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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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

0. 빚 대신 대리 결혼

환생했다. 보통은 환생하면 막 금 수저도 물고 그러지 않나?

그런 기대를 품은 날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흙수저를 물고 환생해 버렸다.

털어봤자 먼지밖에 안 나오는 이름 뿐인 자작 가문.

그게 바로 내가 태어난 가문이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건 알지 만 역시 서글프다.

‘흙수저로 환생한 것만으로도 서러 운데, 빚 대신 결혼까지 해야 하다니.’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황은 대충 이렇다.

애초부터 몸이 약했던 우리 엄마는, 나를 낳은 이후 시름시름 앓았다.

엄마를 열렬히 사랑했던 아빠는 빚을 져 가면서 엄마의 병을 치료해 주었고,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완치 했다. 대신 어마어마한 빚이 남았지 만.

급한 대로 가문이 가진 귀족 작위를 담보로 황가에게 빌린 돈이었기에, 우리 가문은 빚을 갚지 못하면 작위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빚을 갚는 지난한 여정에서 내가 등장하게 된다.

“정 빚을 갚지 못하겠으면, 다른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다른 방법이라고요? 어떤 방법입니까?”

“헤센바이츠 공작께서는 후계자가 있으시지. 자네의 딸을 후계의 배우 자로 보내는 거라네.”

이렇게 말이다. 황가에서 보내온 대리인은 그렇게 선언했고, 아빠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렇다면 자네가 황가에게 진 빚 들은 모두 탕감해 주겠네. 이게 황제 폐하의 전언일세.”

평소 우리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벽난로 옆 소파에 앉은 채, 대리인 은 피둥피둥한 얼굴에 미소를 짓는 다. 마치 제가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기라도 하는 양.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헤센바이츠 공작가라니.. 설마, 무시무시한 소문을 가진 그 가문을 말하는 거야?’

서리 악마, 푸른 피가 흐르는 은 둥, 황제의 가장 위험한 벗.  공작가가 휘감은 수많은 이름들은 하나 같이 무시무시했다.

그런 가문과의 혼사를 은근슬쩍 내 게 미뤄 버리다니, 미친 거 아냐?

“원래대로라면 황녀께서 부인이 되기로 내정되어있었지만, 황녀님은 연약해서 말일세.”

그 말에, 난 존재감이라곤 거의 없는 황녀를 떠올렸다.

나와 동갑내기로 아는데, 이름이 아마 안네로제 리펜베르크였던가.

현 황태자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평민 하녀에게 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아무래도 이거, 황녀를 치워 버리려다 내게 불똥이 된 모양새인데.

“자네처럼 한미한 가문의 여식이, 무려 공작가와 맺어지는 것일세. 어째서 기뻐하질 않나?”

“하지만 대리인님, 저희 이엘리는…… 제 하나뿐인 피붙이이지 않습니까.”

아빠의 얼굴은 이제 핏기라곤 하나 도 없이 새파랬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채, 아빠는 마치 노예처럼 고개를 숙인다.

아빠. 난 숨을 삼켰다. 어째서 아빠가 그렇게까지 해야 해?

“정 그게 싫다면 당장 빚을 갚지 그러나?”

“하, 하지만!”

“빚도 갚기 싫고, 딸도 보내기 싫고?”

대리인은 기웃 고개를 기울이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피둥피둥 살찐 입술이 오만하게 웃는다.

“블랑쳇 자작, 정말로 폐하의 진노를 사고 싶은 겐가?”

“대리인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물론 나도 시간은 주고 싶지만, 폐하께서 이렇게 의지가 확고하신 것을 어쩌겠나.”

대리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난 주먹을 말 아 쥐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물론 나도 결혼하기 싫지만, 이렇게 아빠가 머

리를 숙이는 꼴을 보는 건 더 싫다.

‘게다가 아빠가 대리인에게 아무리 애원한다 한들……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빠가 애 원하는 모습이 시야에 아프게 맺혔 다.

지금껏 아빠는 최선을 다해 나와 엄마를 책임지고 보호해 주지 않았나. 그렇다면 나도…… 우리 가족을 지킬 거야.

“할게요.”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 다. 대리인은 단춧구멍만 한 눈을 최대한 크게 떴고, 아빠는 어쩔 줄 모르고 내 손목을 가만히 붙들었다. 나를 말리려 하는 거겠지. 아빠가 간절히 말했다.

“이엔, 그게 무슨……!”

“한다고요, 그 결혼.”

나는 손을 들어, 아빠의 차갑게 식 은 손끝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빠도 더 이상 그렇게 머리 숙이지 말아요.”

대리인은 한쪽 눈썹을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왜, 뭐? 내가 대신 결혼한다고 한 순간부터 칼자루는 내 가 쥔 거 아냐? 그렇다고 없던 일 로 할 수는 없지?  황녀를 결혼시킬 수는 없으니까!

난 뻔뻔하게 대리인을 마주 보았다. 내 태도가 꽤나 분했는지, 대리인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하여튼, 황가는 처음부터 밥맛이 없다니까.’

나는 평소의 이미지, ‘얌전하고 우아한 자작 영애’ 따위는 모조리 집어치운 채 비딱하게 섰다.

‘뭐, 황녀를 결혼시키기 싫은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날 대리 결혼을 시켜?’

아무리 신분제 사회라지만, 황녀만 소중하고 난 떨거지냐고! 난 들끓는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크흠, 흠…… 내, 이번에는 참고 넘어가도록 하지.”

대리인은 나와 말다툼을 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 듯했 다. 하긴 그래야지. 내가 여기서 결 혼 못 한다고 거절하면, 꼼짝없이 황녀가 헤센바이츠 소공작과 결혼해 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이 서류에 서명하게.”

대리인은 내 앞에 펜과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펜을 집어 든 난, 그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소공작과의 결혼 관련 서류였다. 황실이 헤센바이츠 공작가를 놓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황제의 명령 형식을 띤 서류의 형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황제는 공작가에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 두고 싶은 모양이니까.

하지만 소문이 흉흉한 공작가에 황녀를 보낼 수도 없으니, 마침 빚을 진 우리 가문을 고른 거다.

법적으로 5년 만기로 상환하는 것이 보장되어있는데, 갑자기 당장 갚으라고 압박을 주다니. 양심은 있냐?

‘거기다 왜 하필이면 우리 가문을 골랐는지도, 속이 빤히 보이잖아.’

항변도 제대로 하지 못할 힘없는 자작 가문이라 고른 거겠지. 그들의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헤센바이츠 공작가에 황가 쪽 사람을 붙이고는 싶지만, 그렇다 해서 황가의 피를 일부 이어받은 황녀를 시집 보내기는 좀 불편하다는 생각일 테지. 난 두 눈을 가늘게 치켜 떴다.

'아무리 황녀가 서녀라 한들, 그래 도 무시무시한 소문을 가진 소공자 에게 보낼 순 없으니까.’

나도 귀가 있으니 소공자에 대한 소문은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얼음과 눈을 마음대로 다루며, 괴물 같은 힘을 사용한다 했다. 그 모습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하얀 악귀처럼 보인다고.

‘소공자와 비슷한 나이대인 데다 가, 빚 또한 많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게 나라는 거지.’

황가는 적당한 귀족 여식을 찾으려 꽤 오래 수소문을 했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해 줄 줄 알고?

‘바로 서명부터 하는 건 바보짓이 니까……’

서명은 제쳐 두고 난 대리인을 흘 끔 바라보았다. 예의라곤 하나도 없는 눈빛에, 그가 움찔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빚을 모두 탕감 해 주신다는 서류 정도는 당연히 준 비해 주시겠죠?”

“요망한 것, 알았다.”

감히 밤톨만 한 계집애가 자신을 향해 눈을 똑바로 뜨는 게 싫었는 지, 대리인은 날 보며 쯧쯧 혀를 차 댔다.

하지만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난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도록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서류는, 페하의 직인을 받은 서류일 거예요. 맞죠?”

화가 난 대리인은, 두툼한 살집을 파들파들 떨어 댔다. 그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난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렇게 노려봐서 어쩔 건데? 결혼 취소시키기라도 할 거?

“이, 당돌한……!”

“무려 황녀님 대신 대리로 결혼하게 생겼는데, 이 정도는 받아 내는 게 당연하죠.”

나는 탁 소리가 나도록 펜을 내려 놓았다. 대리인을 향해 생글 웃어 보이자, 그는 당장이라도 혈압 약을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처럼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을 했다.

물론 대리인의 건강 상태 따위, 알 바 아니다. 서류까지 테이블 위에 올린 난, 서류를 밀어 버리고는 팔을 꼈다.

“서명은 공증을 받은 이후에 할게요.”

“뭐라고?!”

“아 참, 대리인님. 이제 제게 함부로 말은 놓지 말아 주세요.”

어디서 계속 반말질이야? 난 이왕 얻게 된 내 칼자루를 마음껏 휘두르기로 했다. 권력 최고!

“이제 이 서류에 서명하면 저는, 무려 ‘헤센바이츠 소공작’과 혼인 관계가 되는 거 잖아요?”

대리인은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말을 맺었다.

“차후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이 될 저에게, 그렇게 말씀을 놓으시면 안 되죠. 안 그런가요?”

아마 꽤 짜증나긴 할 거다. 내가 이 대리 결혼을 통해 공작 부인이 된다면, 헤센바이츠와의 관계를 위 해서라도 내게 존댓말을 할 수밖에 없을 테지.

그렇다 해서 악명이 자자한 공작가 에게 황녀를 시집보낼 수도 없을뿐 더러, 나 외에 대리로 결혼해 줄 레이디를 구할 수도 없을 테니.

“그럼 ‘폐하께서 직접 직인을 찍으신’ 공증 서류를 가져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게 무슨……!”

“그렇다면 안녕히 가세요, 대리인 님.”

축객령을 내린 난, 붉으락푸르락 변화하는 대리인의 표정을 관찰하며 씩 웃어 보였다.

왜,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 상도 하지 못한 거니? 아마추어같 이. 대리인의 낯짝이 일그러졌다.

“이런, 무례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대리인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문짝이 닫히며 부서져 라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까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아, 고소해. 십 년 묵은 체증이 모 조리 내려앉는 것 같아!

“이엔, 도대체 왜 그런 거니!”

그때, 아빠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어깨를 으쓱이면서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잖아요.”

“하지만!”

“아빠. 걱정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요.”

아빠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리인에게 한 방 먹인 것은 좋은 데, 이제 정말로 내가 공작가로 시 집을 가야 한다는 게 문제네. 내 정 신연령이 아무리 높다지만…… 고작 열세 살 나이로 남편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는데.

젠장, 산 넘어 또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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