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96)

2 화

그녀는 이미 황가의 인가를 받은 소공작의 아내였다. 마땅히 헤센바이츠의 성을 사용할 권리를 가졌음 에도, 사용인들은 아직도 그녀를 '레이디 블랑쳇’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녀가 말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엘리는 우선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꼈 다. 이 성의 사람들은 그녀를 환영 하지 않는다.

가문의 단 하나뿐인 후계가 반려를 맞이했음에도 공작 성은 고요했고, 하다못해 공작과 소공작도 나와 보 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에게 배정된 방은 손님 방이었다.

‘아무래도 공작가가 보이는 그 예의는 아마, 황제 한정으로 발휘되나 보지?’

화려하게 치장된 공작 성의 방 안에서 홀로 앉아, 이엘리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안주인이 사용하는 방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손님방을 받을 정도 로 홀대하는 건 역시 너무하지 않아?

그녀가 한껏 미간을 찌푸리던 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들어와요.”

“레이디 블랑쳇을 뵙습니다. 임시로 레이디를 모실 메리입니다.”

하녀 한 명이 들어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호칭 문제를 지적하려던 이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반가워요. 그런데, 공작님과 소공께서는 어디에 계신 거죠?”

“아…… 그게. 공작님께서는 영지 시찰 중이시고, 소공께서는 현재 마 수 토벌을 나가셨어요.”

“……잠깐만요. 마수 토벌이라고요?”

이엘리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해 버렸다. 마수 토벌이라니? 하지만 메리는 살갑게 말을 이었다.

“네,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랍니다. 저번에는 북부 야만족 토벌에 직접 참여하셨죠.”

“그, 그러니까. 소공께서 마수 토벌에 이어, 야만족 토벌에도 나가셨다 고요?”

“맞아요. 단신으로 야만족들의 부 대에 깊숙이 들어가셔서, 대장의 수급까지 베어 오셨어요.”

어라, 이건 좀……”? 누가 누구의 수급을 벴다고? 소공작이라 하면 분명 공작님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내 남편이 될 사람을 말하는 거 맞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 애 나이는….

“……”제가 혹시 뭔가 잘못 알고 있나요? 소공작께서는 성인이 아니시잖아요?”

이엘리는 애써 경악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그녀가 알고 있기로, 소공작은 올해 열다섯 살.

아직 성년조차 되지 못한 나이다.

그런 애가 위험한 전투에 직접 참 여한다고? 이건 청소년 학대, 미성년자 착취다. 강하게 키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네, 맞아요. 그런데도 전투에 참가 하셔서 공훈까지 세우시다니, 정말 대단하시지 않아요?”

“어…… 그, 그런가요?”

천진하게 웃어 보이는 메리 앞에 서,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게 그냥 대단하다는 칭찬 하나로 넘길 만한 일인가?

열다섯 소년을 그 위험천만한 전쟁 터에 내몰다니, 게다가 그는 공작가의 후계자인데? 하나 문제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래도 좀…… 소공작이라고 무조건 편하게 사는 건 아닐테지만, 이건 심하잖아?’

미래의 남편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며 예의 운운을 할 게 아니다. 열다섯살 먹은 소년이 야만족, 그리고

마수와 생사를 다툰다니. 나 과부 되는 거 아냐? 이엘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소공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나요?”

“아마 일주일 정도는 걸리실 거예 요. 그리고……”

우물쭈물하던 메리가 입술을 열었다. 제가 하는 말이 무례한 말임은 아는 듯, 미안한 낯이다.

“공작님께서는, 소공께서 오시면 함께 얼굴을 보는 편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군요.”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공작은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고, 단 하나뿐인 아들인 소공작 또한 그리 아끼지 않았다.

만약 소공작을 아꼈다면 그런 위험천만한 전투에 내보낼 리 없고, 처음 대면하는 자리를 황가에서 보낸 마땅찮은 며느리와 함께하지도 않을 터.

“식사는 지금 계신 이 방으로 올려 보내도록 할게요. 괜찮으시겠어요?”

“좋아요, 고마워요. 그만 물러나도 좋아요.”

이엘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식당에서 먹어 봐야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

메리는 꾸벅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어쩐지 미래가 깜깜하게 느껴 져,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공작님께서 소공작을 아끼지 않는 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사실인가봐.’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제국 유일의 공작 가문이자, 황가와 견줄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가문이다.

아무리 소공작에 대한 소문이 험악 하다 한들 부와 권력을 탐내는 사람 은 있을 텐데.

‘그럼에도 소공과 혼사를 맺으려는 가문이 없는 건, 공작이 소공작을 홀대하기 때문이겠지.’

소공과 연을 맺으려다 공작의 눈에 나는 것도 싫을 테니, 못 먹는 포도처럼 바라보기만 했겠지. 게다가 정상적인 가정이면, 사랑하는 딸을 괴물이라는 소문이 난 이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문제네…… 소공작이 조금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창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자리에 서 일어난 이엘리는 살짝 창 문 밖을 내다보았다.

황혼을 등지고, 마차 한 대가 공작 성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허겁지겁 나가 인사를한다. 아샤 꽃과 은룡이 정교하게 얽힌 가문의 문장을 건 고급 마차의 주인은 아마도…….

‘헤센바이츠 공작이겠지.’

불만스러운 낯을 하던 그녀는, 마차에서 빠져나온 남자를 보며 눈을 크게 치떴다.

공작은 짙은 남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냉정한 인상을 가진 미남자였다.

선이 호리호리하여 전체적으로 우아한 느낌을 준다. 사용인들의 인사를 대강 받아 주던 그는 건물 안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험상궂게 생기지는 않았네.’

워낙 소문이 흉흉한지라, 괴물처럼 생겼으면 어쩌나 걱정 했었는데. 저 정도면 무척 준수하다.

‘그렇다면 내 남편의 외모도 기대 해 봐도 되려나?’

나도 참, 실없긴.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엘리가 픽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비록 황가는 인정하려 들지 않지 만…… 헤센바이츠는 강력해.’

마차에 내걸린 공작가의 문장에 아샤 꽃이 당당히 그려진 것만 해도 그렇다.

자존심이 드높은 황가는 공작가를 대놓고 견제했지만, 그럼에도 황가의 문장으로 사용하는 꽃을 공작가 도 사용하는 걸 막지 못했다.

황가와 같은 상징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공작가의 강력함을 증명한다.

‘헤센바이츠는 황위를 되찾지 못하는 게 아니라, 되찾지 않는 것이라 고 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엘리는 포르 르 한숨을 쉬었다.

아들조차 아끼지 않는 공작이, 황가에서 억지로 붙여 준 며느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래도 공작가의 삶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 * *

약 일주일 동안, 이엘리는 이곳의 사용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에 대해서 얼추 파악했다.

시중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요구하는 건 웬만하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소공작의 반려를 향한 공경이라기 보다는 철저히 손님을 향한 대접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대해 주는 게 편하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잖아?”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은 이엘리는 작게 투덜거렸다. 어쨌든 그녀는 법적으로 소공작의 아내인데, 손님 취급만 받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그런데 그때, 방 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잠시 후, 메리가 짧은 노크와 함께 방에 들어왔다. 하지만 눈앞의 메리 또한 약간 들뜬 것처럼 보였기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요? 주변이 좀 소란스러운데……”

“아, 그게.”

메리는 약간 난처한 얼굴이 된 채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공작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니, 내 법적 남편이 돌아왔다고?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이엘리가 메리를 향해 되물었다.

“지금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나가면 소공작을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렇게 물은 이엘리가 황급히 숄을 집어 들었다. 침의 위에 대충 솔을 걸친다.

그대로 방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메리가 황급히 만류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메리가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말고, 내일 만나 뵙는 건 어떠세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돌아오셨다면서요. 마땅히 만나 뵈어야……”

“시, 시간도 많이 늦었고요.”

메리는 다시 한 번 이엘리를 붙들려 했다. 순간 의심스러운 얼굴이 된 그녀가 메리를 보았다.

‘뭔가 좀 이상한데.’

그녀가 공작 성에 들어온 지 일주 일째.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법적 남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위험한 마수 토벌을 나섰던 남편이 귀환했다. 상식적으로 시간이 늦었다는 석연찮은 이유 로, 내일 만나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 오늘 제 남편을 꼭 뵈어야겠어요.”

부러 ‘남편’ 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 말하자, 메리도 더 이상 이엘리를 말리지는 못했다.

그녀는 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공작과 기사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대체 이 상황은 뭐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건장한 기사들 사이에 섞인 한 소년 이었다.

험악한 기사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소년은 천상의 존재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는 황망한 낯을 했다.

‘저 녀석이 아무래도 내 법적 남편 인가 본데…… 엄청 다쳤잖아?’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멀쩡한 반면, 소년은 홀로 전투를 치른 것처럼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새하얀 설원처럼 빛나는 은발 위 로는 검붉은 핏덩이가 말라붙어있었 고, 소년 치고 다소 마른 몸 또한 피 투성이였다.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피의 상당 부분은 소년의 피일 터였다.

‘아프지도 않나? 아니, 그보다 당장 치료받고 침대에 눕지 않으면……”’

하지만 그렇게 심하게 다쳤음에도, 소년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공작 또한 제 아들의 상처를 보살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공작은 오만한 낯으로 제 아들을 내려다보았고, 소공작 또한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얼음으로 빚 은 양 냉정한 표정으로 공작이 말했 다.

“늦었구나. 마수 토벌은 삼 일 이 내로 끝내라 명령했건만.”

“죄송합니다.”

“괴물을 거둬 공작가의 후계로 세워 주었으면, 명령이라도 잘 이행해 야 하지 않겠나.”

이엘리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밉다 해도 자기 자식일 텐데, 어떻게 저런 심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지?

하지만, 모진 말을 들으면서도 소공작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심한 것."

쯧, 혀를 차면서 공작은 시선을 돌렸다.

이엘리는 계단참에 선 채, 당황한 얼굴로 지금 상황을 눈에 담았다. 오래전부터 감정을 모두 죽인 것처럼, 소년은 무감정한 얼굴로 시선을 내린다.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째서?’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혼란스러웠다. 오히려 잘못을 빌어야 하는 사람은 공작이 아닌가?

자신은 안전한 공작 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린 아들만을 마수들과의 전투에 내몰았다.

그뿐인가. 제 아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괴물이라고 일컫는 행동까지. 그때 공작이 차갑게 물었다.

“지금 그 눈빛은 뭐지?”

“오만불손하군. 역시 괴물의 모습 은 속일 수 없다는 건가.”

공작이 혐오스럽다는 양 한껏 눈썹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철썩!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쿠당탕! 소년의 몸이 헝겊 인형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눈을 크 게 치떴다.

“뭐, 뭐야 이건……!”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년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널브러진 소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소년의 입가에는 새 로운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자신과 꼭 닮은 아들의 푸른 눈을 보면서, 공작은 냉엄하게 말했다.

“마수 토벌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 한 주제에 감히 그런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니.”

“……송구합니다.”

저를 향한 날카로운 적의 앞에서, 소년은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사 죄의 말을 읊조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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