 어쩔 줄 모르고 그녀의 눈을 피한다. 당연히 이엘리가 자신을 괴

물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야.”

그녀는 양손을 뻗어 자카리의 뺨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의 양 뺨은 얼 음처럼 차게 식어있었다.

“너, 괴물 아냐.”

“ ......”

그 말을 듣자마자 자카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는 낯이다.

겨울 빙해처럼 푸르른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니까 자기 비하 좀 그만둬 줄래? 듣고 있으면 짜증난단 말이야.”

“하지만……”

“헛소리할 시간에 얌전히 치료나 받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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